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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퇴직금 6억 5천만 원

은행원에서 택배기사까지

by 샤넬발망

회사 셔틀버스에서 내린 후, 시계를 보니 저녁 7시... 근처 커피숍에서 책 읽으며 대리콜을 기다릴지 아니면 집으로 가 밥을 먹을지 순간적으로 고민이 되었다. 배가 너무 고팠기 때문이다.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나고 오늘은 새로운 누군가를 만날까 하는 기대감이 서로 충돌하는 사이. 그냥 앱을 켜놓고 집으로 가는 도중에 대리콜이 뜨면 운전을 하러 가고, 그게 아니면 집에서 밥을 먹고 나오자. 그렇게 마음을 정하고 나니 한결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셔틀버스가 내린 곳과 집까지는 버스 정류장으로 4코스, 한 15-20분 정도 거리였다. 사실 이 시간 동안 대리콜이 뜨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다. 이른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띵동 알림을 울렸고 잡고 보니 1.4km 콜 수신 범위를 정할 수 있는데 난 최대 1.5km로 설정해 놓는다. 걸어서 1.4km 생각보다 먼 거리다. 취소할까 고민도 했지만 이렇게 무너지면 안 될 것 같아 바로 고객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도착 5분 전, 전화를 했다. 뭔가 정확하게 발음이 전달되지 않았다. 하나 확실한 것은 고객께서 "택배차"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사실 승용차 이외 트럭을 운전해 것이 25년 전 군대 있을 때 이후로 처음이다. 기어가 스틱이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냥 미안하다면서 사과하고 돌아서야 하나 이런 생각이 들 찰나 C 물류회사 로고가 적힌 택배차 앞에 도착을 했다. 역시나 택배 기사님이셨다.


타자마자 담배냄새와 술 냄새, 전형적인 블루칼라 노동자였다. 우선, 택배기사님들의 주요 관심사는 쿠팡이다. 이전에도 택배기사님을 손님으로 모셨는데 그때 쿠팡에 대한 얘기를 워낙 많이 해서, 내가 먼저 주제를 던졌다. "요즘 쿠팡 때문에 힘드시죠? 쿠팡 물량이 워낙 많아서 배달 물건이 많이 줄어들었죠?" 고객분께서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그래도 뭐 밥 먹고 살아요. 쿠팡 기사들도 힘들어요. 특히 생수 배달하는 분들은 월 500 이상 갖고 간다고 하는데 그래도 그거 하면 몸이 죽어나요. 그렇게 하고 싶진 않아요."라며 덤덤하게 얘기한다.


택배일을 한 지 8년이 되었다면서 그전에는 대기업에 다니다가 명예퇴직을 했는데 나오고 나니 이것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얼핏 봐도 나랑 연배가 비슷했는데 8년 전이면 30대 중반, 대기업에서 명퇴하기에는 이른 나이였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조심스럽게 어느 기업이냐고 여쭤봤다. "시티은행"


시티은행 명예퇴직에서 나오면서 받은 명퇴금과 퇴직금은 합쳐서 세전으로 6.5억. 뭐 할까 한 달을 고민했다고 한다. 30 중반에 재취업도 생각했지만 은행 경력으로는 어디 갈 때도 없고, 택배회사 대리점을 운영하는 친척의 추천으로 이 길을 걷고 있다. 그래도 나름 은행 다니면서 모은 돈으로 부모님 집도 사 드리고 지금도 대기업 과장 이상 정도의 연봉은 벌고 있기에 후회는 없다는 고객이었다.


대리점과 택배기사? 택배회사는 담당 지역 내로 도착한 택배를 분류하고 배정기사에게 배정하는 대리점을 창고 같은 곳을 운영하는데 이는 대부분 개인 사업자에게 외주를 주고 있다. 그리고 그 밑에 택배기사들이 집하장 점주에게 물건을 받아 배달을 하는 시스템이다. 궁금하지 않은가? 그래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장님, 그럼 사장님도 배달기사를 하지 않고 퇴직금 받은 6.5억으로 대리점을 하나 운영할 수도 있지 않나요" 요즘 중간 플랫폼 기업이 대세인데 택배 물류에 있어서도 중간 플랫폼을 해야 더 이익이 나지 않을까? 단순한 나의 생각이었다.


"사장님 같은 생각을 하는 분이 한둘일까요? 대리점은 돈 있다고 택배회사가 주는 게 아니에요. 그럼 제가 진작에 하고 남았죠. 허허허". 맞다 세상일이 그렇게 내 뜻대로 흘러가면 그게 인생일리가 없다. 또다시 주제가 쿠팡으로 넘어왔다. "사장님도 그럼 쿠팡기사로 가면 되지 않나요? 거기 물건이 많으면 더 수익이 많이 날 텐데 안 그런가요?" "저라고 왜 유혹이 없어겠어요. 다 정 때문이죠. 지금의 대리점주랑 몇 년간 이어져 온 정 때문이죠 뭐..."


살아가면서 내가 좀 손해를 보더라도 그 사람과의 관계 때문에 혹은 정 때문에 나의 이익을 일부 희생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 나의 선택이 올바른 것인가? 후회할 때도 있지만, 우리가 흔들리는 정 때문에 이 세상은 그래도 아직 살만한 세상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오늘 만난 택배기사 고객님도 지방국립대를 나와 당시 외국계 은행에 입사해 근무할 만큼 우리 사회에서는 나름 엘리트라 볼 수 있는데, 정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꾸준히 지금의 대리점 사장님과 연을 맺고 있는 것, 그게 사람 냄새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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