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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지수 Oct 27. 2024

원양 상선 선원이 되어 삶의 파도를 이겨내리라.

정신을 차려보니 바다 위에 있었다.

1. 원양 상선 선원이 되어 삶의 파도를 이겨내리라.     


나는 다시 한번 내 운명의 주인이요, 내 영혼의 주재자였다. 나는 자유로웠다. 

-홍정욱 [7막 7장] 


 23년 5월의 어두운 밤, 나는 술에 취한 채 10층 빌라의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상에서 내려다보는 천안시 두정동의 밤거리에는 네온사인이 가득했다. 환락과 유흥의 메카. 많은 사람들은  그날 밤 도파민 홍수 속에서 절정을 맛보았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함부로 다가갈 수조차 없는 우울과 절망은 전부 내게로, 밑바닥으로 흘러 나를 잠식했다. 이곳에서 뛰어내리면 나의 슬픔은 사라지고 절정의 세계로 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옥상에는 한층 더 높게 지어진 엘리베이터실이 있었다. 나는 사다리를 타고 엘리베이터실 꼭대기로 올라갔다. 그곳에서 위성 안테나와 나란히 바람을 맞으며 위태롭게 서 있었다. 옥상에는 내 어깨까지 오는 난간이 있어 그 난간을 넘기 위해서는 두려움을 뛰어넘어야 했다. 즉, 삶과 죽음의 경계선이 높았다. 그 작은 두려움을 뛰어넘을 용기조차 없는 나는 한심한 인간이다. 하지만, 엘리베이터실 꼭대기는 겨우 발목 정도 오는 턱만 존재할 뿐이었다. 한 발을 허공에 내디뎌 봤다. 나머지 한 발을 더 내디디면 어떻게 될지 상상을 해봤다. 딱 10초, 10초 후면 내가 겪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 겪을 모든 고통이 사라질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태어나지 않는 것이 최선이고, 태어났다면 빨리 죽는 것이 차선일까?

 무언가 큰 잘못을 저지르려고 한다는 느낌은 있었다. 뭘 그르치려 하는지는 구체적으로 생각나지 않았고 나는 다만 끝내고 싶었다. 만약 저승에 가서 염라대왕 앞에 서면 회사에서 자주 쓰던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실수였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럼 염라대왕이 이렇게 말하겠지,

‘뭘 잘못했어?’

‘잘 모르겠습니다. 아, 사기를 당했습니다.’

 한 발은 이미 염라대왕을 향한 걸음을 떼었다. 저승에서의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고 있던 그 시점에 내 미래는 앞으로 단 10초가 남아 있었을지도 모른다. 눈을 질끈 감았다. 

 나의 한심한 과거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나도 엄마 친구 아들처럼 부모님의 자랑이 되고 싶었다. 인서울 명문대를 가고 싶어서 3수를 했는데 결국 수도권 사립대에 갔다.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에 입사하고 싶었는데 두 회사의 1차 벤더에 입사를 했다. LG전자의 유럽 주재원이 되고 싶었는데 현지 채용 인력이 되었다. 서울에 자가를 구하고 싶었는데 천안에 전세를 얻었다. 나의 노력은 황새를 따라가려 했던 뱁새의 가련한 날갯짓일 뿐이었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은, 전셋집이 사기를 당해 전세금 5,800만 원 중 한 푼도 돌려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후의 불과 두 시간 반 후의 시점이었다.

 내 비루한 삶을 돌이켜보니 눈물이 앞을 가려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억울하지가 않았다. 결국 다 내 능력과 노력이 부족해서 지금 이 자리에 서 있게 되었다는 것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이제, 나머지 한 발을 허공에 던질 경우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허공에 몸을 던지면 내 하찮은 육신의 속박이 풀리고 어깨에서 날개가 돋아나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을 것만 같다. 하늘을 바라봤다. 빨갛게 빛나는 점과 규칙적으로 깜빡이는 노란색 점이 일정한 속도로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술에 취해있다가도 정신이 바짝 들 때가 있다. 깜짝 놀랄만한 실수를 하거나, 간절한 소망이 생기거나. 내가 잠시 잊었던 조종사라는 꿈의 영혼 내 멱살을 잡고 이승으로 날 끌고 왔다. 내 인생의 남은 시간이 다시 길어졌다. 엘리베이터실 위 바닥에 철퍼덕 앉아 냉철하게 생각해 봤다. 

‘난 사기꾼들에게 꿈을 위한 돈을 빼앗겼을 뿐이지 꿈을 빼앗기지는 않았다.’

아직 내 꿈은 끝난 게 아니다. 사기꾼들 때문에 내 목숨을 포기하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내 꿈의 날개를 잘라버리게 만들 수는 없다. 내 목숨보다 중요한 꿈 그것만은 포기할 수 없다. 

 나는 역마살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로 세상 구석구석을 다녀봤다. 비행기를 타고 이동할 때마다 비행기는 내 꿈을 싣고 날아가 주었다. 사람들의 꿈을 목적지까지 잘 운송하는 ‘꿈 배달부‘ 그게 내 꿈이었다. 

 어떻게 꿈에 다가갈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았다. 생각을 시작하자마자 만화 원피스의 배경음악 ‘우리의 꿈’이 내 가슴속에서 울려왔다.     

‘내 어린 시절 우연히 들었던 잊지 못할 한마디. 

이 세상을 다 준다는 매혹적인 얘기 내게 꿈을 심어 주었어.

세상은 꿈꾸는 자의 것이라고 용기를 내 넌 할 수 있어.’     

 지체 없이 엘리베이터실 위에서 사다리를 타고 내려와 방으로 돌아갔다. 머릿속에는 흔한 드라마 클리셰인 사업에 실패한 이가 원양어선을 타고 바다에 나가 돈과 용기를 얻고 재기에 성공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그 드라마 주인공 얼굴에는 내 얼굴이 붙어있었다. 나는 위대한 주인공들의 뒤를 따르기로 했다. 비교적 최근에 이 클리셰가 적용된 드라마 이태원 클래스의 배경음악 ‘돌덩이’와 ‘가호’를 들으며 원양어선에 타는 방법을 정보의 바다에 검색했다. 

 구직, 알바 사이트에는 전현 정보가 없었다. 뱃사람들 커뮤니티까지 검색하며 절실한 마음으로 찾으니 겨우 한 시간 남짓한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선원복지고용센터의 국적부원 프로그램을 찾아냈다. 만화 원피스에서 골. D. 로저가 숨겨 놓았다던 세상의 모든 보물이 있는 원피스를 찾은 듯한 기분이었다. 꿈을 향해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를 찾은 직후 프로그램에 대해 알아볼 틈도 없이 격정적인 피로가 몰려왔고 잠에 빠져들었다. 나는 꿈에서는 위대한 항로를 항해하였다.      


2. 정신을 차려보니 바다 위에 있었다.     


배는 항구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다.

그러나 그것이 배의 존재이유는 아니다.

-괴테     


 23년 5월의 봄날에 배를 타기로 결심하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12월이 되어 파카를 꺼내고 있었다. 그동안 일을 하며 전세대출 빚을 갚아나가고 책 [전세지옥]을 썼다. 전세사기는 평범한 사람도 출판 작가가 될 수 있을 정도의 슬픔을 느끼게 해 준다. 

 배에 승선하기 위한 3가지의 기초교육을 받고 선원수첩을 만들었다. 부원으로 배를 탈 수 있는 자격이 갖추어졌고 탑 티어 해운사 중 세 곳에 이력서를 넣었다. 승선 대기기간이 길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승선 가능한 날짜보다 2달 먼저 이력서를 넣었다. 서류는 세 곳 모두 통과했으나 어차피 회사에 대한 정보도 잘 모르고 아는 내부자도 없었기에 처음 면접을 보고 합격한 곳에 그냥 가기로 했다. 더 이상 잃을 게 없었기에 무모해지거나 혹은 대단해질 수 있었다. 

 몸담기로 한 해운회사는 2017년에 파산하기 전까지 대한민국의 물류산업을 이끌던 세계 7위 한진해운의 파편 중 하나였다. 현재는 굴지의 회사로 자리매김하였고 40대 이상의 자사선을 운항한다. 연간 3천6백만 톤의 화물을 운반하고 연간 운항거리는 4백80만 마일이 넘는데 이는 달까지 10번을 왕복할 수 있는 거리이다. 사모펀드에 의해 경영이 되는 강성한 회사이다. 그만큼 선원 간의 유대가 강하고 다른 해운사에 비교했을 때 전반적으로 가족적인 분위기라고 한다. 

 회사 면접날 마도로스를 꿈꾸는 10명의 면접지원자들이 면접대기실에 모였다. 신입 지원이었지만 내가 가장 어렸고 대부분이 40대였다. 면접 대기실의 천장에 달린 실링팬이 돌아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릴 정도로 조용하고 기묘한 분위기였다. 면접 대기실은 물론 문 밖의 사무실까지 도서관 같은 분위기였다. 천안에서 다니던 쉽지 않았던 회사의 분위기가 떠올랐다. 한 명씩 호명되어 면접을 보고 왔는데 내가 마지막 순서였기 때문에 그들의 면접 전, 후의 확연히 달라진 표정을 관찰할 수 있었다. 모두가 얼굴이 약간 상기되어 들어오면서 왜 면접을 이렇게까지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며 나보고 각오하고 들어가라고 했다. 2등 항해사까지 경험했던 친절하고 잘생긴 인사팀 매니저가 면접대기실로 왔다. 나를 데리고 면접장으로 안내하며 이런 말을 했다.

 ‘지금 들어가게 되면 압박 면접을 받을 것입니다. 졸지 말고 솔직하게 대답하세요. 사실 조리원은 지원자도 적고 지수 씨는 젊기 때문에 큰 문제없으면 합격될 거예요.’

 면접장에 들어섰다. 건조한 면접실은 비단 습도만의 문제가 아닌 면접관들의 강한 눈빛에 내가 겁을 먹었기 때문일 것이다. 면접관들은 긴장하지 말라 했지만, 그들의 질문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왜 지원하게 됐냐, 회사에 아는 사람 있냐, 얼마나 탈거냐, 선배에게 부당한 지시를 받으면 어떻게 할 것이냐, 평소 자주 싸우고 화를 잘 내냐, 스트레스는 어떻게 푸는지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라’등의 직설적 질문이 강한 어조로 쏟아졌다. 

 나는 전세사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 했지만, 왜 헝가리에서 엘지전자를 그만두고 왔냐며 지원 동기 혹은 32살에 배를 타려고 하는 사연에 대해 집요하게 물어봤다. 사기꾼들이 검사에게 추궁당할 때의 느낌이 이런 느낌일까? 나는 전세사기 당한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제야 면접관들은 사기꾼에게 자백을 받은 검사들처럼 혈압이 낮아진 얼굴 표정을 지었다. 내가 불쌍히 느껴졌는지 전세사기는 너의 잘못이 아니라고 배에서 열심히 일해서 빚을 갚고 꼭 재기에 성공하기를 바란다는 응원의 말까지 전해줬다. 면접이 끝나고 건물에서 빠져나오기도 전에 합격 통지를 받았다. 배에 타고나서 선배들에게 면접에 대한 후일담을 들으니 해운사는 사연 있는 사람을 선호한다고 했다. 사연이 없을 때는 배에 승선해야 할 의무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고 금방 그만두기 때문이라고 한다. 보통 그 사람의 빚을 물어본 후에 그가 얼마나 승선할지를 가늠한다고 했다. 나는 이것을 선원 각자가 지닌 닻의 무게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부원으로 갈 수 있는 부서는 갑판부, 기관부, 조리부가 있었다. 갑판부와 조리부 사이에서 고민했다. 기초안전교육을 받을 때 숙소에서 같은 방을 썼던 경력자가 조리버리는 쉬는 날이 없다며 갑판부를 가라고 했다. 하지만, 그 양반은 술 주정뱅이였으므로 내 소신을 믿고 나아가기로 했다. 나는 엉망진창인 커리어에 조금이나 봐 쥐어봤던 칼을 계속 잡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그릇된 판단이었다. 

 10월에 해운회사에서 나와 같은 신입 선원들과 LNG운반선 입사교육을 받았다. 신입 선원들이 다 채울 수 없는 큰 강의실이었다. 많은 의자가 비어있었고 함께 면접을 본 인원 중 절반은 입사교육 자리에 없었다. 입사교육 시에 신규 부원 담당 매니저가 대놓고 조리버리는 기관부, 갑판부보다 힘들다고 했다. 가장 큰 이유는 쉬는 날이 없다고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배를 타는 사람은 미래의 나였기 때문에 신중을 가하지 않았다. 당시의 내가 했던 일은 배에서 잘 살아남는 방법을 간구하는 것보다는 흔들리거나 도망치치 않고 스스로를 배에 몰아넣는 것 밖에 없었다. 또한, 쉬는 날이 없다는 개념이 내게 잘 적용되지 않았다. ‘융통성 있게 로테이션으로 쉬겠지 설마 진짜로 쉬는 날이 없겠어?’라고 생각을 했다. 

 매니저의 작별 인사 겸 마지막 말은 그만둘 거면 최소한 2주의 시간은 달라고 했다. 얼마 전 신입이 한국 입항 이틀 전에 하선하겠다고 통보를 해서 대체자를 급하게 찾기 힘들었다고 했다. 매니저는 갑자기 그만둔다고 하면 회사와 대체자가 힘들어진다는 뉘앙스로 이야기를 했지만, 우리가 받아들이기에는 회사와 매니저는 우리를 그만 둘 사람으로 보고 있다고 느꼈다.

 최초에는 11월 말로 승선 일자가 잡혔지만, 12월 중순으로 밀렸다가 다시 조금 당겨져 최종적으로 12월 5일에 배를 타게 되었다. 배의 입항 날짜가 변경되기도 하고 타야 할 배가 바뀌기도 한다. 선원의 스케줄은 해운회사의 스케줄에 의해 쉽게 바뀐다. 해운회사의 스케줄에 맞춰 이삼주 전 즈음 매니저가 전화나 문자를 한다. 선원은 즉답을 해야 하고 정해진 날짜에 지정된 항구로 움직여야 한다. 그 또한 선원들이 감수해야 할 지극히 당연한 무게이자 운명이다. 뜻밖의 상황에 의해 갑자기 이틀 후 승선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하고 하선 전날 심지어는 하선을 한 후에 집에 가는 길에도 다시 불려 와 승선을 하기도 한다. 

 12월 5일, 승선의 날이 밝아왔다. 카페에 가면 따듯한 커피를 주문하고 싶은 추운 날이었다. 내 기억의 책 속의 그날의 페이지는 포스트잇으로 표시해야 할 만큼 중요하고 강렬했다. 눈을 감으면 통영 항에서 처음 배를 마주한 그 순간의 기분, 스스로에 대한 공감, 위안, 그날의 온도, 햇빛, 거대했던 배의 생김새 심지어 하늘에 떠 있는 구름마저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하다. 

 버스에서 내려 부두에서 올려다본 배는 거대했고 녹슬어있었다. 전장 280미터의 배는 수직으로 세우면 250m인 63 빌딩보다 높다. 수면에서 브리지(선교)까지의 높이는 40M 정도 된다. 타이타닉이 4만 6천 톤인데 라스라판호는 그보다 두 배 더 무거운 9만 3천 톤이다. LNG 저장탱크의 생김새는 내가 상상한 원형의 모스형이 아닌 직사각형의 멤브레인형이었다. 

 그 시점에서 잠시 기억이 사라진다. 잔뜩 긴장한 채로 20M 높이의 공성탑처럼 생긴 갱웨이에 올라야 했다. 백팩을 메고 캐리어 두 개를 들고 좁은 계단을 올라가야 했기 때문에 갱웨이를 올라간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다만, 캐리어를 각각 양손에 들으며 한 손에는 내 삶을 구원하겠다는 의지와 다른 한 손에는 미래의 꿈을 위해 오늘을 살아갈 거라는 각오를 다졌다. 

 그날은 화창했다. 하지만 태양이 아무리 밝아도 그 빛이 모든 곳에 도달하지 못한다. 상선 내부도 빛이 도달하지 못하는 공간 중 하나였다. 내 기억 속 배, 크루즈선의 로비는 화려했다. 오사카와 연태에서 각각 부산, 인천으로 배를 타고 귀국할 때 로비에 들어서면 생각보다 크고 화려한 공간에 입이 벌어졌다.

 하지만 상선에는 로비라는 개념은 따로 없다. 디자인팀이 회사에 단체로 반발하며 퇴사하였고, 기술·개발팀만으로 만들어낸 크고 못생긴 90년대 전자제품을 보는 듯한 형태의 내부 디자인이었다. 실제로 97년에 건조된 라스라판호는 몇 년 후 퇴역을 앞두고 있다. 입구에 5인승의 작은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누군가 날 데려와 주고 안내해 줬으면 좋으련만 그런 일은 없었고 서로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 속에 섞여 있었다. 이번 항차에 같이 승선한 통영 터미널에서 버스에 같이 탄 누군가에게 길을 물었다.

“콜록, 새로 온 조리원인데 어디로 가면 되나요? 콜록”

 승선 4일 전까지 네팔에 있었는데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서 감기를 가져왔다. 한국에서의 삼 일간의 음주에 더 심해진 느낌이었다. 세상이 끝날 것처럼 마셔댔다. 눈은 붉었고 안색은 검었다. 상대는 누군지 모르는 콜록거리는 상대와 별로 대화하고 싶지 않은지 약간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B Deck로 가서 갤리(식당)로 가세요.”

캐리어 두 개를 들고 엘리베이터에 탔다. 엘리베이터는 2020년대식 플라스틱보다는 90년대의 ‘뿌리스띡’ 느낌의 재질로 이루어져 있다. 다른 사람들도 엘리베이터 줄을 서고 있어서 더 타야 했다. 나는 뒷사람을 위해 문을 열어주고 싶은 마음으로 빨간색 버튼과 초록색 버튼 중 초록색 버튼을 연타하였다. 동시에 밖에 있는 사람도 버튼을 연타하였는데 문은 덜커덩거리며 친절하지 않은 문신한 아저씨의 느낌으로 버튼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였다. 엘리베이터 문이 중간쯤에서 고장 난 것처럼 계속 열리고 닫히고를 반복한다. 결국 엘리베이터는 우리의 의도와는 다르게 무심하게 문을 닫고는 위를 향했다. 버튼을 자세히 보니 초록색 버튼은 Door Close라고 쓰여 있고 빨간색 버튼에 Door Open이라고 쓰여 있다. 바깥에 있던 사람은 계속 문을 열려고 시도했지만, 나의 문을 닫으려는 의지가 더 강했다고 바깥의 사람은 생각했을 것이다. 뭔가 시작부터 일이 잘 풀리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목과 코에 잔뜩 껴있는 가래와 충농처럼 느껴진다. 잘 풀리지 않을 줄 알지만 헛기침을 해본다.

 상사가 누구일지 걱정하며 잔뜩 긴장된 상태로 주방에 들어섰지만 아무도 없었다. 긴장이 조금은 풀림과 동시에 차라리 빨리 만나 긴장을 끝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사관 식당 오른쪽에, 부원 식당이 왼쪽으로 나뉘어 있고 식당 옆에는 관리하기 위한 펜트리라 불리는 작은 공간이 있다. 중간의 넓은 공간에서 요리한다. 오븐과 육절기 그리고 화재를 조심해야 하는 배의 특성상 불을 쓰지 않고 냄비나 팬에 열을 전달할 수 있는 핫플레이트가 있었다. 그리고 각종 요리도구, 식재료가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배의 롤링과 피칭 때문에 헝클어졌는지 단순히 정리를 안 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햄스터처럼 귀엽게 생긴 사람이 갤리에 들어왔다. 웃으며 들어온 건지 들어와서 날 보고 웃은 건지 모르겠지만 웃었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는 조리장이었고 곧 조리원, 나와 교대할 사람을 불러주었다. 조리원 역시 나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익숙하고 포근한 얼굴이다. 방으로 나를 안내하며 3시까지 나오라고 했다. 시계를 보니 2시 35분쯤 되었다.

 방을 흘겨봤다. 부원 막내의 방은 고시원 같을 거라는 이야기를 익히 들어왔다. 그 말을 한 사람은 고시원에 살아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생각보다 넓은 공간에 책상, 냉장고, 소파, 옷장, 침대 등 모든 게 갖춰져 있었다. 개인 화장실에는 초록색으로 변색되어 있는 작은 욕조도 있었다. 천안에서 방을 구한다면 월세 50만 원, 서울에서는 80만 원은 줘야 할 방이다. 기대를 안고 창문을 가리고 있는 커튼을 쳤다. 정면에는 녹슨 크레인이 있었지만, 머리를 창문에 붙이고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바다가 보인다! 비록 오션뷰 창문은 아니었지만, 상상했던 타이타닉의 창도 없는 3등 칸보다는 훨씬 좋아서 만족했다.

 짐을 정리하고 방을 좀 더 살펴보고 싶었지만, 지독한 감기 때문에 식은땀이 흘렀고 몸 상태가 좋지 못했다. 3시부터 바로 업무에 투입해야 할 느낌이었다. 새벽부터 시외버스에 몸을 싣고 통영까지 달려온 여독을 식히고 조금이라도 몸을 눕힌 후에 일을 시작하기 위해 외투도 벗지 않고 침대에 누웠다. 

 마치 내가 눕기를 기다린 것처럼 눕고 눈을 감자마자 누군가 방문을 강하게 두드렸다. 노크를 통해 그 누군가는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게 느껴졌다. 시계를 보니 2시 40분이었다. 방문을 열었다. 노크를 한 사람은 웃지 않고 인상을 쓰고 있었다. 

 드라마 ‘미생’의 오 차장은 마지막에 퇴사하고 사업을 시작하며 드라마는 막을 내린다. 그 사업이 망해 상선을 탄 오 차장 느낌의 조리수(조리장과 조리원 사이의 중간 직급)가 서 있었다. 처음 본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뭐 하고 있어요? 빨리 주방으로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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