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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창복 Jan 10. 2022

팽이와 찍기

   아무튼 딱지든 구슬이든 뭐 하나만 가지고도 온종일 이러고 놀 수 있었다. 노느라 심심할 틈도 없이 놀았고 또 놀면서 어른으로 자라났다. 그런데 딱지와 구슬에 결코 뒤지지 않는, 박진감이 넘치는 놀이가 있었다. 특히 남자애들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가지고 있었던 필수품, 팽이였다. 얼음 위에서 두 손으로 비틀듯 돌린 다음, 채찍으로 찰싹찰싹 때려서 계속 돌게 하는 도토리 모양의 그 팽이가 아니다. 도토리 팽이가 교과서에서 영희와 철수가 가지고 놀던 ‘공식’ 팽이이긴 했지만, 난 이 팽이를 가지고 놀아본 적은 없다. 문방구 팽이를 가지고 놀았다.

   도토리 팽이보다 키는 좀 작은 대신 상판이 넓어서 깔때기 모양을 하고 있다.?문방구에서는 높이와 너비(지름), 무게가 조금씩 다른 여러 모양의 팽이들을 팔았다. 팽이 말고도 총알 모양의 쇠심 2개와 팽이를 던져서 돌릴 때 사용하는 1.5m 정도의 줄이 필수 부속품인데, 팽이를 살 때 함께 딸려온다. 일단 팽이의 상판과 아래 꼭지, 두 곳의 정중앙에 쇠심을 박아야 한다. 물론 미리 구멍이 뚫려서 나온다. 특히 아래쪽에 박을 쇠심은 팽이의 중심을 잡아주고 회전 성능을 결정하는 핵심 부품이라 잘 박아 넣어야 한다.

   관건은 중심인데, 우선 위와 아래에 모두 쇠심을 박아 넣는다. 이때 심을 박아 넣을 구멍에 미리 조그만 종이 쪼가리를 같이 넣어서 심이 안에서 놀지 않고 꼭 끼어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런 다음 줄을 감아 돌려서 시험 운전을 해본다. 이때 위아래 쇠심의 회전상태를 유심히 살펴서 중심이 맞는지를 잘 살펴야 한다. 쇠심이 중심에 딱 들어맞도록 박히지 않으면 팽이가 돌 때 털기 때문이다. 그러면 오래 돌지 못하고 툴툴대다 그만 푸르르 죽어버린다.

   얼라인먼트(alignment) 기술을 사용하여 중심을 잡아준다. 이때 교정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분필이다. 분필을 검지와 장지 두 손가락 끝 사이에 끼고, 한쪽 뺨을 땅바닥에 바짝 대고 분필 잡은 손을 돌아가는 팽이의 아래 심 쪽을 향해 천천히 들이민다. 밀다가 쇠심을 툭툭 두어 번 건드린 다음, 팽이를 멈춰 세우고 확인한다. 심 둘레에 조금 진하게 분필이 묻은 곳이 보이는데, 요기가 바로 중심보다 좀 튀어나와 분필이 많이 묻은 거다. 여기를 망치로 톡톡 때려서 들어가도록 교정한 다음, 다시 돌려서 같은 방법으로 확인한다. 이렇게 쇠심에 분필이 골고루 묻을 때까지 몇 차례 하면 중심이 딱 잡힌다. 같은 요령으로 위쪽 쇠심의 중심도 잡아준다. 회전할 때 나타나는 무늬를 연상하면서, 팽이 상판에 취향에 따라 크레용 칠을 해주면 팽이 조립 공정은 끝난다.       

   이제 본격 팽이놀이로 들어간다. 역시 순번을 정해 각자 팽이를 던져 돌리고, 가장 오랫동안 죽지 않고 돌아가는 팽이가 이기는 거다. 이때 먼저 죽는 순으로 다음 게임에서 먼저 돌리게 되므로, 오래 버틸수록 다음 게임에서도 유리하다. 승자 프리미엄인 셈이다. 팽이가 막상 돌아가면 엄지손가락 손톱으로 돌아가는 팽이를 살짝살짝 건드려서 수평을 잡아준다. 혹시 움푹 파이거나 고르지  않은 곳으로 들어가면, 줄을 양손으로 적당히 팽팽하게 잡고 팽이 아랫심 쪽에 대고 살짝 밀어서 고른 땅 위로 이동시켜서 안정적인 회전 궤도에 들어서게 한다. 

   이렇게 놀다가 싱거워지면 ‘박치기’로 넘어간다. 다른 규칙은 같은데, 돌아가는 팽이를 줄로 이동시키면서 다른 팽이에 충돌시켜서 상대 팽이를 자빠지게 하여 마지막까지 죽지 않고 생존하면 1등이 되는 것이다. 자빠뜨리는 것 말고도 미리 그어놓은 선 밖으로 밀어내도 밀려난 팽이는 죽은 거나 마찬가지로 순위에서 밀리게 된다. 그래서 박치기할 때는 묵직해서 팽이 무게가 좀 나가는 게 유리하다. 이른바 ‘떡판’ 팽이가 판을 주도한다. 몸집이 작거나 가벼운 놈들은 근처에 와서 슬쩍 닿기만 해도 제풀에 튕겨 나가떨어진다.

   박치기로 넘어가면, 돌아가는 팽이를 그저 지켜볼 때와는 달리, 완전 박진감 넘치는 상황으로 돌변한다. 편을 짜서 편 대결도 하는데 이때는 작전이 걸린다. 리더 형아의 지시에 따라 기민하게 좁은 공간을 움직인다. 얼마 전 TV에서 전직 특수부대 출신 청년들이 나와 진흙탕 물이 담긴 좁은 공간에서 서로 밀어내기 군사훈련 게임을 하던데, 그 장면과 매우 흡사한 상황이 된다. 정말 특수부대원 못지않은 피 튀기는(?) 전투가 벌어진다.     


   이것도 잠깐이다. 팽이를 이렇게 한가하게 돌리고만 있지 않는다. 초반에야 몸 푸는 셈 치고 돌리고 박치기하고 놀더라도 곧 ‘찍기’로 넘어간다. 그럼 어린애들은 빠져서 저들끼리 한옆에서 하던 거 계속한다. 애들 빼고 선수들끼리의 편이 짜지면, 다들 눈빛부터 달라진다. 본게임 모드로 바뀌는 것이다. 찍기는 박치기보다 훨씬 공격적인 놀이다. 팽이를 땅에 던져 돌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팽이 위를 겨냥하여 던져서, 상태 팽이를 찍거나 아예 쪼개버리는 게임이다. 단번에 쪼개버리기도 하고, 쪼개지는 못해도 정통으로 맞으면 소스라치게 나뒹굴다가 푸르르 죽어버린다. 

   찍기는 팽이를 던질 때도 수평으로 던지지 않고 수직으로 내려찍듯이 던진다. 팽이를 90도 비틀어 잡은 다음 투수가 공을 던지듯이 위에서 아래로 던지는데, 이때 미묘한 감각으로 적절한 타이밍에 줄을 획 잡아당기면서 팽이를 수평으로 다시 틀어준다. 그래야 팽이가 수평으로 착지하고, 팽이 아래쪽 쇠심이 상대 팽이의 상판에 닿을 수 있다. 우선 공격할 팽이를 정하고 그 위에 정확히 떨어지도록 조준해야 한다. 표적 팽이가 계속 돌아가면서 조금씩 움직이기 때문에 그것도 고려하면서 던져야 한다. 이때 매우 섬세하고 미묘한 감각과 기술이 사용된다. 

   줄 감기도 다르다. 보통은 아래 심에서 시작하여 시계방향인 바깥쪽으로 팔을 돌려 감아 나가지만, 찍기용 감기는 반대로 안쪽으로 감아나간다. 군인들이 신는 워커를 매는 끈이었는지, 국방색으로 된 줄이 쫀쫀하게 잘 감기고 길이도 충분해서 최고로 쳤다. 팽이 옆면까지 두어줄 감쌀 정도로 다 감고 나면, 매듭이 져 있는 줄 끝부분이 새끼손가락과 약지 사이에 걸리도록 끼운다. 그리고 엄지와 검지로 팽이 테두리를 감아쥐고 줄이 팽팽하게 잘 감겼는지 점검한 후, 나머지 한 손과 맞잡고 와인드업을 한 다음에 정점에서 빠른 속도로 내리찍어 던진다. 투수가 투구하는 자세와 거의 같다.  

   팽이의 아래 심이 뾰족하면 돌면서 흙을 파고들어 오래 돌지 못하기 때문에, 보통은 뭉툭하게 다듬는다. 하지만 찍기에서는 아래 심이 공격의 성능을 좌우하므로, 상대 팽이에 잘 파고들도록 항상 뾰족하게 다듬어 놓는다. 그리고 중량이 좀 있어야 파괴력이 생기기 때문에 너무 작지 않은 팽이를 고른다. 근데 또 너무 크면 상판이 넓어져서 공격받기도 쉽다. 그래서 적절한 크기로 하되, 중량을 늘리기 위한 특단의 조치로 ‘튜닝’을 한다. 소금물에 한동안 담가두는 것이다. 보통 이삼일 정도 진한 소금물에 담가서 절인 다음에야 심을 박아 넣는다. 심을 박고 나면, 역시 상판에 칠을 하고 그 위에 특별히 촛농을 떨어뜨려 상판을 코팅한다. 두께가 2~3mm 정도는 되도록 두껍게 바른다. 찍혀도 잘 쪼개지지 않고, 상처가 덜 생기게 하려는 일종의 완충장치인 셈이다. 

   찍기 팽이들은 대부분 상판에 훈장처럼 군데군데 찍힌 자국들이 나 있다. 찍히고도 쪼개지지 않고 살아남았으니 자신의 무공 전적을 나타내는 상징이기도 하다. 그래서 찍기에 능한 선수급 애들은 팽이 자체를 보물처럼 소중하게 여기고 간수한다. 사실 찍기는 팽이 계 ‘타짜’들의 놀이라 할 수 있다. 고난도의 기술이 없으면 찍기에 낄 수도 없고, 조금 위험하기도 하다. 그래서 국민학교 저학년은 어렵고, 4, 5학년은 되어서야 찍기에 낀다. 특히 딴 동네로 원정 가서는 주로 찍기를 하는데, 이때는 그야말로 인정사정 볼 거 없이 찍었다. 동네의 명예를 걸고 찍었다. 찍혀서 쪼개진 팽이의 나뭇조각이 살점이 튀듯 사방에 튄다. 나름 살벌하다. 

   팽이만 해도 이렇게 돌리기와 박치기, 그리고 찍기 등 노는 방식이 달라서, 용도별로 전용 팽이를 따로 장만해두고 쓰임에 맞도록 길들여 사용했다.


#미아리의추억 #팽이 #찍기 #박치기 

류장복_ 팽이찍기_oil on linen_45.5x53cm_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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