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결에 손을 비벼본다. 왼쪽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의 촉감을 느끼고 다시 잠을 청한다. 반갑고 안도감이 든다. 왼쪽 네 번째 무명지는 사람의 정맥이 심장에까지 미친다고 믿기 시작한 로마 시대부터 약혼 또는 결혼반지를 끼우는 손가락으로 자리매김하였다고 한다. 유래가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모른 채 반지를 호흡처럼 손에 달고 다니길 한평생. 어릴 적 보랏빛 들꽃으로 네 번째 손가락에 둘둘 말아 얹고 황홀해하던 첫 번 기억 후 늘 내 손가락은 무엇인가 얹혀있다.
천경자 님의 길례 언니를 만나던 날 이국적인 그녀의 그림 위에 화려하게 얹혀있던 화환을 보며 난 어릴 적 꽃반지를 떠올렸다. 아마도 보지 못한 길례 언니의 손에도 꽃반지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몇 달 전 남편과 나는 서로 같은 모양의 반지를 맞추어 나누어 갖었다. 인터넷으로 찾아보기도 하고 때론 남들과 다른 모양을 구상하기도 하며 들뜨고 행복한 얼마를 지나고 보석상에서 18금의 단순하고 평범한 밴드를 골랐다. 너무 반짝이는 것도 싫고 평범한 것도 원하지 않는다고 하였던 나였다. 젊은이들이 서로에게 주고받는 커플링과는 다른 좀 더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다. 사실 우린 20년도 넘게 함께 끼고 다니던 반지가 있었다. 남편이 뉴욕의 보석상에서 주문하여 내게 선물한 독특한 문양을 지닌 반지였다. 너무 빛나지 않는 14금의 차분하고 고풍스러운 무늬가 주는 무게감은 참 마음에 들었다. 남편은 남편대로 그 반지를 항상 끼고 다니며 반지를 끼어야 마음이 안정된다고 말하곤 했다. 그렇게 서로에게 중요하기만 하던 반지를 어느 날 잃어버렸다. 늘 놓아두는 자리에 있지 않은 반지를 애타게 찾으며 남편에게도 말을 못 하고 몇 달을 지내다 고백을 하니 나보다 더 실망하던 그이다. 오래전에 주문제작을 한 것이니 같은 것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게 아쉬운 채로 몇 년을 지냈다. 어느 날 그토록 애지중지 아끼던 반지를 남편이 허둥대며 찾는 것을 보게 되었다. 괜히 불길한 심정과 함께 엉뚱한 상상의 날개를 달던 어느 날 카드 속에 수표 한 장을 받게 되었다. 엄마 아빠의 이야기를 안부 전화를 하다가 전해 들은 작은 딸아이가 보낸 것이다. 따뜻한 마음을 헤아려 똑같은 반지를 몇 년 만에 각자의 무명지에 다시 얹었다. 우린 서로의 반지를 비벼대며 웃었다. 그리고 잠자리에서도 빼지 않겠다고 혼자 다짐했다. 예전의 반지에 비해 너무나 단순한 반지지만 왠지 그 장식 없음이 장식이 되는 것을 느낀다.
마치 사랑한다는 말을 전처럼 자주 하지 않아도 느낌으로 눈빛으로 그 마음을 헤아리는 우리 부부의 좀 더 성숙해진 삶의 방식과 비슷하다. 불 같이 끓어오르지 않는다. 얼굴과 뒷모습에 세월의 무게가 실리는 것을 볼 때 그이가 한없이 소중하다고 느껴진다. 말하기 전에 베풀고 찾아주고 싶다. 같이 나누는 삶의 방법을 알아가니 어느새 60 고개다. 가을은 가고 겨울은 다가온다. 웃자. 견디고 준비해온 것들로 이제 숨 고르며 살자. 작은 반지가 제자리에 있어 안심이 되듯이 별 말이 필요 없는 그이가 소중함을 깨닫게 해 준 반지의 귀환이 고맙고 반가운 새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