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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지수 Oct 27. 2024

하선 후의 소확행

피땀눈물은 나를 날 수 있게 만들어 줄 거야

하선 후의 소확행     

모든 일몰은 새로운 새벽을 약속한다.

-랄프왈도에머슨     


 8월의 어느 맑은 날, 근처에 신문사 기자와 점심 약속이 있어 덕수궁길을 걸었다. 사람들은 이번이 역대급 더위라고 한다. 23년 12월 배를 탄 이래로 계속 여름의 시간에 있었기 때문에 별로 더운 줄 모르겠다. 내가 강해졌다는 오만한 생각도 잠깐 하였지만, 열대야가 지속되고 배에서 배운 인내심을 금방 잊어버린 나도 결국 더위에 지쳐버렸다. 그날은 종각을 걷고 있었다. 햇볕이 내려쬐고 있었지만 그곳에서 배에서는 느낄 수 없던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단풍나무가 펼쳐진 가로수를 올려다보았다. 단풍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비치는 게 마치 윤슬 같았다. 갑판을 달리며 카페에 가서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싶었지만 마시지 못했던 감정이 되살아났다. 카페에 가서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싶은 날이었고, 나는 카페에 가서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마셨다.

 배를 타는 동안 하고 싶은 게 많았다. 하선 리스트를 하나씩 적어갔다. 참치대뱃살 먹기 같은 작은 것부터 해외 원정 트래킹 같은 큰 것까지. 봄은 일찌감치 죽어버려 벚꽃은 볼 수 없었고 25년을 기약해야 됐다. 승선 네 달 차가 되었을 때만 해도 오만의 산을 보며 하선 후 바로 등산을 계획했다. 15일쯤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를 트레킹 할 구체적인 계획까지 짰다. 하지만, 4개월이 지나고부터 오히려 리스트를 하나씩 지워갔다. 마치 권투선수가 수분까지 전부 제거하는 혹독한 다이어트를 할 때 처음에는 기름진 음식, 이후에는 콜라나 맥주 같은 것을 먹고 싶어 하지만 마지막에는 물밖에 생각나지 않는 것처럼.

 최후에 하고 싶은 것 세 개중 두는 도서관 가서 책 읽기, 성당 가서 성가 부르기였다. 결국 이것마저 지워버리고 마지막 남은 것 하나는 알람 끄고 잠자기였다. 

 실제로 하선 첫날 잠에서 깨어나는데. 이후에 조금씩 기운을 차리고 도서관에 가고 성당에 갔다. 참치를 먹고 자전거를 탔는데 아직도 이동하는 건 힘들다. 신기하게도 나의 역마살이 사라졌다. 나는 항상 시간과 돈의 한정된 조건에서 다음 여행을 계획하는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아무 데도 가고 싶지 않다. 배에서 내 역마살이 사라져 버렸다.

 싱가포르에서 5000원짜리 닭꼬치를 먹지 못하고 후회한 후에 나는 나 스스로에게 화를 냈다. 내가 돈을 낭비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은 잘 알기에 하선을 하게 되면 적당하고 합리적인 사치는 무조건 하자고 생각했다. 파도를 뚫고 나온 내게 선물도 주고 싶기도 했다. 또 그렇게 조금씩 아껴서 큰돈이 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힘들게 모아둔 전세금을 만져보지도 못하고 사기를 당한 뒤, 지금 있는 돈도 언제 그렇게 사라질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또한 앞으로도 계속 파도를 헤쳐나가다 보면 돈뿐만 아니라 내가 파도에 휩쓸려 사라질지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나는 굳은 결심을 하고 자주 가던 보라동의 중국집으로 개선장군처럼 당당히 향해갔다. 배에 있는 동안 물가가 많이 올랐다는 것을 들었지만, 중국집의 짬뽕은 일 년 만에 7000원에서 9000원으로 올라있었다. 나는 크게 당황했다. 평소처럼 그냥 짬뽕을 주문할까도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평소보다 강한 파도의 사나이 었다. 흔들리는 눈동자를 하고 키오스크를 통해 12,000원짜리 굴짬뽕을 주문하였다. 그리고는 당당하게 손을 들어 종업원에게 말했다. ‘단무지 많이 주세요!’ 그렇게 한층 성장한 나를 확인하였다. 

 하선 후 첫 주일이 되었다. 거울을 보며 단장을 하는데 그 속에는 8개월 전 청년이던 나의 모습이 사라져 있었다. 헤르만헤세의 소설[지와 사랑]에서 주인공 골드문트가 소년시절 수도원에서 도망친 후에 수십 년 만에 중년이 되어 돌아오는 장면이 있다. 거울 속 내 모습은 수십 년이 지나 다시 수도원으로 돌아온 골드문트처럼 청년에서 중년으로 바뀌어 있는 듯했다. 성당으로 향하는 길은 매번 편안한 마음을 가졌었지만 이번에는 설렘으로 가득했다. 8개월 만에 동경하던 소녀를 볼 수 있었다. 미사포를 쓰고 있던 그녀는 여전히 예뻤고 이전보다 조금 더 성(聖)스럽게 변해있었다. 시간이 두 배는 빠르게 흐른 것 같은 나의 외모와는 다르게 그녀는 오히려 8개월 정도 더 어려진 것 같이 보였다. 나는 그녀 앞에서 고장이 나버렸지만, 그녀는 마치 저번 주일에도 나를 봤던 것처럼 인사도 생략하고 내게 일을 시켰다. 다만 지금까지는 본 적이 없는 짙은 화장을 한 그녀는 손짓을 동원해 가며 고장 나버린 내게 해야 할 일을 계속 설명했다. 

 그녀의 손가락은 희고 가늘고 길었다. 손톱에는 세련되고 연한 분홍색 매니큐어가 발려져 있었다. 8개월 전에는 보지 못했던 미세한 크리스털이 여러 개 뿌려진 얇은 금반지가 그녀의 왼쪽 네 번째 손가락에 있었다. 나는 끝내 그녀가 내게 시키려던 일을 이해할 수 없었다. 순금 같았던 동경이 어설픈 짝사랑으로 변질되지 않을 수 있게 되어 다행이다. 동경할 수 있었던 덕분에 배에서 잘 지낼 수 있었고 고마웠다고 속으로 이야기했다.     

피땀눈물은 나를 날 수 있게 만들어 줄 거야     

알면서도 삼켜버린 독이든 성배

-BTS [피땀눈물]     


 하선 5일 후인 7월 17일, 서울 Y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에서 2박 3일간의 입실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곳에는 50명 정도가 있었다. 대부분이 20대였고 약간의 30대 초반과 4~50대가 소수 있었다. 첫날에는 간수치와 혈당 등의 몸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피를 뽑았다.

 처음 채혈을 할 때 간호사는 채혈 후 주삿바늘이 들어갔다 나와 빵꾸난 부분을 5~10분간 거즈로 잘 누르고 있으라고 했다. 나는 귀찮아서 피가 멈추자마자 지압을 그만뒀다. 30분 후 즈음 몸속에서 피가 분출됐는지 손바닥 정도 크기의 누런 멍이 들었다. 

 둘째 날에는 혈압과 맥박 체크를 한 후에 아침에 세 개의 약을 진한 농도의 설탕물과 함께 먹었다. 12시간 동안 30분마다 10회 1~2시간마다 4회로 조금씩 시간 간격을 늘려가며 피를 뽑았다. 한 번 뽑을 때마다 1~3개의 바큐테이너(용기)에 각각 4~11m의 피를 담았다. 

 둘째 날의 채혈은 팔꿈치 안쪽의 정맥에 카데터를 삽입한 후에 채혈시간마다 카데터를 통해 용기를 채워나갔다. 오른쪽 팔에는 멍이 심해 왼쪽 팔꿈치에 카데터를 삽입하였다. 처음에는 카데터에 용기를 대자마자 나의 검붉은 피가 분수처럼 튀어나왔다. 

 한 번은 피를 뽑히기 위해 대기 중이었다. 그 순간의 분위기는 너무 이질적이다. 물론 자발적으로 임상실험에 참여를 했다고는 하지만, 자신의 피를 팔아 돈을 번다는 소리 없는 패배감이 병동을 감싸고 있었다. 이름 없이 환자의 번호만 적혀있는 알약이 들어있는 흰 통, 박스에 가득 찬 사용하지 않은 주삿바늘과 채혈이 완료된 바큐테이너로 빽빽한 컨테이너, 피가 묻은 채 버려져있는 수많은 주사기 그리고 창백한 실험 참가자들의 얼굴에 묻어 나오는 허무한 감정은 결코 한 문장에 담아낼 수 없다. 

 내 앞에는 기껏해야 대학교 신입생으로 보이는 청량한 외모의 젊은 남성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맞은편의 여성 간호사에게 오른팔을 맡긴 채 피를 뽑히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고개를 돌려 피를 뽑히는 장면을 외면하고 있었다. 피가 거의 다 뽑혔을 무렵 학생이 머리가 어지럽다고 말을 뱉자마자 고개를 떨구고 몸이 축 늘어졌다. 간호사는 깜짝 놀라서 호출을 불렀다. 곧이어 거구의 남자 간호사 둘이 오더니 환자의 양쪽 어깨를 들고 부축하여 침대에 뉘었다.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여성 간호사는 불안정한 목소리로 내게 어지러우면 바로 이야기하라고 했다. 나도 어지러움을 느꼈고 어지럽다고 말했다. 여성 간호사는 남자 간호사들에게 나도 부축해 줄 것을 요청 했으나 나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혼자서 두 발로 나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첫걸음마를 떼는 아기를 부모님이 뒤에서 잡아줄 준비를 하는 것처럼 남자 간호사가 내가 나아가는 길을 뒤에서 지켜봐 줬다. 

 또래들처럼 로제 혹은 마라떡볶이를 좋아할 것 같은 평범한 여학생은 침대에 누워 있다가 의식을 잃었다. 의사가 긴급히 달려와서 상태를 체크하였고 여학생 본인의 의사에 따라 실험을 이어나갔다. 

 병원에 있는 동안 배가 너무 고팠다. 아침은 제공되지 않았고 식사는 프랜차이즈 도시락 전문점의 저가 라인의 도시락이 나왔다. 그 이유는 비용을 절감시키려 함이 아닌 밥을 많이 먹으면 혈당이 오른다던가의 의학적 이유일 것이다. 아니 그랬으면 좋겠다. 나는 쌀밥을 많이 먹는 편이 아닌데도 깊은 허기에 한 톨 남김없이 긁어먹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채혈 때마다 용기에 피가 충전되는 속도가 느려져갔다. 저녁이 되니 더 이상 내 왼쪽 팔꿈치의 정맥에 부착된 카데터에서 피가 나오지 않기 시작했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카데터를 제거하고 멍으로 부풀어있던 오른쪽 팔꿈치 정맥을 공략했다. 고무줄로 팔뚝을 묶은 후 요청대로 주먹을 10회 오므렸다 피라고 이야기를 하자 숨어있던 정맥이 피부 위에 유선형으로 뽈록 튀어나왔다. 흐리멍덩한 푸른색의 혈관을 날카로운 주사 바늘이 깊게 침투했다. 멍든 곳에 다시 주삿바늘이 들어오니 팔 전체가 저렸다. 

 나는 고통은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을 최대한 피하는데 또, 호기심은 엄청 많은 성격이다. 주삿바늘이 살을 파고드는 장면은 차마 볼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 다시 고개를 돌려 피가 용기 속에서 졸졸 흐르는 장면은 두 눈을 통해 조용히 지켜봤다. 

 14회의 채혈이 끝난 후 왼쪽 팔꿈치에 이식되었던 카데터를 뽑았다. 팔이 가벼웠다. 12시간 동안 꽂혀있던 주삿바늘이 빠져나가 심리적으로 가볍게 느껴진 걸 수도 있지만, 왼쪽 팔에 피가 모자랐는지 분명 물리적으로도 가볍게 느껴졌다. 마지막 날 역시 채혈을 한 후에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다음날과 다다음날 아침에도 시험 진행 결과를 위해 피를 뽑으러 갔다.

 7주 후, 9월 4일부터 비슷한 방식의 실험이 2박 3일간 다시 진행되었다. 7주 전의 참가자들 중 11명이 오지 않았고, 몸 관리가 제대로 하지 못한(음주와 운동, 영양제와 기름진 음식 섭취를 금했다.) 세 명이 집에 돌아가야 했다. 합숙 후에도 몇 번 병원에 와서 최종 검사를 받은 후에야 끝이 났다. 

 임상실험을 선택한 이유는 돈은 벌어야 했지만 배에 있을 때 겪은 육체노동에 질려 가만히 침대에 가만히 누워 돈을 벌어보고 싶었다. 실제로 그곳에 머무는 동안은 푹 쉬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몸이 피곤했는지 병원에 있을 때와 그 이후로 며칠간은 숙면이 가능했다. 실험에 참여해 병원에 10번을 방문하고 4박 6일을 머물며 36회 피를 뽑혔다. 그 결과 제약회사에서 실시한 당뇨 관련 약의 안정성 입증에 기여할 수 있게 되었고, 180만 원(3.3% 세금 제외 전 금액)을 보상받았다. 

 실험에 참여한 대부분이 20대 대학생 들이었다. 가녀린 여학생들도 더러 섞여 있었다. 그들에게는 세 달도 생활할 수 있는 적지 않은 돈이지만, 약의 부작용이 확인되지 않아 위험성이 있었음에도 쉽지 않은 결정을 한 것이 대단하다. 그분들께서는 몸을 좀 더 소중히 했으면 좋겠다. 

 내 꿈을 위해서라면 다시 임상시험에 참여해 일 리터의 피도 흘릴 수 있다. 다만, 가족, 친구뿐만 아니라 생면 부지의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이 실험에는 참여를 하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다만 사기꾼들은 교도소에서 매달 1회씩 강제로 실험에 참여하게 한 뒤에 자신의 피를 흘려 번 돈으로 피해자들에게 진 피땀 어린 빚을 갚아나가게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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