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김치찌개
놀거리
“강한 자가 아닌 적응하는 자가 살아남는다.”
– 찰스 다윈
고립된 환경에서 생활하는 선원들을 위해 선상에는 스트레스를 조절하기 위한 환경이 조성되어 있다. 노래방, 체육관과 매 항차 외장하드를 통해 올라오는 영상이 있다.
휴일 전날에는 항상 노래방이 개장된다. 안항제나 바비큐파티, 창립기념일, 명절 등 큰 이벤트가 있는 밤에는 평소보다 많은 사람이 노래방에 모인다. 대야에 얼음과 물을 채우고 맥주를 가득 채운다. 포트락파티처럼 서로가 숨겨둔 음식을 꺼내 다 함께 나눠먹으며 노래를 부른다.
노래방은 사관휴게실에 있기도 하고 사관들의 단합력이 훨씬 좋아 사관들이 주로 이용한다. 사관들은 어떻게 그렇게 잘 노는지 모르겠다. 몇 시간이고 계속 열정적으로 노래를 불러댄다. 부원들도 가끔 모여서 노래방을 이용한다. 한 번은 그곳에 갔는데 큰 형님께서 ‘아리아리 스리스리 아라리요’를 열창하며 무릎 춤을 추기 시작했다. 세월의 벽을 넘지 못하고 노래방의 마이크를 쥐지 못한 채 뒤돌아 나왔던 기억도 있다. 다행히도 노래방에서는 계급과 체면이 필요 없다. 한 손에는 마이크를 또 다른 손에는 캔맥주를 쥐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춘다. 항상 수줍어하고 조용하던 내가 마이크만 잡으면 롹커로 돌변하니 다음날 마약검사를 해보자는 얘기가 나오기도 했다.
체육관은 뱃사람의 고래힘줄 같은 근육이 길러지는 곳이다. 요즘 힙한 어르신들이 사용하시는 산스장(산에 있는 야외 간이 헬스장)과 비슷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 턱걸이와 벤치프레스 중량스퀏등이 가능한 멀티랙은 과거 헬스를 좋아하는 어느 기관장이 쇠파이프를 용접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등운동을 하는 렛풀다운 머신도 구비되어 있다. 나는 육지의 헬스클럽에서 렛풀다운을 할 때 고작 45kg을 들었는데 이곳에서는 최대 중량인 80kg을 들 수 있었다. 내가 뱃사람이 돼서 강해진 것도 바다라서 부력으로 중량의 무게가 가벼워진 것도 아니다. 다만 오래된 쇠줄이 헐거워져서 그런 것뿐이다. 무게가 부족한 근육몬들은 체인에 원판을 매달아 렛풀다운 기구를 사용했다.
거울에는 이런 문구가 있었다.
‘본인이 쓴 기구는 본인이 정리합시다.
시정잡배는 몸이 편한 것을 선택하고 대인은 마음이 편한 것을 선택한다.’
벽에는 아널드슈왈제네거 시절 느낌의 색 바랜 서양 근육남들의 포스터가 걸려있다. 그 사진을 보며 이곳에서 얼마나 크고 강한 근육들이 만들어졌을지 얼추 짐작해 보기도 했다.
나는 긴 근무시간에 항상 시간이 부족했는데 갑판부와, 기관부의 경우는 대부분 여가시간이 충분히 보장되었다. 평일에는 오후 네 시면 일과가 끝나고 주말과 공휴일도 휴식이 보장되었다. 흘러넘치는 시간을 사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물론 외장하드에 타고 온 육지의 최신 영상들을 시청하는 것이다.
외장하드의 용량은 2TB이다. 4년 된 중고 핸드폰과 5년 된 노트북을 쓰고 있는 내겐 테라바이트라는 용량 단위는 익숙하지 않다. TB에 대해 처음 접한 초등학교 6학년 시절, 컴퓨터 선생님께서 너희는 GB까지만 알면 된다고 TB는 은행이나 우주선 같은 시설에서 사용하는 단위라고 했었다.
그 정도로 큰 용량의 외장하드가 매 달마다 거의 꽉 찬 상태로 올라왔다. 외장하드에는 영화, 드라마, 예능, 다큐멘터리, 만화, 뉴스, 스포츠, 유튜브 등 없는 영상이 없었다. 수많은 영상들이 콘텐츠별로 잘 나열되어 있다. 그중 아직도 가장 기억에 남는 파일은 역시나 06. Adult 파일이었다. 그곳에는 동서양과 장르를 가리지 않는 다양한 영상이 존재했다. 매 항차 보고 싶은 드라마나 영화 등을 요청을 할 수 있고 다음 항차에 외장하드를 통해 올라온다.
주말이면 부원휴게실에서는 하나의 콘텐츠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재생되었다. 이를테면 토요일은 소년시대라는 드라마가 전편 재생되었고 일요일은 세계테마기획이 전편 재생되는 패턴이었다. 아저씨들이 한 자리에 모여 티브이를 보며 동시에 웃고 슬퍼하고 분노하는 장면을 보면 순수하고 귀엽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가끔은 흐릿한 눈으로 티브이를 볼 때가 있다.
그분들은 배를 너무 오래 탄 나머지 바다에 둥둥 떠다니는 시간에 약간 중독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다. 모두가 평소와 마찬가지로 흐린 눈으로 조용히 티브이를 보고 있을 때였다. 뭐를 보는지 궁금해 티브이를 보니 그들은 아무것도 재생하지 않은 컴퓨터 바탕화면을 보고 있었다. 배를 오래 타면 무료함에 익숙해져 나도 그렇게 변할 것 만 같다.
외장하드를 네트워크에 등록하면 와이파이를 통해 그 영상을 방에 있는 컴퓨터로 편하게 시청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방법을 알게 되면 쉬는 시간을 전부 영상 시청에 할애하게 될까 봐 결국 끝까지 와이파이를 통해 외장하드로 침투하지 않았다. 꼭 보고 싶은 영상만 USB를 통해 다운로드하여봤다. 배에도 선원들을 위한 충분한 복지가 있었고 이곳 역시 살 만한 곳이라는 게 느껴졌다. 그 속에서 나만의 소소한 재미를 찾아나가며 힘들 때마다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었다.
어머니의 김치찌개
나무는 고요하려고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아니하고,
자식은 효도하려고 하나 부모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한시외전
오늘 점심 메뉴는 크림 파스타. 올리브유를 넣고 달군 펜 위에 베이컨과 새우, 채소(마늘 곱빼기)를 넣고 볶았다. 감칠맛이 흩뿌려져 있는 팬 위로 심지가 살아있는 알덴테의 면을 투하한다. 우유와 생크림을 붓고 과하게 조려 입에 쩍쩍 달라붙을 정도로 꾸덕하게 잘 만들었다. UFO의 아랫부분을 닮은 흰색 접시 위로 젓가락을 돌려가며 파스타를 최대한 높이 담는다. 그 위에 그라나 파나도 치즈를 그레이터로 갈아 올리고 파슬리를 뿌렸다. 사이드로는 고르곤졸라 치즈가 올라간 졸라 맛있는 고르곤졸라 피자를 준비했다. 대부분이 나보다 젊은 사관들은 신난 강아지처럼 접시를 들고 더 달라며 찾아오기도 했다. 반면, 몇몇 부원 아저씨들은 느끼한 건 질색이라며 파스타를 들고 가지도 않고 아침에 남은 밥과 국 김치로 대충 점심을 때우기도 한다. 조리장도 총각김치를 파스타 위에 올려놓고 콩국수 먹듯이 파스타와 총각김치를 젓가락으로 동시에 집어 한입에 욱여넣는다. 피클조차도 안 먹으며 포크로 파스타를 돌돌 말아 연신 입에 연거푸 꽂아 넣는 날 보며 조리장은 ‘역시 너는 젊으니깐 느끼한걸 잘 먹네’라고 말했다.
흰색 크림이 빨간색 총각김치 국물과 섞여 분홍색의 로제파스타처럼 되어버린 그의 접시를 보며 나는 웃으며 가볍게 대답했다.
‘헝가리에서 살 때 매 끼니 양식을 먹어도 저는 행복했어요. 어머니가 요리를 못하셔서 저는 집 밥이 단 한 번도 그리운 적이 없었어요. 맛없는 음식들로 단련된 덕분에 저는 어느 상황에 서도 음식을 다 잘 먹습니다. 심지어는 군대에서 휴가 나와서 집밥을 먹으며 군대 짬밥이 더 낫다고 생각했을 정도예요. 하하하’
뜬금없고 경우 없는 나의 대답에 조리장은 쓴웃음을 지었다.
‘지수야 그 또한 너의 어머니의 사랑이 들어간 밥상이다. 집밥이 허술했던 건 너를 먹여 살리기 위해 직장에서 모든 힘을 다 쓰고 집에 와서 이미 소진되어 버린 힘을 짜내서 차려줬기 때문이야. 나도 하루 종일 요리를 하고 집에 들어가면 정말 요리를 하기 싫어. 혼자였다면 컵라면이나 하나 끓여 먹었을 거야. 가족을 사랑하기 때문에 다시 주방 앞에 서는 거야. 이미 다 쓴 양념을 주걱으로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듯 마지막 체력과 정신력을 짜내 가족 밥 상 위에 음식을 올려. 네 모친도 마찬가지야.’
나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빨개졌고 그는 눈시울이 빨개졌다. 조리장은 작년 한 분기에 부모님 두 분을 하늘로 보내셨다고 한다. 조리장은 어머니가 해준 김치찌개가 먹고 싶다며 집밥을 먹을 수 있을 때 많이 먹어두라고 했다. 너도 언젠간 집밥을 그리워하는 날이 올 거고 그 시점은 더 이상 집 밥을 먹지 못할 때라고 했다.
조리장은 총각시절 호텔 레스토랑에서 일했는데 밤 10시가 넘어서야 퇴근을 했다. 그의 어머니는 저녁 6시 즈음 아버지의 밥을 차려주고 11시가 돼서야 아들이 돌아오면 다시 밥을 차려주었다. 한 김 식었다가 다시 끓인 어머니의 김치찌개의 맛은 온천에 몸을 담그는 것처럼 따듯하고 피로가 풀리는 맛이었다고 한다.
며칠 후 점심 메뉴는 김치찌개였다. 조리장은 새벽에 김치찌개를 다 끓여놓고 한 김 식힌 다음에 점심에 한 소끔 끓여 김치찌개를 내었다. 김치찌개는 맛있었다. 찌개를 끓이기 전 잘게 썬 양파와 김치, 돼지고기를 볶은 것 때문은 아니다. 색깔과 냄새만으로도 턱 밑으로 침이 내려가는 잘 익은 김치 때문도 아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재현하려 한 조리장의 정성 덕분이다.
나의 어머니는 42년간 초등학교 선생님으로서 근무를 하고 24년 2월, 대통령 훈장을 받으며 교장선생님으로 명예롭게 퇴직하였다. 어머니는 다시 학교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그 허한 마음에 33살이나 처먹고도 사람 구실 못하는 아들까지 바다로 훌쩍 떠나버렸으니 당신의 마음은 메마른 우물처럼 텅 비어있을 것이다. 배를 타고 얼마 안 있어 포항과 제주해상에서 선원의 비보가 있기도 해서 분명 나를 걱정하고 계실 것이다. 집밥은 언제까지나 먹을 수 있을 거 같았다. 부모님이 언젠가는 내 곁을 떠날 거라는 끔찍한 상상은 몇 번 해 보았지만, 내가 집밥을 먹을 수 없는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문득 흰머리가 부쩍 늘어난 어머니의 작고 귀여워진 모습이 떠올랐다.
엄마의 맛없는 김치찌개가 먹고 싶다. 어머니는 통에 담긴 김치를 가위로 대충 잘라 다 잘리지 않은 채 끝이 붙어있는 그대로 냄비에 넣는다. 완성된 김치찌개 속 김치를 들어 올리면 가위가 김치 끝까지 다 자르지 못한 채 만국기처럼 계속 딸려 올라오기도 한다. 비록 김치찌개 속에 MSG와 정성이 없을지언정 그 안에는 분명 사랑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집밥을 그리워할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오늘은 오랜만에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잘 지내고 있다고 말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