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창복 Oct 10. 2022

딱지

   그 시절 진짜 많이 놀았다. 추워도 추울 새가 없었고, 더워도 더운 줄 모르고 놀았다. 놀아도 놀아도 더 놀고 싶었다, 항상 부족했고 고팠다. 학교가 끝나면 잽싸게 집에 와서 가방만 던져놓고는 바로 놀러 나갔다. 놀거리는 무진장이었다. 그래도 언제나 최고의 놀이는 딱지와 구슬이었다. 특히 남자아이들한테는 필수과목으로 누구나 하는 가장 기본적인 놀이였다.

   어느 날 작은형이 골목을 은퇴하면서 내가 놀이판의 중추로 등장했다. 중학생이 되면 머리 깎고 제복 입으면서 그 외관이 확연하게 달라지는 것은 물론이고, 갑자기 어른이라도 된 듯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같이 엉켜 놀았던 애들을 멀리했다. 작은형도 중학생이 되자마자 여전히 골목에서 뒹구는 조무래기들과 슬슬 거리를 두더니만, 겨울방학이 되면서부터는 아예 내외하듯 멀어졌다.

   나는 국민학교 3학년이 되었고, 골목에서 어엿한 중견에 해당하는 10대 문턱을 넘어섰다. 골목에서는 요 나이 때 애들이 제일 활발했다. 하지만 나는 든든하고 안전했던 형의 그늘에서 벗어나 홀로서기를 해야 했다.

   “형, 옥상에 있는 딱지랑 구슬, 어떡할 거야?”

   “어? 그거 ……, 니 맘대로 해.”

   나에게는 어마어마한 유산이 생겼다. 옥상 장독에 가득 찬 딱지와 구슬이 모조리 나의 소유로 넘어온 것이다. 어마어마한 재물을 가진 골목갑부가 된 거나 다름없었으니, 내가 골목의 패권을 차지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딱지라 해도 접는 딱지와 동그란 문방구 딱지가 다르고, 노는 방식은 더더욱 다르다. 우선 접는 딱지는 두 개의 종이를 교차하여 접어서 정사각형의 모양으로 만든다. 다 접으면 앞쪽은 대각선으로 X자 선이 드러나는 방석 모양이 되서, 방석딱지라고 불렀다. 상대의 딱지를 딱지로 내려쳐서 뒤집으면 따먹는 거다. 그런데 뒤집는 방법이 몇 가지 있다. 가장 기본적인 기술이 ‘배치기’다. 상대 딱지의 중앙을 향해 포개듯이 힘껏 내려치면, 그 힘의 반동으로 들썩하다가 뒤집히면 따는 것이고, 들썩이다 말고 그냥 내려앉으면 실패다. 그래서 온 힘을 모아 세게 내리쳐야 한다. 힘은 꽤 들지만, 정공법인 셈이다.

   두 번째는 ‘바람치기’인데, 상대 딱지는 건드리지 않고 상대 딱지의 바로 옆자리 바닥에 내 딱지를 붙이듯이 힘껏 내려친다. 그러면 거기서 일어나는 바람으로 상대 딱지를 뒤집는 기술이다. 이 기술 역시 바람의 세기가 커야 뒤집을 수 있으니 마찬가지로 힘이 든다. 상대의 딱지가 경량급이고 내 딱지 중량이 좀 나갈 때 효과적인 기술이다. 끝으로는 옆을 쳐서 넘기는 ‘똑딱이’ 기술인데, 상대 딱지가 땅바닥에 납작 붙어있질 못하고 가장자리가 들떠 있는 경우, 들뜬 그 부분을 톡 내려치면 홀라당 뒤집힌다. 그러나 공중제비를 돌다가 한 바퀴 더 돌아 앞뒤가 뒤집히지 않고 그대로면 소용없다.

   딱지를 접는 종이의 재질도 중요하다. 신문지는 쉽게 구할 수 있어 실탄이 급히 필요할 땐 요긴하지만, 강도와 탄력이 약하기도 하고 일단 딱지로 잘 안 쳐준다. 뭐니 뭐니 해도 달력 종이가 최고다. 빳빳하고 잘 접힌다. 그런데 달이 차야 그달의 달력지를  뜯어낼 수 있으니, 재료의 공급이 달리는 문제가 있다. 그 외에도 골판지로 된 종이상자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두껍고 뻣뻣해서 접기가 만만치 않지만, 힘이 좋아 배치기에는 제격이다. 하지만 재질 상 바닥에 납작 엎드려있는 게 여의찮아, 거꾸로 배치기 당하기도 쉽다.

   기본은 일단 힘껏 후려쳐야 하는 거라 힘도 많이 들지만 놀이가 단조롭다. 딱, 딱, 치는 소리도 커서 골목이 시끄럽기도 했다. 종이 재료를 구하는 일도 쉽지 않거니와, 덩치가 커서 어디 보관하기도 간편하지 않았다. 엄마가 방바닥에 그냥 널브러진 딱지를 보면 대번에 아궁이 넣거나 버려버리기 일쑤였다. 아주 어린 애들이거나, 진짜 ‘가진’ 게 너무 없어서 이거라도 하고 노는 경우 말고는 접는 딱지로 딱딱거리고 놀지 않았다.     


   애들이 진짜 잘 가지고 노는 딱지는 ‘문방구 딱지’였다. 일단 가볍고, 지름 3~4cm 동그란 모양으로 애들 손아귀에도 쏙 들어와 잘 잡히는 크기다. 딱지마다 제각각 다른 그림들이 다양하게 인쇄되어있지만, 딱지 세트별로 각기 테마가 있어서 나름대로 통일성이 있는 그림들로 구성된다. 딱지에 그려진 그림보다 딱지마다 표시된 계급이 중요하다. 보통 작대기 하나에서 별 다섯 개까지 군인의 계급이 골고루 들어있다. 계급의 높낮이로 승부를 정하기 때문에 중요하다. B4 크기의 큰 종이판에 동그란 딱지가 촘촘하게 반복 인쇄되어 있고, 동그란 테두리에는 미리 도무송(tomson) 칼집이 나 있어서 살짝만 뜯어도 잘 떨어진다. 보통 원판 한 장에 딱지가 50여 장 넘게 나온다.

   문방구 딱지로는 주로 ‘물쭈’라는 놀이를 했다. 물주(物主)라는 뜻일 거다. 실제 호스트 역할을 하는 애를 물쭈라고 불러준다. 내가 가진 딱지가 워낙 많다는 사실은 애들도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에게 물쭈를 많이 맡기곤 했다. 물쭈를 잡으면 동그란 딱지 수십 장을 화투 치듯이 탁탁 쳐서 섞은 다음, 사람 수만큼 무더기를 갈라서 그림이 안 보이도록 바닥에 엎어놓는다. 애들은 무더기 중에서 하나를 골라잡고, 그 앞에 자기 딱지를 툭 떼서 놓는다. 그럼 바로 뒤집어서 누구 계급이 높은지를 확인해서 승부를 낸다. 게임의 묘기를 위해 ‘5번째’ 조건을 정하면, 뒤집은 후 나오는 딱지를 포함해서 다섯 장을 넘기고 나면 나오는 딱지의 계급으로 승부를 겨룬다. 나름 ‘쪼는’ 맛이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계급이 왕창 인플레 되면서 작대기(이병, 일병, 상병)와 깔때기(병장, 하사, 중사, 상사), 밥풀떼기(소위, 중위, 대위)와 무궁화(소령, 중령, 대령) 계급이 사라지고 오로지 별만 잔뜩 그려진 딱지가 판을 쳤다. 별 하나짜리부터 두 개 세 개, 심지어 딱지의 둥근 가장자리를 따라 다 그려져 있어 스무 개가 넘기도 했다. 딱지에서 은퇴한 중학생들은 한결같이 작대기, 깔때기 시절만 못하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작대기, 깔때기, 밥풀때기, 무궁화, 별, 한눈에 봐도 모양만으로 바로 서열이 확인되던 계급에 비해, 별이 열 개가 넘어가면 일일이 세야 확인할 수 있으니 불편하기 이를 데 없었다. 또 별 개수를 가지고 맞다, 틀렸다 하면서 세고 또 세며, 분쟁도 비일비재했다. 그보다는 계급의 다양성과 낭만이 없어져서 재미가 없었다.     


   그 밖에도 시시해서 애들은 잘 안 했지만, 주로 어린애들이 자기들끼리 하는 딱지 종목이 몇 있었다. 담벼락에서 딱지를 차례로 한 장씩 떨어뜨려 미리 떨어져 있는 딱지를 덮거나 닿기만 해도 따는 놀이도 있었고, 상대 딱지를 오므린 손바닥으로 덮었다가 들면서 생긴 진공의 압력으로 뒤집어서 따먹는 놀이도 있었다.

   동그란 문방구 딱지 한 장을 엄지와 검지 집은 채 나머지 손의 새끼손가락으로

 딱지를 둥글게 감싸듯 감은 다음, 딱지를 돌리면서 밀어내면 동그란 딱지가 제법 멀리 날아간다. 멀리 날려 보내는 사람이 이기는 것인데, 잘 날아가다가도 바람을 타고 다시 되돌아와 실망하게 하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먹고 먹히고 따고 잃고 하는 긴박한 놀이 말고도, 이렇게 소박하고 평화롭게 함께 노는 딱지놀이도 많았다. 


#미아리의추억 #딱지 #물쭈 #골목갑부

류장복_물주놀이_oil on linen_60.6x72.7cm_2022


작가의 이전글 애틋한 이영애 선생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