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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지수 Oct 27. 2024

희대의 낭만가이

신나는 교육 훈련


희대의 낭만가이     

낭만이란 배를 타고 떠나갈 거야

-이 세계의 [낭만젊음사랑]中


 사관 식당의 저녁 준비를 마치고 커튼을 내려 등화관제(선내의 불빛이 외부로 나가는 걸 차단해 항해사가 야간운항에 시야 방해를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를 할 때였다.

 여성과 데이트가 예정되어 있고 약속 장소로 향하며 문자를 주고받을 때, 상대방이 ‘나 오늘 이쁜 거 같아’라고 전해올 때가 있다. 창문을 내리며 이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커튼을 내릴 때 태양이 ‘오늘 노을이 이쁠 거야’라며 내게 말했다. 노을이 지기 전의 하늘과 태양, 구름과 바다는 연지곤지를 찍기 전의 새하얀 피부를 가진 새색시 같았다.

 밥을 후다닥 먹고 설거지하기 전에 밖으로 달려 나갔다. 평소에는 주로 비상구에서 바다를 바라보지만, 그날만큼은 다시 보지 못할 오늘의 해와 진한 이별을 하고 싶었다. 비상구를 타고 올라가 C데크의 뒤쪽 갑판으로 나가면 시야가 확 트인다. 장애물 하나 없이 대양과 하늘을 보면 눈이 더 선명해지는 것만 같다. 이어폰을 끼고 노이즈캔슬링 기능을 작동시켜 엔진 소리를 없애면 나 홀로 바다 위에 서 있는 기분이 든다. 지금껏 한 번도 다른 이를 마주친 적 없는 갑판에서 때때로 나 홀로 커피, 아이스크림, 콜라를 즐기며 크루즈선에 탄 기분을 내기도 한다.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면 자연의 경이로움에 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신이 있기에 매일 해를 뜨고 지게 하고 밤의 장막을 쳐 어둠을 내린다. 또 너무 어둠에 무서워하지 말라며 달과 별을 띄어준다. 푸른 바다가 항상 움직이며 그곳에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하늘은 어찌 그리 높고 맑은지 눈앞에 액자를 들고 사방팔방 어디를 대 보아도 작품이 된다. 그렇게 자연의 경이에 감탄하다 보면 대양을 말없이 건너는 거대한 상선들 또한 신의 영역에 들어선 것처럼 느껴진다. 

 갑판의 반대편에서 누가 슥하고 지나간다. 기관수 슥재 아저씨다. 슥재 아저씨는 분명 그리스인의 피가 흐르고 있을 거다. 갑빠가 앞뒤로 널찍하고 힘이 좋아 보이는 장사체형이다. 자연 곱슬머리를 갖고 있고 코와 심지어 귀에도 검은 털이 튀어나와 있다. 굵은 선으로 그린 듯한 외모는 그리스 석고상 아그리파를 떠오르게 만든다.

슥재 아저씨는 묵직해 보이는(비싸 보이는) DSLR 카메라를 들고 연신 셔터를 슥슥 누른다.

“사진 좋아하세요?”

“엄청 좋아해!”

“갑판 위에 자주 오세요?”

“노을이 지면 매일 올라와”

그가 매일 노을이 질 때 올라오는 이유는 해가 수평선에 닿는 순간 해 안으로 배가 들어오는 사진을 찍고 싶어서라고 한다. 여러 번 그 기회를 놓쳤다고 무척 아쉬워하며 카메라 액정을 통해 며칠 전에 찍은 사진을 보여줬다. 사진은 분명 아름다웠지만 그렇게 커다란 리액션으로 아쉬워할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하하)

“그 사진을 왜 찍으려 하는 거예요?”

“아내와 딸에게 보여주려고”

슥재 아저씨는 멋진 풍경을 보며 글을 쓰고 싶지만, 글감이 떠오르지 않고 아내와 딸 생각밖에 나지 않는다고 한다. 대신 네가 책 읽고 글 쓰는 걸 좋아하니 좀 써보라고 했다. 어찌 슥재 아저씨의 말보다 멋진 글을 쓸 수 있으랴. 이 배의 최고 낭만가이는 나, 최지수인 줄 알았는데 여기 희대의 낭만가이가 있었다. 나는 이 배의 낭만 선장 모자를 슥재 아저씨에 게 건네주었다.

 점점 노을이 지며 해가 바다와 하늘에 물감을 푸는가 싶더니 이내 수평선에 맞닿았다. 그 순간 우리는 아무 말 없이 해가 바다로 녹아드는 풍경을 감상하였다. 마치 달궈진 프라이팬에 버터가 녹는 것 같았다. 해는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도 바다 너머에서 빛으로 구름을 빨갛게 적셨다. 버터는 다 녹아 사라졌지만, 프라이팬 주변에 고소한 향기로 남아있는 것처럼.          


신나는 교육 훈련      

근심의 바다를 향해 팔을 내저어라, 하여 그 바다를 잠재워라. 

-윌리엄 셰익스피어     


 매월 이틀씩 안전훈련 및 교육을 한다. 훈련은 13시에 시작한다. 13시는 갑판부와 기관부의 오후 일과 시작 시간인 동시에 조리부에게는 점심을 마무리하고 저녁을 준비하기 전의 쉬는 시간이다. 일과 시간에 교육을 받는 갑판부와 기관부에게는 신나는 날이고 조리버리는 쉬는 시간에 훈련을 하니 전혀 신나지 않는 날이다.

 한국에서 출항하여 카타르로 LNG를 실으러 가는 항로에는 크게 두 곳의 위험 구간이 있다. 태평양에서 인도양으로 가는 길목인 싱가포르 해협의 해상 강도 그리고 아라비아해의 해적 및 반군의 위협이다. 최근 중동 정세 악화로 유사시 대피 훈련을 했다. 단체로 뽀빠이 캔을 먹고 근육이 울퉁불퉁해진 채 싸우거나 대한민국 남자라면 모두가 사용할 수 있는 K2소총이 지급되어 해적과 한바탕 총싸움을 벌이고, 나는 만화 [원피스]의 요리사 상디처럼 손을 다치지 않기 위해 발로 해적들을 때려잡는 상상을 했다. 하지만, 훈련 브리핑에서 우리는 비전투전력이기 때문에 씨타델로 불리는 대피 공간으로 들어가 문을 굳게 잠그고 무전을 치며 상황이 종료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전부라는 전혀 신나지 않는 소식을 들었다. 

 해적 침투 시나리오를 갖고 훈련을 하였는데 해적이 침투하면 머스터스테이션(긴급 시 집합 장소)으로 모여야 했다. 그 후 씨타델로 향하는데 씨타델은 두꺼운 철문으로 어느 위협으로부터든 안전하게 선원들을 보호할 수 있었다. 철문 두께가 15cm는 되어 보였고 소총은 물론 유탄이나 수류탄으로도 뚫을 수 없어 보였다. 적어도 K9자주포는 와야 문을 박살 낼 수 있을 것처럼 튼튼해 보였다. 

 씨타델 안에는 전 선원이 6일 동안 생존할 수 있는 식량과 식수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 외에도 씨타델에 구비된 물품 중에는 지극히 현실적인 것과 의외로 낭만적인 것도 있었다. 간이 화장실은 종이로 얇게 만들어져 있으며 유사시(?) 종이접기를 해 변기로 만들어 사용할 수 있다. 씨타델은 서른 명이 넘는 인원이 다 누우면 꽉 차 몇 명은 교대로 서 있어야 할 것 같은 그리 크지 않은 공간이었다. 내 앞에 있는 거대한 갑판수와의 유사시 상황을 상상해 보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낚시도구도 있다고 하는데 아직은 낚시라는 단어는 내게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훈련 설명은 듣지 않고 내 머릿속에는 상상의 나래가 펼쳐진다. 해적에 나포되고 해적은 배의 값비싼 것을 챙기고 항해에 필요한 장비는 모조리 부순 채 도망간 상황에서 구조팀이 올 때까지 낚시를 하며 목숨을 연장하는 상황이 떠올랐다. 모든 전력이 차단되어 달빛에 의지한 채 달이 떠있는 바다를 보며 동료들과 낚시를 하는 모습은 꽤나 낭만적이었다. 

 씨타델에서 나오며 망상은 끝이 났고 수동으로 타를 움직이는 훈련을 하였다. 선교에 있는 선장의 지시가 무전기를 통해 흘러나왔다. 나를 포함한 처음 배를 타거나 경력이 많지 않은 원급의 부원들이 지시에 맞춰 수동으로 타를 움직였다. 거대한 쇳덩어리로 만들어진 타를 손가락으로 까딱이며 조종할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그 외에도 배를 타는 동안 화재 대응 훈련 및 비상정을 이용한 탈출 훈련을 했다. 오랫동안 배를 탄 사람에게는 수십 수백 번은 한 훈련이겠지만, 처음 임한 나는 호기심을 갖고 흥미롭게 훈련을 받았다. 

 교육은 다음날 부원 휴게실에서 진행됐다. 첫 교육 날 조리장이 몇 번이고 나는 처음 훈련을 받는 것이니 선장 옆에 가서 앉아야 된다고 했다. 옆에서 조리수는 그저 미소만 짓고 있는 게 뭔가 수상쩍었다. 교육을 받기 위해 부원 휴게실에 들어서는데 조리장이 손가락으로 선장 옆자리를 가리켰다. 대부분의 사람이 모여있었고 확실한 계급사회에서 상명하복은 당연하기 때문에 선장 옆자리에 가서 앉았는데 주변의 사관들이 전부 당황했다. 그곳은 기관장 자리였다. 배신감을 느낀 채 조리장을 쳐다보니 초등학교 저학년의 장난꾸러기 남학생처럼 세상 환하게 웃고 있었다. 입을 벌리고 소리 없이 깔깔대는데 목젖에 당수를 한 대 세게 치고 싶었다. 사람들이 당황한 수치를 전부 더한 값보다 더 크게 당황한 나는 황급히 자리에 일어났는데 조리장의 웃음이 모두에게 전염 됐는지 전부 신나게 웃었다. 오직 나만이 신나지 않았다.  

 13시에 교육이 시작되었다. 새벽 5시부터 아침을 준비해 잠이 항상 부족한 조리버리는 13시에 점심 일을 마치면 쉬러 들어간다는 말을 하지 않고 회복하러 간다고 말한다. 회복이란 단어는 병원에서나 사용하는 단어로 쉬는 것보다 좀 더 무거운 의미를 지니고 있다. 회복 시간에 불을 꺼놓고 동영상 교육을 하니 나는 첫 교육임에도 천근처럼 느껴지는 내 눈꺼풀과 머리를 들어 올릴 수 없었다. 졸음과 싸우는 의식이 희미한 상황에서 앞 옆 뒤 사방에서 동료들이 한 마디씩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신나네. 신나네. 신난다는 단어가 가진 경쾌함과는 상반되게 아주 낮고 어둡고 우울한 목소리로 ‘신나네’라고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기이함을 느끼며 잠에서 깨었다. 교육 동영상의 내용은 대략 임의의 장소에 비치되어 있는 아무 음료수나 마시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말통에 담겨있는 독성이 있고 투명한 액체인 ‘신나’를 편의를 위해 아무 표식 없이 생수통에 옮겨놓은 것을 제삼자가 시너가 담긴 생수통을 마시는 장면을 보고 사람들이 “신나(마셨)네”라고 웅얼댄 거였다! 생각보다 허무했던 기이함의 정체를 알고 교육은 역시 ‘신나지 않네’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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