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창복 Feb 01. 2023

새비젓 할머니

   80세가 넘도록 장수하신 외할머니도 할아버지만큼은 아니지만, 두서너 해마다 한 번꼴로 미아리 집에 오셨다. 외할머니는 날씬한 몸매에 얼굴도 조그만데, 참 명랑하고 아쌀한 할머니였다. 성격은 급한 편인데 의견이 분명하고 단호했다.

   할머니는 담배를 좋아했는데, 할아버지처럼 곰방대에 담뱃가루를 밀어 넣어 피우지 않고 <백조>나 <금잔디> 같은 입담배를 즐겨 피웠다. 거즈로 된 보드라운 손수건에 담뱃갑을 잘 싸서 치마 속 괴춤에 넣어두었다가, 궁금하면 수시로 치마 속을 뒤져 한 개비씩 꺼내 피웠다. 할아버지도 언제부턴가는 곰방대가 귀찮으셨는지 입담배로 바꾸셨다.

   그런데 할머니 담배 피우는 폼이 참 웃겼다. 특히 할아버지가 피울 때와는 아주 달랐다. 할아버지는 아버지도 마찬가지지만, 검지와 장지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운 채 손바닥을 입으로 가져가 담배 끝을 물고 피웠다. 그런데 할머니는 담배를 손가락에 끼우지 않고 엄지와 검지로 집는다. 마치 벌레를 집듯이 하얀 담배 한 개비를 집어 그대로 입으로 가져가 물어 피운다. 동네 형들 두셋이 모여 골목에서 몰래 돌려가며 담배 피울 때 그 모양과 아주 비슷했다. 게다가 할머니는 평소 앉을 때 다리 하나를 바닥에 눕히고 하나는 세워서 가슴에 딱 밀착시키거나 팔로 끌어안는다. 안 그래도 살집이 없고 날씬한 양반이라서 앉으면 아담한 자태가 나왔다. 그 자세로 아까처럼 담배를 집어 피우며 담배 연기가 매운지 눈을 가늘게 찌푸리면서 담배 맛을 음미하는 표정이 웃긴 거 같으면서도 그렇게 인상적일 수가 없었다.

   엄마는 할머니가 오시면 제일 먼저 앞집 슈퍼에서 최고급 <신탄진> 담배를 한 보루 사다 드렸다.

   “태워 없애는 거 아무 끼나 피마 되지. 이런 걸 말라 사노, 돈이 썩었다.”

   할머니는 말은 그렇게 하시지만, 받아서 한 갑만 꺼내 치마 속 괴춤에 찔러두고 나머지는 가방에 넣어두었다. 엄마는 할아버지가 오셔도 마찬가지로 신탄진을 우선 한 보루 사다 드린다. 집에 계시는 동안 다 못 태우시니 남은 담배를 잘 챙겨가셨다.     


    외할머니는 이가 없었다. 앞니가 거의 없어 입을 다물고 있으면 입 주변의 근육이 힘없이 오그라들어 합죽할머니가 되고 만다. 당시에 틀니를 하는 노인도 잘 없었지만, 누가 해준다고 해도 추접고 귀찮다며 마다할 분이었다. 음식을 드실 때는 입을 꼭 다물고 씹는데 이도 없이 잘 씹히는지 그저 오물오물하다가 삼켰다. 그런데 난 그 오물오물하는 할머니의 모습과 표정이 참 정겹고 귀엽다고 느꼈다.

   할머니 식성은 특별한 게 없지만 유독 새우젓을 좋아하셨다. 할머니가 오시면 밥상엔 꼭 새우젓이 작은 종지에 담겨 올라간다. 그리고 계란 후라이 대신 계란찜을 해서 올렸는데, 간은 항상 새우젓으로 했다. 그래서 외할머니 별명이 새비젓 할머니였다. 통깨와 얇게 채 썬 당근이 노란 계란찜 위에 꾸미로 올라가 있는 모습이 예뻤다. 특히 노란 계란찜 살을 다 떠먹고 난 국물이 짭조름하니, 비벼 먹으면 그게 또 밥도둑이었다. 할머니가 찜을 다 떠드실 때 맞추어 밥을 절반 정도 남도록 속도 조절을 하는 것으로, 난 할머니에게 보란 듯 시위를 한다. 할머니는 모른 척 딴청을 피우지만 결국 조금 남긴 찜까지 싹싹 긁어 국물과 함께 내 밥 위에 부어주었다.

   외할머니가 오시면 엄마는 꼭 목욕탕에 함께 모시고 갔다. 한참 만에 두 분이 함께 반질반질 윤이 나는 발그레한 얼굴로 내려오는 모습이 참 정답고 흐뭇했다. 할아버지 오셨을 때와는 달리, 엄마도 할머니 계신 내내 명랑하고 틈만 나면 할머니와 마주 앉아 수다를 떨었다.     

   시집살이 10년 만에 별안간 시집을 떠나 서울로 오면서, 엄마는 시아버지에 대해 송구스러움이 마음속에 얹히듯 자리 잡게 되고, 머나먼 타관객지(他官客地) 살이가 힘에 부칠 때마다 친정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얼마나 애틋했을까. 그렇다고 때마다 시골집을 찾기엔 서울 살림이 그렇게 만만치 않았으니, 항상 고향 집을 생각하면 아쉽고 서운한 마음이 들었을 거다.


   그런데 서울살이가 어느 정도 자리 잡고 그런대로 익숙해지자 양가의 어른들이 해마다 서울 나들이를 하시니, 마음만큼 대접은 못 해 드려도 그나마 송구함과 그리움을 조금이라도 덜어낼 수 있었다. 할아버지와 외할머니도 우리 집이 양 집안 통틀어 일찌감치 서울 가서 나름 자리 잡고 사는 최초의 직계자손이라 대견하고 뿌듯하기도 했을 거다. 더욱이 나서기로 마음만 먹으면 해마다 언제라도 서울 바람 쐴 수 있으니 주변에서 보기에도 우세할 만한 일이었다. 나 역시 태어난 지 한 달도 못 되어 서울로 딸려오느라 시골의 정취와 정서를 경험할 겨를이 없었지만, 할아버지 할머니의 심심찮은 서울 상경 나들이는 막연하나마 나의 의식 속에 고향 집의 존재를 심어두기에 충분했으리라. 


#미아리의추억 #외할머니 #새비젓

류해윤_전통 草家집_종이 위에 아크릴릭_57*76.2cm_2006


작가의 이전글 마을백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