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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창복 Apr 05. 2022

홍갑표 선생님과 탈춤

그렇다고 중학생 시절, 못된 기억만 남아있는 것은 아니다. 홍갑표, 이 분은 중학교 국사 선생님이다. 오른손 검지 손가락의 두 마디가 없다. 이유는 모른다. 아마도 군대를 가기 싫어 손가락을 잘랐나? 청소년 시절 공장 다니다가 사고로 잃었나? 궁금했지만, 둘 다 좋은 일이 아니라 더 생각하려고 하지 않았다. 홍갑표 선생님을 무척 좋아했기 때문이다. 수더분하니 일단 인상이 좋았다. 그냥 동네 아저씨 같았다. 푸석한 머리칼에 항상 잘 웃으셨다. 무엇보다 공부, 공부 하지 않고, 성적 따위를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서 여유롭고 푸근했다. 수업시간에는 교과서 진도를 처지지 않게 하면서도, 야사(野史) 이야기를 종종 잘 들려주셨다. 지금 돌아보면 이 분은 약간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분이지 않았나 싶다. 항시 농민, 노동자 등 약자에 대한 연민을 잘 표현했고, 약자들이 역사 속에서 위대했었음을 늘 강조했던 기억이다. 


동학농민운동 대목을 다루던 때였다. 수업을 하다 말고 갑자기 다리 하나를 쳐들더니 두 팔을 머리 위로 들어서 왼쪽으로 치우치도록 하고는 너울거리는 모습을 취했다. 그 상태에서 고개를 반쯤 숙인 채 멈추고 서서는, 눈을 치뜨고 우리를 바라보았다. 우리들은 선생님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하면서도, 낯선 그 동작의 요상함에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다. 그러자 선생님은 “이 동작이 웃겨 보이지?” “그런데, 아니다. 이건 무척 중요한 민중의 동작이란다.” 밑도 끝도 없는 말을 하신다. 우리는 여전히 키득대며 납득하지 못하자, 그제 서야 선생님은 동작을 풀고 설명을 하신다.


“이건 탈춤의 한 동작이란다. ‘외사위’ 동작이라고 하지. 당시 농민들은 춤으로 양반을 풍자하고, 춤을 함께 추며 협력과 연대를 다졌다.” 뭐 이런 취지의 이야기를 하셨다. 말씀의 내용은 거의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 요상한 동작만큼은 내 뇌리에 아주 선명하게 박혔나 보다.      


1980년 5월 어느 봄날에 학교 체육관에서는 작은 축제가 열렸다. 신입생을 위한 서클 설명회가 개최되었다. 각 서클들이 신입생 유치를 위해 주요 활동과 가입 안내를 했다. 예술 활동을 하는 서클은 공연을 준비해서 펼쳤다. 말로 하는 안내 설명은 귀에 잘 들어올 리 없고, 공연들은 축제처럼 신이 났다.


오후 늦게 시작된 행사는 중반에 이르자 주변에 땅거미가 내려앉고 사방이 점차 어둑해지고 있었다. 갑자기 요란한 꽹과리 소리가 앞장서더니 장구와 북들을 둘러맨  이십여 명이 일제히 악기를 치며 체육관을 점령하듯 장악했다. 경쾌한 꽹과리의 자리러 지는 소리를 가슴을 치는 북소리가 받치고, 그 사이를 섬세한 장고의 잔가락이 메운다. 가끔 부와아~앙 퍼져나가는 징 소리가 체육관 전체를 정화하기라도 하는 듯 정기적으로 환기시켰다. 


왁자한데 조직적인 풍물패의 기세와 짜임새에 다들 놀라고 신기해하고 있는데, 어느새 소고잽이들을 꼬리 삼아 모조리 빠져나가고 없다. 순간 마당판이 텅 비는가 싶더니만 이번에는 십여 개의 횃불들이 줄지어 들어와 체육관 한복판에 자리를 잡고 둥그렇게 판을 짠다. 그러자 체육관 벤치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체육관 바닥으로 우르르 몰려 내려오더니 횃불을 따라 둥그렇게 둘러앉는다. 두루마기를 걸쳐 입고 굵은 안경을 썼는데, 순간 김구 선생을 떠오르게 하는 점잖아 보이는 남자가 어느새 걸어 들어와 둥근 마당판 한 켠에 끼어 자리를 잡는다. 가부좌를 틀고 제 자리를 잡는가 싶더니, 들고 있던 꽹과리를 땅땅 치기 시작한다. 옆에 앉은 장고도 잔가락을 얹는다.


장단이 몇 번 반복되자 울긋불긋한 옷을 입고 시뻘건 탈을 쓴 괴물 같은 것이 둘러앉아있는 사람들을 거칠게 밀치듯 밀고 들어와 마당판 안으로 불쑥 뛰어들어서는 둘러앉은 관객들을 향해 “아~ 쉬이~”하며 냅다 소리를 지른다. 연속 세 번을 지르는데 관중들도 따라서 “쉬이~” 하자 좌중은 일순 조용해진다. 이렇게 순식간에 주목을 끈 다음, 괴물은 고함을 지르듯이 뭐라 뭐라 재담을 했다. 소란스러운 체육관의 울림에 잘 듣지는 못했지만, 주변에 앉은 관객들이 “옳소~” “그러게~” 하며 대거리를 하는데 당시의 정치상황을 풍자하는 내용 같았다. 


재담을 마치고는 펄쩍펄쩍 뛰며 춤을 추기 시작하는데, 솟구쳐 오르다 주저앉고 웅크리다 펼쳐내는 동작 하나하나가 그렇게 용맹스럽고 기운이 넘칠 수가 없었다. 마당을 두루두루 다 밟으며 관중들의 “얼쑤! 얼쑤!” 추임새를 끌어내며 한바탕 흐드러지게 춤을 춘다. 그러다가 지치는지 동작이 느려지고 제자리를 맴돌 무렵, 비슷한 듯 다른 탈을 뒤집어쓴 또 다른 놈이 마당판 안으로 뛰어들어서는 지쳐서 비실내는 놈을 뒤에서 냅다 후려쳐 쫓아내고는 재담을 하고 또 춤을 한바탕 그렇게 신바람 나게 춘다. 이렇게 예닐곱 명이 릴레이 식으로 앞의 놈을 내쫓고 들어와 춤을 추고 나서 또 쫓겨나가고 했다. 


횃불이 시커먼 그을음을 뱉어내며 일렁일 때마다 내 가슴이 뜨겁게 일렁였다. 땅, 땅, 따, 당, 장단을 치는 꽹과리는 마치 내 마음을 벼리는 대장간의 망치소리와도 같았다. 체육관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모든 것이 그 자체로 완벽한 한바탕의 소동처럼 충격이었다. “역시 대학이 다르네” 난 내가 비로소 대학생이 되었다는 뿌듯한 자부심이 가슴에 차올랐다. 바로 그 순간 “아, 이게 바로?” 탄성이 나왔다. 바로 중 2 때 홍갑표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구부정하고 어정쩡한 동작으로 보여준 바로 그 동작 이 지금 펼쳐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것이다. 묘한 설렘과 격한 흥분이 올라왔다.


난 그 후 며칠 지나지 않아 대강당을 찾아가 연세탈춤반 서클 가입 원서를 썼다. 당시 나는 학교에 입학한 지 3개월이 되도록 나의 학과에 재미를 붙이지 못하고, 재수를 할 수밖에 없다고 마음을 다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옥 같은 입시 준비를 또 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도 끔찍해 엄두가 나지 않아 갈팡질팡 하고 있었다. 드디어 나는 학교를 계속 다닐 이유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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