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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볕뉘 Sep 07. 2024

무해한 나의 사람들-엄마 1

누구나 마음속에 아픈 계절을 품고 산다.

모든 생명이 자신만의 향기로 세상을 가득 채우는 5월의 봄밤.

흩날리는 아카시아 꽃  향기가 공기처럼 주변을 맴돌고  부드러운 바람이 얼굴을 스치면서 코끝을 간지럽힌다. 솜사탕처럼 한없이 달콤할 것 같은 싱그러운 풀내음과 나뭇잎이 잔잔하게 살아 움직이는 골목길.

일상의 소란스러움에서 잠시 벗어난 어두운 골목은 적막함이 가득하고 희미한 달빛에 엄마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저 멀리 어깨가 축 처진 채 걸어가는 엄마의 뒷모습이 보인다.

엄마가 걸어간 거리를 한걸음, 한걸음 애잔한 마음을 포개면서 뒤쫓아 걸어가고 있다.

엄마의 모습은 언제나 앞모습만 보았지, 뒷모습을 보고 따라 걷는 것은 처음인 것 같다.  축 처진 어깨가 엄마 삶에 고단함을 말해 주는 것 같아 먹먹함이 밀려온다.

검붉었던 머리카락은 어느새 흰머리카락이 자리 잡고 그것을 숨기는 듯 항상 모자를 쓰고 다니셨던 엄마.

오늘따라 유난히 커 보이는 배낭 가방이 눈에 먼저 들어온다.

한없이 넓어 보이는 어깨는 왜 이리 작아지셨는지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영원할 수 없다는 자연의 섭리가 손톱에 물들인 봉숭아 물처럼 내 마음을 붉게 물들어 버린 시간.

"엄마?"

"우리 딸 이제 와 배고프지?"

엄마의 인사는 항상 모든 것이 음식으로 시작한다. 이웃들을 보며 "식사는 하셨어요? 아이들한테 은 밥은 먹었니?" 하고 묻는 것은 먹고사는 일이 고달팠던 엄마에게 밥은 다정함이었고, 사랑이었고, 안부였다.

특히 봄이면 엄마의 거친 손길은 유난히 바빠지셨다. 옆구리에는 항상 연두색 소쿠리와 창칼이 쥐어져 산과 들에 있던 온갖 나물, 쑥을 캐러 다니셨다. 봄을 알리는 온갖 나물 냉이, 쑥, 두릅을 뜯어다가 반찬이며, 간식 준비를 해주셨던 엄마. 그중 제일 으뜸은 김미 모락모락 피어나는 쑥 버무리였다. 떡인 듯 떡이 아닌 것이 쌉싸름한 쑥향기가 유난히 고소하게 느껴지던 떡.

엄마가 만들어준 음식은 내게는 자신감이었고, 세상과 연결된 통로였다. 이 음식들로 친구들과 우정을 쌓았으며, 이웃에게 다정할 수 있었다.

"엄마, 아빠 생각나?"

"글쎄, 갑자기 왜 아빠 이야기를......?"

"그냥 아빠가 아픈 몸으로 엄마한테 왔을 때 밉지 않았어 우리 싫다고 떠나잖아 어떻게 다시 받아 줄 생각을 했어?"

"불쌍해서지 뭐 "

"요양원 모실 수도 있었잖아?"

"그러고 싶지 않았다. 네 아빠가 우리 곁을 떠난 것은 맞지만 그 몸으로 미안하다면서 돌아왔고 사실 네 아빠 마지막은 내 손으로 보내 주고 싶었어 너희들 아빠잖아 그것이......."

라고 하셨다.

무심히 나올 것 같은 말을 억지로 밀어 버린다. 숨이 멎을 듯 답답함이 온몸을 울컥하게 만든다.

마음에서 다시 꺼내어 되새기는 것은 미지근한 아픔을 마주하는 것 같다.

나는 책임감 없는 아빠와 책임강이 강한 엄마 사이에서 태어났다.

내가 가정을 꾸려 보니 더욱더 이해 안 가는 모순적인 아빠

깊숙한 서랍 속에 숨겨 놓은 일기장처럼 아빠의 존재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이해할 수 없는 감정도 아빠의 죽음 앞에서는 한낮  아무 감정도 아니었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는 한없이 나약하셨던 분. 미워했던 만큼 사실 너무나 그리웠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것이 핏줄의 힘인가 이런 아빠를 엄마는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다만 그것이......라고만 하셨다.

자식들은 몰랐던 두 분만의 애틋함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뇌졸중이라는 병과 함께 돌아온 아빠를 엄마는 긴 시간을 간호하셨고 누워 계시는 아빠를 대신해 사 남매의 가장 노릇까지 하셨다. 늘 아빠 곁에서 뜨개질로 밤낮을 가리지 않았으면서도 언제나 우리들의 따뜻한 세끼 밥을 손수 차려 주셨던 엄마!.

세상살이가 밝은 것이 아니라 엄마가 비추었던 세상이 아름다웠던 시절.

마음이 가장 밝은 곳에 있었던 봄 같은 시절들.

엄마라는 눈부신 빛이 있었기에 따뜻함을 느꼈던 그 모든 계절이 엄마의 사랑임을.

엄마의 잔잔한 미소는 나의 마음에 고스란히 스며들었다.

태풍의 눈처럼 한없이 고요한 순간에도 수많은 밀물과 썰물은 엄마의 인생을 할퀴어 버렸다.

가족의 모든 것들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내던 사람. 사부작사부작 늘 일을 하던 사람.

미련과 후회가 없는 대신 늘 불안을 떠안은 대가를 치르는 삶을 사셨던 엄마.

공중에 흩어지던 엄마의 말을 애써 부여잡으려고 나의 마음은 계속 꼼지락거리던 밤.

지금 나는 그때의 엄마 나이가 되었다.

어쩜 남은 생에만 집중해도 서글퍼지는 나이.

작은 짐승처럼 울 수도 없고, 노을을 보듯 넋 놓을 수도 없는 나이.

나에게 아팠던 어는 5월의 봄밤은 이제 제일 사랑하는 계절이 되었다. 여전히 어렸을 적 엄마가 해준 쑥버무리를 먹고, 하얀 아카시아꽃과 이팝나무의 꽃잎을 보며 소소하고 일상적인 평화 속에 하루를 보낸다. 한때 두려움이었던 어두운 기억은 흔들리는 꽃잎처럼 마음의 상처를 흩날려 버렸다.

누군가의 도움을 애타게 기다리는 마음을 외면하지 않고, 다정함을 주려고 노력하는 지금의 나는 아빠처럼 누워만 계시는 엄마의 삶을 대신에 오늘 하루도 열심히 살아내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매일 작아지시는 엄마의 모습과 정 반대로 나는 하루가 다르게 매일 성장하고 있고, 병원에 계시는 엄마를 두고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 먹고 웃으며 일상을 살아가는 내가 어느 날은 징그러울 만치 싫고 경멸스러워서 가라앉아도 이런 나의 모습을 원치 않을 엄마를 생각하며 다시 한번 나를 추스른다. 견딜 수 있는 마음의 여백을 남겨둔 채

후회와 모순으로 내가 영영 사라지고 싶은 순간에도, 나를 지탱해 주던 마음.

다정한 사람은 밝은 빛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어두운 터널을 통과할 수 있는 마음을 보여 주는 거라며 어떤 상황에서도 용기와 희망을 잃지 않는다면 다시 시작할 수 있음을 몸소 직접 보여 주신 엄마의 삶.

빛의 계절이 돌아왔다. 겨울의 추위와 메마름이 물러나고, 따뜻한 햇볕과 푸른 하늘이 있으며, 엄마가 아직도 내 곁에 살아 계시기에 소중한 계절 봄.

봄의 찬란함이 잠시 머무르다가 사라져 버린다 해도 엄마의 사랑과 헌신은 나의 세상을 밝게 만들어 줄 것이다.

어렸을 적 봄밤의 엄마와 대화가 유난히 떠오르는 계절.

아픈 기억을 미소로 밀어내준 엄마의 사랑이 내 인생의 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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