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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창복 Mar 04. 2022

할아버지의 서울 나들이

   엄마 아버지의 서울살이가 그런대로 자리를 잡아가자, 시골에 계신 할아버지가 일 년에 한두 차례는 미아리에 다니러 오셨다. 풀을 잘 먹인 하얀 바지저고리에 두루마기를 걸치고 기다란 곰방대를 한손에 쥐고 “에헴!” 하시면서 거침없이 가게에 들어서신다. 특별한 일이 있어서는 아니고 봄가을로 오셔서 며칠 지내다 가셨다. 

   계시는 내내 별 말씀을 하시지도 않는다. 가끔 마실 삼아 시장을 한 바퀴 돌다 오시고, 매년 오시면서 친해둔 친구 분과 한잔 하다 오시기도 했다. 집에서도 엄마 아버지는 물론이고 손주들과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자분자분 하시거나 한 기억도 거의 없다. 잘 웃는 법도 없고 그렇다고 근엄하다거나 권위적이라거나 한 분도 아니었다. 그저 필요한 말만 단문 형식의 짧은 문장으로 툭툭 내던지듯 하시는 무뚝뚝한 분이었다. 

   무뚝뚝하기로야 아버지가 덜 할 것도 없었으니, 할아버지가 오셨다 해서 평소와 크게 다를 것 없는데 엄마는 그럴 수 없어 마음이 바빠진다. 그렇다고 하루하루 바쁘게 돌아가는 세탁소 살림에서 특별히 할아버지를 챙기고 대접할 겨를도 없다. 몸은 가게 재봉틀에 붙어있지만 온 신경은 방안에 앉아계신 시아버지에 쏠려있어, 더더욱 마음만 부산하고 공연히 쩔쩔매고 있었을 거다.      

   그러다보니 엄마는 할아버지에 대한 공경의 마음과 정성을 오로지 밥때에 집중하는 것 같았다. 일단 할아버지 밥상은 따로 차린다. 상이라고 해봐야 대여섯 식구가 우글거리는 단칸방에서 특별할 리 없고, 그저 조그만 소반이다. 너무 작고 소박하다 못해 앙증맞기 조차한데 할아버지의 위상에 비하면 좀 우스꽝스럽기도 했다. 누군가가 겸상하기도 비좁은 상이었다. 그렇지만 그 상 위에 올라가는 것들은 특별했다. 일단 하얀 쌀밥이다. 

1년 365일 매 끼니, 그때는 누구라도 보리밥에 쌀이 조금 섞인 밥을 먹었다. 가끔은 보리를 조금 빼내고 그 자리에 콩이나 좁쌀이 들어가 있는 게 고작이었는데, 티끌 하나 없는 하얀 쌀밥이라니 명절 차례 상이 아니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는 쌀이 귀해서 나라에서도 혼분식 장려운동을 벌이던 시절이었다. 베이비붐으로 인구는 폭발적으로 늘었지만 농업 생산력이 미처 받치지 못하자 쌀 소비를 억제하느라 잡곡을 섞고, 미국 원조로 들여온 옥수수나 밀가루를 이용한 분식을 강제하였다. 학교에 싸가는 도시락도 선생님이 일일이 뚜껑을 열고 잡곡비율을 검사했다. 어쩌다 흰쌀밥 도시락을 싸 가면 큰 죄인 취급을 받았다. 식당에서도 일주일 중에 하루는 밥 대신 국수나 수제비를 팔아야만 했다. 쌀로 술을 빚는 것도 금지되고, 그러자 고구마로 술을 빚거나 희석식 소주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박정희 정부가 토지를 개간하고 간척지사업을 벌이고 신품종 개량과 농법개선을 서둘렀지만, 그렇다고 금방 소출이 늘어 식량사정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내가 국민학교에 들 무렵부터 시작된 혼분식 장려운동이 고등학교에 들어갈 즈음인 70년대 중후반 경에 통일벼 품종이 보급되면서 비로소 해제되었으니까, 근 10여년을 끌어온 정책이었다.  


   할아버지를 위한 하얀 쌀밥은 작은 냄비에 따로 짓는다. 장정들에게나 해당될만한 커다란 스텐 밥그릇에 고봉(高捧)으로 가득 담아서, 눌릴 새라 뚜껑을 살짝 덮어서 소반 상에 올린다. 작은형은 할아버지가 밥을 남길 것을 대비해서 아니 학수고대하는 입장이라, 밥 먹는 게 건성이고 오로지 할아버지 밥그릇에 쌀밥이 축나는 속도에 온 신경이 가있다. 할아버지는 그걸 아시는지 입맛이 없으신지 항상 밥을 남기셨다.

   “밥을 마이 남기싰네요. 우째 찬이 입맛에 안 맞으십니꺼?”

   “아이다. 개안타, 마이 묵으따.”

   할아버지가 숟가락을 놓자마자 작은형이 달려들어 밥그릇 채 들고 가서 싹싹 긁어먹었다. 고봉밥이란 원래 옛날 양반들이 그릇 위에 수북하게 밥을 담아 올린 밥을 다 먹지 않고 수북한 부분만 먹고 남기는 것을 미덕으로 쳤다. 그렇게 해서 남은 밥을 머슴들이 먹을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봉밥을 머슴밥이라고도 했단다. 그래도 할아버지가 부농 축에 들지는 못해도 중농 정도는 되는 양반집 장손이라, 이런 습성이 몸에 배어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때마다 난 작은형이 좀 궁상맞아 보였다. 나야 항상 할아버지와 겸상이었기 때문이다. 소반이 방에 놓이면 으레 내가 먼저 착 달라붙어 앉는다. 

   “상도 좁은데, 이리 안 나오나?”

   “개안타, 내또라.” 

   엄마가 버릇없다고 뭐라 타박을 하지만, 할아버지가 괜찮다고 하면 엄마는 아무 말도 못한다. 이렇게 내가 다소 여유로운 입장에 있다 보니 작은 형이 더 처량하게 보였는지도 모른다. 작은형도 나와 나이차가 많이 나서 그런가, 그런 나를 미워하거나 억울해하지 않았다.

   할아버지 밥그릇을 고봉으로 다 채우고 나서, 냄비 바닥에 남은 밥들을 싹싹 긁어 내 밥그릇에 담아준다. 귀한 쌀밥이 누릉지로 낭비되지 않도록 엄마는 뜸에도 신중을 기하기 때문에 누릉지도 거의 안 나와 내 밥그릇도 얼추 쌀밥으로 채워진다. 좀 부족하다싶으면 할아버지는 말없이 봉우리를 좀 헐어서 내 밥그릇을 마저 채워주었다. 그럼 난 입이 벌어진 채 엄마와 작은 형을 번갈아 쳐다보며 세상을 다 얻은 양 의기양양했다. 입안에서 동글동글 미끄러지는 보리밥 먹다가 쌀밥 먹으면 그렇게 보실보실 부드럽고 찰질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 덕에 부리는 호사가 또 있었다. 소고기국이다. 할아버지가 오시면 엄마는 항상 소고기국을 끓인다. 엄마는 밥을 앉혀놓고 나서 나를 불러 지시를 한다.

   “소고기 반근, 국거리로 달라 그래라”

   지시가 떨어지자마자 나는 쏜살처럼 시장으로 내려간다. 가슴까지 올라오는 앞치마를 입은 고깃간 아저씨는 눈으로 주변을 잠시 뒤지다가 포기하고는, 길고 호리호리한 것이 휘어있어서 좀 무서워 보이는 칼을 집어 들고 돌아선다. 등 뒤에는 군데군데 시퍼런 도장이 찍힌 채 대가리와 사지가 잘려나간 소 한 마리가 뻘건 속살을 드러내 보인 채 공중에 매달려 있다. 칼로 한 덩어리 쓱 베어내 따로 도마랄 것도 없는 앞에 던져놓는다. 귀퉁이 일부를 잘라 저울에 달아보더니 좀 넘치는지 그만큼 덜어 내려다가는 멈칫하더니 썰어줄까 묻는다. 네, 하자, 자잘하게 썰어주는데, 칼의 크기나 위용에 비해 써는 고기가 너무 보잘 것 없어서 참 안 어울린다 싶었다. 그나마도 칼질 몇 번 만에 공기돌 만한 고기조각들로 되는데, 한줌도 안 되는 그것들을 썰던 칼로 쓸어 담아 신문지에 올려 싸준다. 

   밥물이 끓으면 엄마는 가게 연탄화덕으로 냄비를 옮겨 뜸을 들이고, 밥이 끓던 석유곤로 위에는 국 냄비를 얹어 내가 내민 신문지에서 고기조각들을 털어 넣는다. 참기름 두어 방울 떨어뜨려 조금 볶다가 물을 치익 붓고 나박나박 썰어놓은 무를 넣고 끓인다. 건더기의 9할은 무고, 소고기 조각은 어쩌다 가끔 걸려드는 정도지만 씹을 때의 단맛이 참 좋았다. 그래도 국그릇 가장자리에 기름기가 제법 자글자글 모여 있는 것이 과연 소고기국이구나, 흐뭇했다. 


   소고기국은 덩달아 식구들이 다 같이 먹지만, 할아버지 소반 위에만 놓이는 특별반찬이 있다. 김구이다. 가운데 반이 접힌 김밥용 김 말고, 그보다 좀 넓은 구이용 김에 참기름을 얇게 골고루 발라 소금을 툴툴 뿌린 다음 석쇠에 두 장씩 넣고 겹쳐 닫은 다음, 가게 연탄화덕 불에 굽는다. 석유곤로에 굽다가는 날름거리는 불길에 김을 태워먹기 일쑤인데다, 골고루 은근하게 구워야하기 때문이다. 너무 많이 구워지면 누렇게 색이 바래고 푸석거리며 쉽게 부서져서 김다운 식감을 잃게 된다. 

   다 구워져 반질거리는 김을 10등분해서 작은 접시에 담고 이쑤시개로 콕 집어서 무너지지 않게 고정해서 소반 상에 올린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김을 드실 때 결코 손으로 집지 않는다. 수저로 밥을 뜬 다음 숟가락을 그대로 김 더미 위로 가져가 턱 올려, 누르는 듯 마는 듯하다가 들어 올리면 김 한 장이 착 달라붙어 딸려 올라간다. 그럼 할아버지는 김이 붙은 채 숟가락을 가져가 입에 넣는다. 김을 별도로 오므리거나하지 않아도 입에 잘 들어가는 게 신기했다. 김이 할아버지 입에 걸리지 말라고 엄마는 김을 10등분 하나보다 생각했다.

   계란 후라이 역시 특식이라 할아버지 상에만 올라간다. 그리고 꼭 빠지지 않은 반찬이 생선인데, 엄마는 어른 상에 비린 찬이 빠지면 안 된다고 했다. 가장 많이 오르는 생선이 갈치구이였다. 좀 커서는 삼치구이도 올라왔다. 꽁치는 구이로도 먹지만 주로 조림으로 해서 먹었다. 당시에는 이런 생선들이 그래도 귀한 정도는 아니었나보다. 때때로 먹었던 기억이다. (‘고기’ 하면 난 생선으로 알아들었다. 지금이야 육고기가 흔했지만 당시에는 귀했던 탓이다. 대학생이 되어서야 돼지갈비니 삼겹살이니 하면서 갑자기 육고기를 많이 먹게 되었지, 그 전에는 생선이 주된 육식이었다.)     


#미아리의추억 #할아버지 #소고깃국 #김구이 #혼분식장려 #고봉밥

류해윤_當六十四歲 戊寅孟冬_50.8×41cm_헝겊에 네임펜, 붓펜과 볼펜_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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