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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창복 Jan 25. 2022

‘박치기’ 김일과 통통 튀는 여건부

   만화영화는 매주 연속극으로 방영했기 때문에 집에 텔레비전이 없으면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물론 <새소년>, <어깨동무>, <소년중앙> 등 여러 종류의 어린이 월간잡지가 앞 다투어 지면(紙面)만화를 연재했으나, 만화영화의 실감을 따라잡기는 어려웠다. 우리 집은 물론이고 당시 텔레비전이 있는 집이 동네에서 손을 꼽았다. 가끔 텔레비전 있는 친구 집에 갈 때에나 띄엄띄엄 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레슬링은 달랐다. 1년에 한두 번 대회로 치르면서 이걸 생중계하기 때문에, 텔레비전 있는 집 애하고 일찌감치 섭외만 잘해두면 레슬링 경기를 고스란히 다 볼 수 있었다. 텔레비전이 없는 집 애들은 당연 만화영화보다는 레슬링 경기 보는 것에 우선을 두고 정성을 들였다.     


   레슬링 하면, 무조건 김일이다. 인자한 인상의 얼굴에 머리를 박박 밀고 나온다. 체격도 외국 선수에 밀리지 않고 당당하다. 무엇보다 매너가 짱이다. 점잖다. 경기 초반부터 저 몸집에 가능한가 싶을 정도의 경쾌하고 민첩한 몸놀림으로 스마트한 공격기술을 써서 승기를 잡아간다. 그 순간 위기에 몰린 상대편 선수가(태그매치에서는 둘이 함께) 야비한 반칙에 쓰면서 전세는 순식간에 역전된다. 김일은 밀리고 밀리다가 안쓰러울 정도로 무참하게 당하고 만다. 링 밖으로 끌려 내려와, 경기 시작과 끝에 땡 쳐서 알리는 둥그렇게 생긴 종으로 얻어맞기도 한다. 심지어는 기고만장한 상대 선수가 관중석에 뛰어들어 관객들이 앉는 철제로 된 접이의자를 뺏어 쳐들고는 김일 선수의 머리를 내려찍는 바람에 얼굴 전체에 피가 흘러내린다. 김일 선수는 그야말로 유혈이 낭자한 채 앞을 분간하지도 못하고 비틀거린다. 사람들은 ‘이제 끝이구나!’ 안타까운 탄식을 쏟아낸다.

   바로 이때 김일은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아마도 손에 땀을 쥐고 응원하는 온 국민의 염원이 전달되지 않고서야 이럴 수 없다는 확신이 들 만큼,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단번에 전세를 뒤집는다. 궁지에 몰리다가 막다른 순간에 윗저고리가 찢어지며 그 속에서 우람한 근육들이 뿔럭뿔럭 솟구쳐 올라오면서 엄청난 거구의 괴물이 되어 어마어마한 괴력으로 무자비하게 적을 무찌르는 헐크와 다름없었다. 피가 범벅이 된 상태에서도 단번에 링에 뛰어 올라가 드롭킥을 두어 번 날려 적의 기세를 죽인 후, 보디슬램 두 번으로 기동력을 현저히 저하시킨다.

   그럼 적은 반드시 다시 반칙을 들고 나온다. 치솟던 응원의 열기는 순식간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 다시 위기에 몰리면 어쩌나 텔레비전 앞에서 안타까워하는 온 국민들은 몸에 힘을 잔뜩 주고는, “안 되는데, 안 되는데” 신음하듯 외친다.  김일 선수는 연속된 반칙공격에 잠시 멈칫하다가는, 곧바로 똑같은 반칙으로 되받아쳐 즉시 무력화에 나선다. 적의 반칙 도발에 순진하고 무력하게 당하고 무너져버리지 않고, 보란 듯이 오히려 반칙으로 응수하여 적의 도발을 단번에 제압해버린다. 텔레비전 앞에 모여든 전국의 국민들은 몰려오는 안도감과 통쾌함을 일제히 환호로 터뜨린다. 띄엄띄엄 텔레비전이 있는 집을 중심으로 터져 나오는 환호성으로 동네가 들썩거린다. 

   이제 더 이상 멈춤은 없다. 반칙 도발이 무위로 끝나고 당황한 상대 선수가 혼비백산하여 허둥댈 때, 드디어 김일의 ‘박치기’가 나온다. 왼팔을 뻗어 적의 머리통을 한 손으로 눌러 잡고는 왼발을 번쩍 드는 동시에 몸은 오른쪽으로 한껏 젖혀서 탄력을 극대화시킨 후, 머리통을 잡은 왼손을 잡아당기며 박치기! 허둥대는 적의 머리통을 다시 한 번 잡아서 또, 박치기!! 적은 전의를 상실하고 링 코너로 도망을 가려고 몸을 돌린다. 김일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순식간에 적의 몸에 한 발을 걸쳐 꼼짝 못하게 하고는, 허리를 비틀어 항복을 재촉한다. 거대한 코브라에 포획되어 온몸이 휘감긴 채 죽음을 기다리는 형세로, 정신이 다 빠져나간 상대 선수는 그저 몸을 떨어대기만 한다. 그러다가는 심판이 항복의 의사를 묻기도 전에 다급하게 항복을 외친다. 그때서야 김일은 상대를 풀어주고 풀려난 선수는 그 자리에 쓰러진다. 김일 선수의 머리에서는 여전히 피가 나는지 얼굴을 뒤덮은 유혈은 어깨와 가슴까지 흘러 낭자하다.


   그냥 한 편의 드라마였다. 그것도 국민 드라마였다. 김일 선수가 나오는 매 경기마다 반복되는 그래서 과정과 결말을 뻔히 알면서도, 손에 땀을 쥐며 탄성과 환호성을 번갈아 질러대며 경기를 지켜봤다. 마지막 승부를 결정지은 코브라 트위스트는 신기술이었고, 김일 선수의 트레이드마크 기술이 되었다. 경기가 끝나고 며칠이 지나도 여진처럼 동네에서는 김일 선수의 드라마가 회자되고, 골목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애들이 이 기술이 연마하느라 둘씩 붙어서 비명을 질러댄다. 

   코브라 트위스트 기술을 조금 자세히 보자면, 우선 상대를 뒤에서 끌어안듯이 잡고, 왼발을 들어 상대의 왼발 허벅지에 걸쳐서 조이고, 오른팔을 상대의 얼굴 쪽으로 가져가 겨드랑이로 상대 턱을 오른 쪽으로 휘감아 누른다. 상대선수는 허리가 뒤로 꺾여서 심판이 원, 투, 쓰리 셋을 셀 동안에도 꼼짝을 하지 못하고 버둥대다가 심판의 승리선언이 떨어지고 기술이 풀리면, 그 자리에서 풀썩 주저앉고 만다. 코치들이 놀라서 달려 나와 부축해 나갈 때까지 일어서질 못한다.     

   김일 외에도 드롭킥이 장끼인 장영철, 당수가 특기였던 천규덕 선수가 있었지만 절대 빠트릴 수 없는 선수가 있었는데, 바로 제일교포 여건부 선수다. 레슬러 치고는 매우 단신이었지만 무척 다부졌다. 그는 링 안에서 통통 튀듯 빠르게 뛰어다니며 상대를 괴롭힌다. 마치 미련한 살찐 고양이를 괴롭히다가 결국 무너지게 만드는 제리와 같은 선수였다. 특히 미사일처럼 상대 선수를 향해 몸을 날려 머리를 돌진시켜 상대 몸통을 가격하는 인간 미사일 기술을 쓰면 그야말로 난리가 난다. 게다가 그는 코믹하고, 쇼맨십이 강해서 애들한테 인기 만점이었다. 언젠가 내가 리서치회사에 근무할 때 제일기획의 부장으로부터, 현대자동차가 출시한 그랜저 승용차의 광고 콘셉트가 바로 여건부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럴 듯했다. 

   외국 선수로는 뚱뚱한 거구의 압둘라 부처, 발이 엄청 커서 킥이 위협적이었던 자이언트 바바 등이 있었고, 무엇보다 일본의 안토니오 이노끼를 뺄 수 없다. 그는 일본의 대표선수로 김일 선수의 숙적이기 때문이다. 이노끼와 김일의 맞대결은 그야말로 빅 매치다. 지금의 한일전 축구보다 더 하면 더 했지 결코 질 수 없는 경기였다. 그는 키도 훤칠하고 체격도 당당하다. 무엇보다 특이한 얼굴 외모로 더욱 인상적인데, 턱을 위시해서 주변의 하관이 유난히 발달한 상이었다.

   요즘 격투기가 당시의 프로 레슬링에서 시작된 것일 텐데, 바로 이노끼가 세기의 프로 권투선수 무하마드 알리와 벌인 이종격투기 경기가 아마도 전환기에 있었던 대표적인 경기였을 거다. 하지만 당시에는 피해 다니는 이노끼를 한 대도 못 맞추고 허공에 빈주먹만 던지던 알리와, 오로지 알리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려고 경기 내내 거의 누워만 있었던 이노끼로 기억되는 진짜로 재미없는 경기였다. 


#미아리의추억 #박치기 # 코브라트위스트 #프로레슬링 #김일 #여건부 #이노끼 

류해윤_황소싸움_종이에 아크릴릭_50×113cm_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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