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에게 (또 하나의 점을 찍다.)
친구에게 (또 하나의 점을 찍다.)
오랜만에 정해진 시간에 맞추어 아침에 사인을 하고 저녁 퇴근 시간 맞던 바쁜 일주일이 끝났군요.
오늘은 새벽 산책에 나무 친구도 보듬어주고 길 위 레드카펫도 밟아보고 화려한 단풍 모자도 써보고 돌아와 가을볕이 어느새 거실 깊이 들어와 인사를 하고 있는 이 시간 느긋한 평안을 누리고 있습니다.
오래전 오직 희망만 보여 자신감으로 강하던 그때 시골 자그마한 마을에서 은발의 여인을 보았지요. 참으로 단아한 모습으로 친절과 우아함으로 안내를 해주시던 그 부인의 모습을 닮고 싶었지요. 루스벨트 대통령의 고향집을 여행객에게 봉사하던 분으로 기억됩니다.
먼 훗날 제 모습으로 입력해 놓은 지 어언 30년이 흘렀군요.
우리는 인생의 길에서 어떤 점을 찍고 나아가는지요? 누군가는 예술의 점으로 누군가는 종교의 점으로, 스포츠로, 교육으로. 사업으로, 모두 나름대로 귀한 발자국을 남기지요? 그날 이후 많은 길을 왔군요.
가을을 심히 타는 것도 아니건만 기타로 연주되는 데니보이를 들으니 괜히 코끝이 찡해짐은 어찌 된 일인지요? 긴 세월 방랑의 먼 길을 돌아온 자가 고향으로 다시 돌아와 느끼는 회한과 안도감이 교차된 비슷한 감정 아닐까요.
그대도 많이 돌아 이곳에 오셨지요?
한통의 전화로 약속을 한 후 제게 배정된 일은 외국인에게 도움을 주는 일로 시작되었지요. 러시아.. 오스트레일리아. 미국. 인도 스페인. 독일. 이스라엘 이름이 기억 안 되는 유럽 어딘가에서 온 젊은이, 일본과 중국에서도 많은 이들이 다녀갔지만 그들은 제 몫이 아니었기에 직접 제가 도울 일은 없었답니다. 되도록 친절하게 되도록 많이 그리나 과하지 않게 우리의 것을 알리고 싶었지요. 예전에 제게 본을 보여주었던 그 부인처럼 말이에요.
인생은 참 재미있지 않아요? 돌고 도는 인생입니다. 언젠가 그의 몫이었던 것이 내 것이 되고 그 자리에 제가 있지요. 누군가를 위해 우린 또 자리를 내어 주어야 할 때가 올 것입니다.
문득 그들이 스쳐갑니다 솜털처럼 가볍고 유쾌했던 대화들이 생각납니다. 특히 호주에서 아들을 만나러 왔다던 어머니가 생각납니다. 3년을 이곳에서 일을 한 아들이 어머니에게 비행기 삯을 지불했다며 기쁘게 그리고 자랑스레 말하던 그분은 한국이 좋다며 웃는 모습이 참으로 멋있고 다정해 보였지요. 일주일 후엔 자신은 떠나고 아들의 아빠가 온다고 하기에 의아해하던 제게 이혼을 했다며 남편에게 다른 여자가 생겨서 3년 전에 따로 살기로 했다고 담담하게 말하는 그녀의 눈에 비치던 상실감이 생각납니다. 아마 가을 이어서 일 겁니다. 그날 밖에서 불던 바람도 기억납니다. 지금은 지구의 반대편에 있을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며 살까 하는 궁금증이 더해지는 날입니다. 우리에게 조금 더 시간이 있었더라면 제가 저의 전화번호라도 가르쳐주었더라면 오늘처럼 한가롭고 여유로운 시간에 차 한 잔 나누며, 여인들의 삶을 이야기하고 캥거루와 김치가 아닌 속내를 내보이며 벗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우린 서로에게 따스한 햇빛이 되고 공기가 되고 바람이 되어야 합니다. 누군가에게 든든한 나무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먼 길이 멀지 않게 산도 높지 않게 파도도 넘을 수 있을 겁니다. 그것이 우리 인생의 길 위에 좋은 점 하나를 찍는 것일 겁니다. 짧았던 봉사가 즐겁고 신명 나는 추억이 되었음이 이 가을에 받은 기쁨입니다. 지금 조금 마음이 흔들리는 것도 떠나가는 가을에 대한 예의 같은 생각도 드는군요 안녕히 계십시오.
저를 붙들어 주실 분은 단 한 분 그대뿐입니다. 사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