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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창복 Jan 24. 2022

“친정 조카는 키워도, 시집 조카는 안 된다”

나는 엄마 딸이다. 내가 엄마 딸이 된 데에는 아주 오래전 할머니 한 분의 예언이 있었다. 엄마 아버지의 서울살이 첫 정착지였던 정릉, 엄마가 돌도 안 지난 갓난쟁이를 업고 골목에 나오면, 동네 아줌마들마다 포대기를 들춰보며 ‘아이고, 아들 둘에 막내가 딸이네’라며 신통해했다고 한다. 어느 날 주인집 할머니가 날 업고 달래던 엄마에게 슬며시 다가와 “요 녀석 잘 키워~ 나중에 엄마한테 소중한 자식이 될 거야” 했단다. 이게 무슨 계시라도 되는 듯 엄마는 이 할머니의 말씀을 가슴속에 고이고이 간직하고 살았단다. 그러다가 내가 중학생이 돼서야, 무슨 대단한 이야기나 되는 듯 들려주었다. 


미아리에서도 난 ‘막내딸’이었다. 성격이 온순하고 명랑한 편이기도 했지만, 형들과 네 살 일곱 살 터울로 나이 차이가 많은 편이라 자잘한 심부름은 전부 내 독차지였다. 물론 나도 그리 싫지 않았다. 심지어 재미있어했다. 특히 이웃집에 먹을 거 갖다 주라 하면 “내가 내가” 스스로 나섰다 한다. 형들도 말 잘 듣는 막내에게 심부름을 잘 시켰다. 하지만 나도 ‘내가 진짜 엄마 딸인가 보다’ 생각할 때는 아버지가 술  한 잔 걸치는 날이다. 

중학생이 되면서부터 나는 학교 마치고 오면 바로 독서실로 가서 공부했다. 저녁때가 되면 집에 와서 밥만 먹고 바로 다시 독서실로 갔다가 밤 11시가 넘어서 세탁소로 돌아온다. 그리고는 바로 자는 방으로 간다. 보통은 엄마에게 ‘나 왔다’고 인사하고 바로 가지만, 그렇지 못할 때가 종종 있다. 엄마 표정으로 바로 알 수 있다. 아버지가 술에 취해 들어왔고, 엄마와 한바탕 하고 방으로 들어가 주무시는 거다. 아버지는 술을 좋아하신다. 하루 종일 다림질을 하고 나면, 동네 친구 분들과 술 한 잔 하고 밤에나 올 때가 많았다. 


엄마 눈치를 살피며 뭔 일 있었냐고 물으면, “일은 무슨 일, 느그 아부지 또 술 먹었지” 그럼, 나도 마음의 준비를 한다. 이제 곧 엄마의 하소연이 시작된다는 신호다. 그렇지 않을 때는 엄마는 “별일 없다. 얼른 가서 자라” 이렇게 답하기 때문이다. 엄마의 하소연은 그야말로 서사다. 순서는 그때그때 달라지지만, 서울로 올라오기 전 시골에서 시집살이하던 시절부터, 오늘 저녁에 있었던 일까지 이어지는 대하드라마다.      

아버지는 엄마와 결혼을 하고 얼마 되지 않아 전쟁이 터지고, 새댁인 엄마를 고향집에 두고 군에 입대를 했다. 엄마는 둘째 며느리였는데 둘째여서 겪은 설움도 많았다고 했다. 어린 시동생도 업어 키웠다고 한다. 참, 전쟁 통에는 집 마당이 국군 야전병원이 되었다고도 했다. 아무튼 필설로 다 할 수 없는, 서럽고 힘겨운 일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싶다. 


하지만 거두절미하면, 절정은 제대 후에 아버지가 바람을 피운 이야기다. 그것도 엄마가 어린애들 키우며 시퍼렇게 살고 있는 시골집에까지 그 ‘녀자’를 데려왔다는 거다. 더 기가 막히는 일은 믿었던 시아버지가 아버지를 나무라지 않고 모른 척 그냥 두더라는 것이다. 그야말로 미치고 팔짝 뛸 일이다. 남편과 시아버지에 대한 배신감이  얼마나 컸을까? 이 대목에 이르면 몇십 년 전 일이건만, 엄마는 바로 그 당시로 돌아간다. 가당찮은 여자가 애들이 노는 마당을 뻔뻔하게 지나가고, 할아버지는 그걸 보고도 헛기침만 하고 엄마를 외면하는 상황이 떠오른다. 그리고 지울 수 없는 서운한 마음은, 개복 수술까지 받고 결국 죽을 고비를 넘는 걸 살려냈더니, 저러고 술만 먹고 다닌다고...


그러다 엄마도 지쳤는지, 듣고 있는 내가 안됐는지 “내가 애 붙들고 뭔 소리 하노? 얼른 가 자라”한다. 그러고는 눈을 쓱 훔치며, “내일도 새벽에 일어 날끼가?” 현실로 돌아온다. 내일의 일상을 챙기는 엄마로 다시 돌아온다. 나는 잘 알지도 못하는 그 옛날의 이야기들이지만, 다 듣는다. 아니 몇 번을 들어서 잘 알지만, 그래도 다 듣는다.       


••

내가 고3일 때는 세탁소 가게 아랫방에서 기거했다. 어느 날 엄마가 가게방 유리문을 열고 들어오며 헛기침을 한다. 방문을 열고 들어와 아랫목에 손을 짚으면 앉는다. 책상에 앉은 채 돌아보는데 “내려와 봐라” 한다. 분위기가 좀 이상타 싶었다. 집히는 대목도 있어, 건성으로 “왜~” 하며 내려앉는다. 그러고 잠깐의 침묵이 흘렀을까, 엄마가 훌쩍거리는 것 아닌가. 깜짝 놀라서 “왜 그래?”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지난주부터 대학교 입학 학과에 대한 의견이 엄마와 달라서, 원서 마감일을 하루 앞두고도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연세대학교 경제학과를 가겠다고 했고, 엄마는 경영학과를 가라는 거였다. 그래서 원서에 다른 사항은 다 써놓고 학과를 쓰는 란에 ‘경’ 자만 써놓고 뒤 한 글자를 못 쓰고 비워두고 있었다. 


“알아보니 경제학과는 대학원도 가야 하고 오래 공부를 해야 한다는데, 우린 그럴 형편이 안 된다. 경영학과를 나오면 바로 취직도 되니 경영학과로 가라.” 그러고 엄마는 또 운다. 난 더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울지 마라 해도 안 되고... 그냥 알았다고 했다. 그리고 원서 빈칸에 ‘영’ 자를 바로 써넣었다. 그러자 엄마는 미안하다며 더 울었다. 결국 난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대학생이 되었다.  

    

여차저차 해서, 대학교 4학년 가을에 데모 주동으로 감옥엘 갔다. 시국에 관심 많고, 학교에서 순순히 공부만 하고 있지 않다는 것쯤은 엄마는 알고 있었고, 그런 나를 그렇게 말리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주동을 해서 감옥에 갈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학교에서 바로 서대문경찰서로 연행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엄마는 바로 앓아누웠고 식음을 전폐하였다. 그렇게 딱 3일이 지나자, 엄마는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벌떡 일어나서는 바로 민가협 열혈 회원이 되었다. 


매일 오전에 세탁소 수선 일거리들 모조리 서둘러 해치운다. 점심 대충 챙겨 먹고는 아버지 점심상 차려놓고는 바로 서대문 구치소로 막내 면회 간다. 5분 남짓 스치듯 면회를 마치고, 민가협의 다른 엄마들과 회의하고, 학교 교수들이며 변호사들이며 만나고, 시위대와 함께 거리에 서기도 했다. 저녁에 파김치가 되어 집에 돌아와 세탁소일 마무리하고 저녁 차려 먹고 나면, 방 윗목 한편에 치워둔 실타래 뭉치를 끌어당겨 뜨개바늘을 잡는다. 잘 때까지 계속 집중해서 뜨개질을 했다. 한겨울 감옥소가 춥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라, 털장갑에 털모자는 기본이고, 죄수복 안에 껴입을 두툼한 털내복까지 짜서 가져다주었다. 그야말로 24시간을 미친 듯이 ‘막내’만 생각하며 살았다. 


교도소로 이감된 이후에는 면회는 월 1회로 줄었다. 그런데 이감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레이건 미국 대통령 방한 이전에 전두환 대통령이 시국사범을 모조리 석방한다는 소식이 돌았다. ‘한국에 양심수 없다’고 공언한 터라, 쿠데타 정권으로서 미국에 인정을 받고 국제무대에서 서려면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석방에 조건이 붙었다. ‘반성문’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죽어도 그럴 순 없었다. 석방되지 않겠다고 버티자 나중에는 형식적인 것이니 ‘감상문’이라 제목이 붙은 서류에 이름만 쓰면 된다고 했다.  택도 없는 소리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짜 쉬고 싶었다. 


주동자로 잡히기 전에 6개월 동안 ‘도발이’를 치느라 지칠 대로 지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도바리 전에도, 보통 3학년이 되어야 맡는 서클 회장을 우연찮게 2학년 때부터 맡게 되면서 심신이 이미 많이 지쳐있었다. 구치소의 소란함에서 벗어나 교도소로 오자 공부도 막 궤도에 오르던 참이라, 진짜 공부를 좀 더 하고 싶었다. 이미 들어올 때부터 1년 반짜리 커리큘럼을 다 준비했던 터였다. 하지만 이미 전국의 여러 교도소에서 많은 양심수들이 석방되기 시작했다. 내 공범도 이미 나왔다고 한다. 결국 엄마가 김해교도소로 면회를 왔다. “다른 애들 다 나오는데, 넌 왜 안 나오냐”며 엄마가 또 운다. 얼마 후, 교도소 정문으로 마중 나온 작은형이 비닐봉지 채 내민 두부를 움켜쥐고 먹었다.      


•••

내 모든 기억의 원천은 엄마다. 엄마는 가장 중요한 기억의 대상이자, 가장 많은 기억의 원천이다. 그 시절 나의 일상은 엄마를 빼고는 성립이 불가능하다. 나는 엄마라는 자궁 속에서 유영하는 생명체였다. 엄마는 둥지였고 울타리였다. 아니 세계 그 자체였다. 이 글에 담긴 대부분의 기억들은 엄마의 이야기고, 엄마와 함께한 이야기며, 엄마가 들려주고 환기해준 이야기들이 버무려진 것들이다. 


난, 엄마와 관련된 기억 중에 지금도 선명하고 생생한 두 장면이 있다. 하나는, 오십 년도 훨씬 더 된 일이다. 아마도 내가 서너 살이나 네댓 살 정도 되었을 무렵이다. 이 나이 때 일을 기억하는 게 가능한가 싶기도 하다. 세탁소 가게와 가게 방 사이에 부엌이 있고, 부엌을 등지고 막아선 진열장이 있다. 한복이나 여성 양장 옷들을 주로 보관했다. 조금이라도 때가 타면 안 되는 옷, 고급스러운 옷들을 특별히 보관했다. 그 진열장 옆구리에 등을 대고는 두 발로 안달을 하며, 오물거리는 엄마 입만 올려다본다. 엄마는 오징어를 씹고 있다. 얼추 씹어 딱딱한 게 노골해지면 허리를 숙여 내 입에 넣어준다. 나는 발꿈치를 곧추 세워 미리 마중 나가, 입을 내밀고는 날름 받아먹는다. 제비 엄마와 새끼들의 흐뭇한 모습 딱 그대로다. 그래서인지 난 지금도 오징어를 무척 좋아한다. 매해 집에서 제사나 차례를 지내면, 상에 올랐던 오징어는 으레 내 차지다.      


두 번째 기억은 20년이 좀 더 된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사실 난, 우리 아들의 이모부다. 난 딸 넷, 아들 하나인 집안의 넷째 사위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윗동서네 식구들이 교통사고를 당했다. 큰 사고였는데 세 살 아들 재현이만 기적처럼 살아남았다. 재현이는 엄마와 아빠, 제 형을 한꺼번에 잃고 졸지에 고아가 되었다. 그 후 재현이는 친할아버지, 고모, 큰아버지 집을 전전했다. 사고 직후 황망한 상황에서 병원에서 줄곧 조카 재현이를 돌봤던 아내는 이 상황을 못 견뎌했다.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던 아내는 우리가 키우겠다고 그쪽 집안에 제안을 했고, 이러저러한 과정을 겪고 나서 6살이 돼서야 우리와 함께 살게 되었다. 


나는 결혼 직후 결핵에 걸렸고, 나 대신 나선 밥벌이에 지친 아내도 이내 결핵에 걸렸다. 신혼의 부부는 2년 동안 투병하느라, 아이 가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둘 다 병이 완치된 후 아이를 가지려 했을 때, 재현이가 우리에게 다가왔던 것이다. 당시 재현이를 맡아 키울 사람은 양쪽 집안을 통틀어 재현이의 큰집 아니면, 우리였다. 아내는 재현이 큰엄마에게 의견을 물었다. 돌아온 답은 예상대로였다. “저는 아이들도 크고 손이 많이 갈 때라 어려워요. 하지만 시댁의 눈치가 보여 얘기를 못해요.” 아이를 데려온다는 것은 입양을 한다는 것인데, 우리 부부의 뜻이 중요하지만, 집안 어른의 의견도 물어야 했다. 장인이야 먼저 말을 꺼내지 못할 뿐, 우리가 키우겠다면 반대할 리 없었다. 문제는 미아리 엄마가 마음에 걸렸다. 물론 허락을 받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엄마의 의견을 묻지 않을 수도 없었다. 가끔 집에 갈 때마다 재현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묻고 답하곤 했기 때문에, 엄마도 재현이가 지금 어떤 상황에 있는지는 대충 알고 있었다.

“재현이는 요새도 큰엄마 집에 있니?”

“두어 달 지내다가, 지난달에 큰 고모네로 갔어요”

“그렇게 애를 돌리면 어쩐대?”

“... 그러게요...”      


엄마는 하던 다림질을 계속하더니, 툭 던지듯 한마디 했다. “친정 조카는 키워도, 시집 조카는 안 된다” 난, 처음엔 무슨 소린가 했다. 그렇지만 곧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 “아!!!” 속으로 탄성이 나왔지만, 아무 대답도 안 했다. 그냥 듣고 흘린 것처럼. 엄마는 내 고민을 다 읽고 답을 주었던 거다. 엄마는 이모인 너네가 데려와 키워라 말한 거였다. 엄마는 그렇게 ‘허락’이자 ‘권유’를 한 거다. 전혀 허락 같지도, 권유 같지도 않게 대수롭지 않게 남 얘기하듯이 한 거다. 


재현이는 여섯 살 때 우리 집에 왔다. 그동안 몇 차례 놀러 오기는 했지만 이제는 아주 살러 왔다. 이모, 이모부에서 엄마, 아빠로 호칭이 바뀌기까지 꽤 치밀한 작전을 썼다. 그러다가 애가 중학교 들어갈 무렵에야 우리 부부는 비로소 아들에게 커밍아웃을 했다. 그때까지 난 아들의 성으로 살았다. 아들의 활동반경에 들어있는 동네, 이웃, 학교 등에서 나는 주창복으로 살았다. 쉽게 재현이 눈에 뜨일 것이 우편물이므로  웬만하면 아내 이름으로 된 것만 오도록, 내 이름으로 오는 경우는 모조리 회사로 돌려놓았다. 후배인 작가 남상순은 우리 집 사정을 듣더니만, 얼마 후 전화가 와서는 “형~ 형네 집 이야기, 내가 좀 가져다 써도 돼요?” 그래라 했는데, 한참 후에 책 한 권이 집에 도착했다. <나는 아버지의 친척>     


••••

엄마는 7년 전에 설밑 어느 날, 연기처럼 사라지듯 가셨다. 주무시다가 이불속에서 그냥 돌아가셨다. 우리 형제들은 그렇게 홀연히 떠난 엄마들 두고 “참, 엄마답다”고 했다. 구질구질 질척대는 거 딱 질색이셨다. 재현이가 얼마 전에 결혼을 했다. 엄마가 살아계셨더라면 무척 좋아했을 텐데 많이 아쉽다. 요즘 들어 엄마 생각이 많이 난다. (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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