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제 더 이상 빚쟁이가 아니에요.
저의 주 업무는 설거지입니다.
물을 응시하는 것만으로는 바다를 건널 수 없다.
-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조리장, 조리수, 조리원으로 구성된 3명의 조리반은 각자의 임무에 충실하며 하루도 빠짐없이 세끼를 만들어 간다. 동쪽에서 해가 뜨듯이 아침을 만들고 내가 매일 초콜릿을 안주로 맥주를 마시는 것처럼 점심을 만들고 인도양의 밤하늘에 달과 별이 뜨는 것처럼 저녁을 만든다. 마치 자연의 섭리처럼 당연한 일이다.
전 선대에서 가장 연차가 높은 40년 경력의 수석 조리장은 내년에 정년을 앞두고 있다.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박력이 넘치고 부지런하다. “에블데이 워크(Everyday Work)”를 외치며 매일 새벽 2시에 일어나 재료를 손질한다. 똑같은 파프리카를 채 썰어도 내가 썰면 즙이 흥건하고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반면 조리장이 썬 파프리카 채는 크기가 전부 일정하고 단면에서 빛이 난다. 경력의 차이, 그리고 조리장이 처음 샀을 때보다 크기가 절반 정도로 줄어들 만큼 잘 길들고 갈려진 칼의 차이다.
41살이라는 젊은 나이지만, 20살에 승선생활을 시작해 20년 경력이 넘는 조리수는 마치 프로메테우스와 같다. 가스 불 없이 핫플레이트로 요리하는 LNG선 주방에서도 화염을 방사한다. 핫플레이트와 웍에 기름을 뿌리고 오른쪽 주머니 속에 있는 불을 가져와 엄지와 중지를 튕기면 거대한 화염이 일어난다. 그러고는 라이터를 다시 오른쪽 주머니에 넣는다. 화려한 손목 스냅으로 웍을 흔들면, 웍 안에서 재료는 불과 함께 하늘을 날아다닌다. 맞은편에서 요리를 돕고 있으면 프로메테우스가 만들어낸 화력의 세기에 내 피부의 수분마저 날아가는 게 느껴진다. 조리장이 준비한 똑같은 재료로 요리를 해도 조리수와 나의 결과물 차이는 극명하다. 갓 만든 따듯한 밥과 시간이 지난 후에 전자레인지에 돌려 데운 밥의 맛 차이 정도로 표현할 수 있겠다.
한글로는 조리원, 영어로는 BOY로 명명되는 직급인 나의 메인 업무는 뒷정리이다. 식재료가 준비되고 요리가 끝나고 선원들이 식사를 끝마쳤을 때야 비로소 내 독무대가 펼쳐진다. 스피커를 내 자리로 옮겨와 취향대로 디제잉하고 노래를 따라 부르며 설거지를 시작한다. 재료 준비, 요리하는 동안의 긴장을 풀고 몸에 힘을 뺀 채 팔을 걷어붙이고 작업을 시작한다.
가끔 사관들이 산더미처럼 쌓인 설거짓거리를 보며 놀란다. 한 번은 항통사가 약간의 미안함을 붙여 이야기했다.
“지수 씨 설거짓거리가 많네요. 고생하세요.”
“넵 감사합니다! 항통사님 예쁜 하늘과 푸른 바다를 봐도 별로 감흥 없으시죠?”
“네 맞아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하하”
산더미처럼 쌓인 설거짓거리도 내게는 이제 무덤덤하다. 시간 제약이 없어 식사 준비할 때의 120 bpm의 빠른 템포에서 80 bpm의 느린 템포로 바꾼 후 아주 천천히 진행한다. 설거짓거리가 있는 싱크대에 뜨듯한 온천수 정도 수온의 물을 담는다. 세제를 풀고 물장구 하듯 거품을 일으킨다. 목욕을 마쳐 때를 불린 식기들은 옆의 싱크대에서 수세미질을 하고 트레이에 차곡차곡 식기를 담는다.
설거지할 때는 내게 동료가 하나 더 생긴다. 이름을 ‘(설) 거지’로 명명한 식기세척기의 도움을 받는다. 영어로 설거지하는 사람이나 식기세척기를 모두 Dish Washer라 부르기 때문에 나는 ‘거지’를 부하가 아닌 동료로서 대하고 있다. 거지의 큰 입을 벌려 식기가 담긴 트레이를 넣고 입을 닫는다. 거지는 큰 소리를 내며 작업을 시작한다. 목이 마르는지 아래에 있는 두 개의 통에 꽂힌 빨대로 액체를 쭉쭉 빨아들인다. 설거지 시작과 동시에 빨간색 통에 담긴 액체를 빨아들이고 설거지 중간에 파란색 통에 담긴 액체를 빨아들인다. 빨간색 액체는 세제이고 파란색 액체는 린스(헹굼 보조제)이다. 거지는 트레이를 넣고 정확히 100초 후에 깨끗하고 따듯하고 뽀짝 한 식기들을 내게 전해준다.
가끔은 조리수가 본인 몫의 뒷정리를 마치면 고맙게도 내 설거지를 도와준다. 정말 감사해 죽을 거 같다. 나보다 훨씬 많은 일을 하는데도 내 일을 도와주는 것이다. 조리수가 설거지를 도와주면 나는 다시 황송한 마음에 템포를 120 bpm으로 올려야 한다. 나만의 잔잔한 솔로 연주에 난입당한 느낌이 든다. 그렇게 도움을 받아 설거지를 마무리하면 뭔가 부족하고 허전한 느낌이 든다. (안 도와줬으면 좋겠는 건 비밀이다.)
마치 김민재, 이강인, 손흥민의 출전이 확정된 국가대표 경기가 열리는 날, 내가 좋아하는 아사히 맥주를 사놓고 교촌 허니콤보를 경기 한 시간 전에 시켜 경기 시작 5분 후에 배달이 왔는데, 아차차! 맥주를 냉장고에 넣어놓지 않아 미지근한 맥주에 치킨을 먹으며 축구를 관람하는 기분이다.
초반에 내가 설거지할 때는 남이 먹다 남긴 음식 찌꺼기들을 대할 때의 표정이 좋지 않았는지 조리수는 설거지 보기를 돈같이 하라고 이야기해젔다. 어차피 똑같이 일할 거 긍정적으로 하라는 이야기였다. 이제는 설거지가 산처럼 쌓여있어도 한숨 대신 ‘오늘은 벌 돈이 많구나’ 하며 미소를 지으며 달려들 수 있게 되었다.
설거지를 통해 인간은 위대하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청소와 설거지를 정말 못하는데 설거지도 많이 하면 실력이 늘더라. 처음에는 1시간 걸리던 설거지를 반년이 지난 후에는 30분 만에 끝낼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에는 물컵에서 냄새가 나고 접시가 깨끗하지 않다는 컴플레인을 받기도 했다. 경험치가 쌓이다 보니 시간은 줄었는데 처음보다 훨씬 깨끗한 결과물이 나온다. 세제를 묻힐 때 그릇을 고정시키는 엄지손가락 두 번째 마디에는 굳은살이 박였다. 설거지를 해도 손이 건조해지지 않을 정도로 손이 박력 있게 변했다. 그날그날의 메뉴에 따라, 사용된 접시에 따라 머릿속에 설거지 전략이 저절로 떠오른다. 행사 때는 갑판부에서 설거지를 도와주는데 나보고 설거지를 참 잘한다고 설거지 무형문화재를 시켜줘야겠다는 극찬도 받았다. 그럼에도 불과하고 조리부 선배들에 비하면 나는 설거지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더 성장할 수 있는 여지까지 남아있었다.
설거지를 끝내고 방에 들어가 숨을 돌리며 건조한 손에 로션을 바르며 망상을 한다. 내가 교도소장이 된다면 사기꾼과 경제사범에게는 설거지 당번을 고정시킬 것이다. 교도소의 모든 설거지를 음악도 없이 하루 종일 시킬 것이다. 식기세척기, 세제는 물론 수세미도 없이 면포 하나만 제공할 것이다. 차가운 물로만 설거지를 시킬 것이고, 교도관들이 철저히 검사해 고춧가루나 들러붙은 밥풀 하나라도 발견된다면 모든 설거지를 다시 해야 하는 철야 작업을 시켜야겠다. 하루 종일 설거지 하며 자신의 죄를 반성하고 씻어나가면 좋겠다. 설거지를 마치고 감방에 돌아가 로션이 없어 갈라진 손을 보고 피해자들의 갈라진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길 바라며.
나는 이제 더 이상 빚쟁이가 아니에요.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정주영
배를 탄 지 두 달 후 월급날, 배를 탈 때 까지도 남아있던 700여 만원의 빚을 다 갚았다. 중도상환을 하였고, 통장은 마이너스에서 0을 지나 플러스가 되었다. 발목에 잠겨 있던 족쇄가 풀어진 기분이었다.
배에서 30년을 일한 가스수는 내게 빚을 다 갚았으니 내리라고 했다. 그는 배에서 버틸 놈, 못 버틸 놈 그리고 배를 타야 될 사람, 타면 안 될 사람이 한눈에 보인다고 했다. 그중 나는 버틸 놈이지만 타면 안 될 사람이라고 했다. 그 이유는 중의적이었다. 밖에서도 무언갈 잘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고 또, 진심으로 배를 타는 게 아닌 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힘들어한다는 뜻이었다. 가스수의 말처럼 빚을 다 갚았으니 여기서 그만두고 하선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직 나는 배에서 빚만 갚고 내린다는 걸 고려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일을 마치고 갑판에 올라가 노을 지는 모습을 바라봤다. 태평양속에서 빛나고 있는 배가 지나온 물꼬리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나의 지나온 날들을 돌이켜봤다. 열심히 돈을 모으던 사회초년생의 내 모습, 경매통지서를 받은 내 모습, 그럼에도 이 집은 괜찮을 거라는 공인중개사의 말을 믿고 불안에 떨며 일을 하러 헝가리행 비행기를 타던 내 모습, 경매 상황이 좋지 않게 풀려 도살장에 끌려오는 심경으로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타는 내 모습, 전기가 끊긴 전셋집으로 다시 돌아온 내 모습, 울면서 [전세지옥]을 쓰던 내 모습, 배에 승선하던 날의 내 모습. 그리고 배가 지나온 점점 사라져 가는 스크루의 물살을 보고 있는 오늘. 분명 열심히 살았던 거 같은데 이제 겨우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을 뿐이다.
엔진의 열을 배출하는 굴뚝을 보며 나도 텅 빈 하늘을 바라보고는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처음 담배를 폈을 때처럼 머리가 핑 하고 돌았다. 이제 끝이 아닌 또 다른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입을 앙 다물고 선수가 향하는 곳을 바라보았다. 돈을 벌어 본래의 내 꿈인 조종사 훈련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저 앞에 보이는 듯했다. 하늘과 바다는 수평선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 배를 타고 나아가 수평선 끝에 도착해 하늘을 향해 날아갈 것이다. 그 과정에서 배는 파도와 천둥번개, 비바람을 만날 것이다. 동시에 돌고래와 알바트로스, 무지개 달과 뭉게구름을 만날 수도 있다.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의 끝은 오직 하늘의 신 우라노스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다만 내가 단언할 수 있는 건 지금 내 선택에 후회는 없을 거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