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더

by 김인영

한 번 더


오랜만에 바람과 함께 하늘이 가깝게 느껴지며 한낮에도 어둡던 날이 단비를 몰고 왔지만 아직도 부족한 강수량이라는 뉴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앞다투어 강원도의 붉은 단풍을 사진으로 보내오고 들판을 가득 채운 탐스런 호박을 바라보며 웃고 있는 어린 조카 손자들도 작년에 이어 존스 농장에서도 소식을 전해온다. 못 본 사이 머리 하나는 더 큰 것 같고 표정은 더욱 성숙해 짐을 느낀다. 가을이다. 에메랄드 빛 하늘을 보며 우체국에서 편지를 보내는 사람들은 이제 찾기 힘들지만 여전히 가을 하늘은 맑고 푸르다. 기다리던 비가 내리는 것을 보며 한편으로는 가을이 떠날까 조바심이 났었다.

여름의 치열한 전쟁을 끝내고 단단히 익어가는 알곡처럼 새로운 계절을 맞이할 여유와 준비가 덜 되어 있었기 때문이리라. 내리는 빗속으로 가을이 사라지고 외투를 꺼내야 하는 겨울이 성큼 다가올까 염려가 되었다.

높고 푸른 하늘 아래 허허로움이 드는 까닭은 무엇일까?

차지 못하여 고개를 숙일 수 없다. 나눔도 부족했고 아량은 더욱 베풀지 못했다. 사라지는 준비를 하는 것들이 저리도 당당하게 버티고 있는데 바라보는 난 아직 아닌 것 같아 불안하기 조차하다.

그리고 떠나간 것에 대한 그리움이 날이 갈수록 풍선처럼 차올라 길을 걷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울컥한다.

후회와 회한이 겹치니 너무 늦은 것 안다. 돌아올 수 없는 길. 아름다운 단풍을 즐기는 대신 함께 할 수 없어 안타까운 추억의 길을 떠난다.

한 여름 강렬한 햇빛과 천둥과 때로는 벼락으로 대지를 적시며 내리는 폭풍 속에서 아픔으로 준비해온 푸른 잎들의 종점. 단풍은 다시 대지로 떨어져 낙엽이 되어 눈에서 멀어지지만 홀로 흔들리는 나무 가지 위에서 싹을 틔우지 않는가. 견딜 수 없도록 힘든 순간과 아픔을 묵묵히 수용하고 어려움들을 극복하고 맺어진 단풍의 계절은 참으로 보람찬 날들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 붉은 훈장이야말로 환희의 순간들이며 승리의 절정이 아니겠는가.

우리 인생의 가을에 무엇을 내어 놓을까? 나이 들수록 새로운 계획과 목표를 세우는 것에 둔해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감동에 가슴 떨리고 안타까움으로 피를 덥게 하던 순간들이 점점 멀어지는 것을 느낀다. 그저 바라 볼뿐 가까이 다가가 손을 내밀지 못한다. 다만 추억을 반추하며 내게 주어졌던 순간들을 아름다웠다고 미화시키는 것에 만족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어찌 정신적인 변화뿐이랴 한 때 민첩했던 몸의 변화는 나를 주눅 들게 충분한 조건을 거머쥐고 있지는 아니한가? 하지만 한 겨울에도 따스한 볕은 거실을 데우고 있다. 난 오늘도 그 빛에 기대어 조각 이불을 만들리라.

그리하여 누군가의 시린 가슴을 데워주고 싶다.

내가 한때 그랬듯이 잠 못 드는 젊음의 고단함을 포근히 감싸 안아 잠들게 하고 싶다.

사랑의 이름으로. 나의 어머니가 내게 그러하셨듯이. 한 번 더 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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