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천청사역에서부터 시작된 네 명의 발걸음은 관악산의 가파른 초입으로 빨려 들어간다. '악(嶽)' 자 붙은 산은 역시 명불허전. 늦가을 단풍이 다 져버린 앙상한 가지들 사이로 연주암까지 오르는 길은, 마치 지나온 우리의 삶처럼 만만치 않은 경사를 자랑했다. 숨 가쁜 오르막에서 잠시 멈춰 선 우리는, 실로 오랜만에 만난 대학 시절의 모습 그대로 웃고 떠들었다. 영원할 것 같던 젊음은 스쳐 간 세월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졌다. 문득 눈을 감고 지난 수십 년의 생(生)을 되돌아보니, 찰나의 영상처럼 1분이면 충분한 것 아닌가. 아마 남은 시간도 이보다 더 빠르게 흘러갈 것이리라. 옛 문인들이 노래했던 '인생무상(人生無常)'의 공허함이 가슴 한구석에 짠하게 자리 잡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순간, 오늘이 남은 인생에서 가장 젊다는 명확한 진실이 힘을 실어준다.
하산길, 안양수목원 쪽으로 접어들자 뜻밖의 행복이 기다리고 있었다. 산 밑자락에 늦게 물든 단풍나무들은, 그 화려하고 깊은 색채로 노을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저토록 기막히게 아름다운 색으로 한 해를 마무리하는 단풍처럼, 우리들의 노년 또한 저리도 멋지게 결실을 맺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품었다. 동기들은 모두 교직에 몸담아 교장으로, 혹은 시군 교육장까지 지내고 명예롭게 정년퇴직한 이 시대의 '결실' 그 자체였다. 특히, 30번 넘게 히말라야를 다녀오고 《일생에 한번은 히말라야를 걸어라》는 책까지 펴낸 친구 신00의 존재는 우리에게 든든한 멘토였다. 14박 15일 히말라야 트레킹이라는 원대한 꿈은, 그 오랜 경험과 지식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구체적인 현실이 되어갔다.
수목원을 지나 안양유원지의 먹자골목에 닿았다. 조용한 00식당에서 오늘 산행은 못한 친구가 합류해서 5명이 소주와 맥주를 곁들이니 대학 시절의 자유로움이 되살아났다. 물론 술잔을 기울이기 전, 신00 친구의 브리핑이 있었다. 히말라야 등산 일정, 준비물, 산행 지도 등이 꼼꼼하게 펼쳐졌다. 그의 브리핑은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니었다. 그것은 은퇴 후의 삶, 남은 생을 채워갈 새로운 목표와 열정에 대한 확실한 청사진이었다. 히말라야를 30번이나 걸은 그의 삶은, 우리가 느꼈던 '인생무상'을 뚫고 나아가 '인생유상(人生有常, 삶에는 의미 있는 일이 있다)'을 실현하는 실천적 철학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과연 내가 열흘 동안 계속 걸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기대감과 반반씩 섞여 올라왔다. 이미 충분한 세월을 걸어온 발이지만, 새로운 미지의 길에 대한 두려움은 여전했다.
술잔이 오가며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이어진 대화는, 결국 다가올 히말라야의 눈 덮인 봉우리로 귀결되었다. 우리는 히말라야에서는 열흘 이상을 쉼 없이 걸어야 한다. 이 트레킹은 단순히 정상을 향한 육체적인 도전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정년퇴직한 지 2년째인 우리의 삶이 다시 시작하는 새로운 관문이자, 허무했던 찰나의 인생에 묵직한 의미를 새겨 넣는 마지막 '악(嶽)' 자 산행일 것이다. 짧게 느껴졌던 지난날의 삶을 곱씹고 남은 인생을 어떻게 채워갈지 묻는 고독한 철학적 여정이 될 것이다. 설령 걷는 동안 고통스럽더라도, 우리는 2026년 2월, 그 히말라야의 정점에서 서로의 노년을 축하하며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단풍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