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 위에 비가 내리면 눈물을 감출 수 있어 좋아.
다섯 시 출근이라고요? 쉬는 날이 없다고요?
잠잠한 바다만 항해하게 된다면 훌륭한 항해사가 나올 수 없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선명은 라스라판호로 카타르의 LNG 생산 도시 이름이다. 카타르 정기 왕복선으로 알고 배에 탔는데 이번 항차는 호주로 간다고 한다. 배가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고 나는 배를 탔다. 그렇게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적도를 넘어 남반구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호주에서 워킹홀리데이를 했었는데 11년 만의 뜻하지 않는 재방문이다. 많이 알아보고 배에 탄 줄 알았는데, 막상 타고 보니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첫 저녁 식사 시간, 육고기와 물고기로 구성된 두 가지의 메인 메뉴와 일고여덟 가지의 밑반찬 따듯한 국으로 차려진 진수성찬을 보며 두 가지의 복합적인 생각이 들었다. 밥 하나는 정말 끝내주게 나오는구나. 다만, 그 밥을 내가 준비해야 하는구나.
복잡한 생각을 하는 내게 선배들은 앞으로 일과에 대해 알려줬다. 우선 조리원은 쉬는 날이 없다고 했다. 내가 웃으며 진짜냐고 물었더니 건조한 얼굴로 진짜라고 말했다. 집 앞에 경매 통지서가 붙었을 때처럼 믿을 수 없는 현실이 눈앞에 펼쳐졌다.
업무는 5시에서 8시에 아침을 10시에서 1시에 점심을 3시에서 7시에 저녁일을 한다고 했다. 하루에 10시간 정도였다. 이외에도 창고 관리를 하고 매주 한 번씩 선장, 기관장방을 청소하는 등의 잡무가 많았다. 똥을 먹은듯한 내 얼굴을 보고 뒤쪽 테이블의 갑판수가 신나서 말했다.
‘이미 배는 출발했어. 한 달 후에나 한국에 입항하면 내릴 수 있어. 정 힘들면 호주에 도착했을 때 갑판을 넘어 바다로 뛰어내려 탈출하던가’라고 이야기하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조리원의 주 업무는 재료손질, 식당 세팅, 서빙, 선배 심부름, 뒷정리, 설거지, 청소였다. 다행히 사회에서의 최지수를 내려놓고 조리부 선배들에게 야 혹은 니라고 불리는 조리원으로 적응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배경에는 선배들의 친절한(?) 가르침이 있었다. 한 가지만 예를 들면 오 차장을 닮은 조리수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난 언제든 너를 때릴 준비가 되어있으니 잘 처신해라.’
배를 타는 동안 네 명의 조리장과 세 명의 조리수를 만났다. 그중 감당하기 힘들었던 사람은 두 명이었는데 첫 항차에 만난 조리수와 세 번째 항차에 만난 조리장이었다. 밸런스 조절이 잘못되어 두 명의 악당을 한 번에 만났으면 힘들었을 텐데 행운이 따랐다. 두 명의 선배 중 한 명이 악당이면 다른 한 명은 존경할만한 요리사였다. 다만, 나의 역량이 부족해 모두에게 칭찬과 신뢰를 받지 못한 건 아쉬웠다.
배에서의 생활이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다행히도 상상했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적은 선배들의 챌린지가 있었고 조금 더 많은 업무량이 있었다.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이겨내야만 했고 그만한 배포를 가지고 배에 올라탔다.
조리원의 영어 직급은 Boy이다. 직급에서 느껴지듯 배에서 가장 낮은 계급에 랭크되어 있다.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에는 배에서 가장 힘든 직급을 담당하는 줄 알았지만, 배에 대해 조금씩 알아갈수록 오히려 내 위치가 쉬운 편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배 위에 비가 내리면 눈물을 감출 수 있어 좋아.
인생은 폭풍이 지나가길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빗속에서 춤추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비비안 그린
10km 높이로 치솟아있는 적란운 밑으로 선미가 들어간다. 하늘은 파랗고 구름은 하얀데 그 아래로는 소나기가 내리고 있다. 소나기도 자주 내리고 조리부 특성상 중간중간 쉬는 시간도 자주 갖는다. 거의 모든 시간의 나는 빗속에 뛰어들 준비가 되어있지만 의외로 그 세 타이밍이 한 번에 일어나는 일은 흔치 않다.
운이 좋게도 그 순간을 마주하면 나는 신난 개구리처럼 펄떡이며 C데크에 있는 후미의 갑판으로 나간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하늘 위에 떠있던 구름이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비가 되어 내린다. 시원한 비가 흘러내리며 내 뜨거운 상체를 덮친다. 신기하게도 배의 갑판을 감싸고 있는 철판 위에 고인 물은 따듯한다. 소나기도 쉽게 식히지 못할 정도로 배는 크고 철 갑판은 두껍다. 바다가 증발되어 만들어진 구름이 비가 되고 하늘에서 내려와 다시 바다가 된다. 맥주 공장에 견학 가서 맥주를 마시거나 대관령 양떼목장 앞 휴게소에서 양꼬치를 먹는 것처럼(다행히 원산지는 호주산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강한 현장감이 전달된다.
빗소리가 들린다. 비가 바다 위에 그리고 쇠로 덮여있는 갑판에 부딪히며 작은 소리를 낸다. 저마다 미세하게 다른 음을 내는 그 작은 소리들이 모여 제법 아름다운 소나타가 된다. 빗소리를 들으면서 비를 맞다 보면 마음속에 있던 화가 내 몸의 열과 함께 빠져나가는 기분이 든다. 비 맞기 좋은 계절은 여름이다. 늦봄이나 초가을만 돼도 빗속에서 노래를 두 곡만 부르고 나면 체온이 내려간다. 중동과 호주를 향해가는 LNG선의 항로는 대체로 적도와 북위 20도 사이에서 움직인다. 한 항차가 5주 정도 되는데 그중 남중국해 위를 넘는 5일 정도를 제외하면 배는 항상 여름의 시간에 갇혀있다. 필리핀 세부에서 내게 영어를 가르쳐준 필리피노 선생님 말에 의하면 그곳에는 두 개의 계절이 존재한다. 여름(Summer)과 뜨거운 여름(Hot Summer). 두 계절 모두 비 맞기에 최적화되어있다. 적란운 아래에서의 소나기는 정말 찰나와 같다. 갑판의 달궈진 철판들이 물로 식혀지기도 전 끝이 난다. 하지만 내 뜨거워진 정수리를 식혀주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비를 맞을 수 있는 그 시간이 너무 좋았다. 배에서 수평선을 보며 비를 맞을 수 있다는 기쁨에 또 배를 탄 슬픔에 눈물을 흘리며 춤, 아니 춤보다는 몸짓에 가까운 행동을 했다. 또, 쉽게 사그라들지 않는 열기를 깊숙이 지닌 따듯한 쇠갑판 위에 누워 하늘을 보며 비가 내리는 모습을 구경하기도 한다. 비는 가끔 내 동공 위로 떨어지기도 했다. 내가 아무리 많은 눈물을 흘려도 비는 내 눈물을 다 닦아주었다. 눈물을 손으로 닦는 현실적인 행위는 슬픔 혹은 행복의 감정을 억제시킨다. 비가 내리는 배 위에서는 나 스스로 눈물을 닦지 않고 내 온전한 슬픔과 행복을 지킬 수 있었다.
비를 맞고 그 속에서 눈물을 흘리면 금방 기분이 좋아진다. 소나기는 예고 없이 내렸지만 또 오래지 않아 멈출 것이다. 몇 번의 소나기를 마주해 본 경험을 통해 나는 그 사실을 내 피부 속에 각인시켰다.
갑판에서 야외 계단을 타고 내려와 거주구로 들어가는 문을 열고 4m만 들어가면 내 방이다. 젖은 옷가지는 수건걸이에 널고 따듯한 물로 샤워를 한다. 작은 헤어드라이어에서 나오는 적당히 따듯한 바람으로 머리를 말린다. 뽀송한 몸과 마음으로 새 옷을 입고 다시 일을 하러 간다. 소나기가 지나간 하늘에 무지개가 떠있다. 보통날의 무지개보다 소나기가 지나간 후의 무지개가 더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