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응. 경복궁 역 2번 출구에서 만나자.’
긴 연휴가 끝나가고 있던 날 만남을 약속하고 서둘러 달려간 곳에 친구는 따뜻한 커피와 패스추리를 주문해 놓고 활짝 웃으며 나를 반겨주었다.
머리를 땋고 단정한 교복을 입고 다니던 시절에 만났으니 반세기 전 친구다.
우리는 윤동주 문학관과 청운 도서관 서울 미술관도 지나며 잠깐씩 드나드는 햇빛을 벗 삼아 부암동 길을 걸었다. 예쁜 카페가 숨어있고 옛사람들이 숨 쉬던 공간 속을 걸을 수 있고 주변의 소소한 것들이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볼 것도 많은 부암동, 자연과 문화가 함께 어우러진 이곳은 내가 좋아하는 길이다.
그런데 길을 떠올리면 걷고 싶고 떠나고 싶은 것은 무슨 까닭일까.
가을이 깊어가려는지 비가 내리는 아침이다. 빗속에 낙엽 냄새가 난다. 그것은 커피 냄새다. 이 가을엔 또 어느 길을 걸어 볼까 덕수궁 돌담길 경희궁 뒷길 우이령길 그리고 몽촌 토성길 등 갈 곳도 많다.
삶의 길 위에서 참 많은 날들이 즐거웠고 때로 힘들었다. 생각해보면 산다는 것은 길 위의 외줄 타기 곡예이다. 숙련된 몸짓을 위해 많은 날 거듭된 훈련과 외로운 시간을 견디며 익숙해지는 듯하나 찰나의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나를 지켜보는 수많은 눈동자들의 호기심 어린 눈빛에 답하며 웃으며 외길을 걸어가는 마음은 때로 공허하기까지 하다.
길은 물방울 바위 미소 숲 그리고 햇살처럼 내가 좋아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길을 생각하면 지금은 천국에 계시는 어머니가 떠오른다. 사랑하는 어머니는 어릴 적 아버지와 함께 보셨던 앤서니 퀸이 나오는 길 이란 영화를 자주 언급하시곤 했다. 그럴 때 어머닌 왠지 자신을 조금 더 멋지게 생각하시는 것처럼 보였다. 생각해보면 어머니 세대에는 남편과 함께 영화관에서 데이트를 한다는 것은 조금 으쓱거릴 수도 있는 이벤트인 것이 확실하다.
너무 어려 이해할 수 없는 내용과 영화 속에 흐르던 음악을 내게 말씀하시던 그 순간들은 어머니가 꿈꾸며 살던 행복한 삶의 길이 아니었나 싶다.
그날 친구와 나는 사람 많은 곳을 피해 한참을 걸어 달고 따뜻한 커피를 마주하고 앉아 골목길을 걷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눴다. 세월이 많이 흘러 다시 만났으니 간간이 듣던 걸어온 인생길 뒤에 감춰진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여리기만 해 보이는 친구의 가녀린 어깨 위에 갑작스레 찾아온 등 뒤에 얹힌 돌의 무게가 얼마나 기막히고 무겁고 힘들었을까 생각하며 긴 터널을 통과해 지금은 웃고 있는 친구가 크게만 느껴졌다.
나는 친구에게 말했다. 생각해보면 여기까지 걸어오는 동안 나는 소위 말하는 범생이었다고. 인생을 심각하게 생각하게 될 즈음 고등학교 졸업식장에서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인생에는 그리고의 인간과 그러 나의 인간이 있는데 여러분은 후자의 인생관을 갖고 살기를 바란다고. 말씀을 마치셨을 때 나는 결심했다. 그러나 인간이 되겠다고. 많이 자고 싶어도 많이 놀고 싶어도 마음에 꼭 들진 않아도 힘이 들어도 먼 훗날 나의 인생의 길에서 후회가 없이 살려면 그러 나가 되어야 한다고. 그 후 세상을 돌며 살 때 나름 최선을 다해 노력하며 살았음을 고백한다.
꽃다운 나이 연애 한 번 제대로 못해보고 운명처럼 내게 나타난 한 남자를 만나 그러 나의 신념으로 오늘까지 살아가고 살아내고 있다.
나와 성격이 달라도 그러나. 식성이 달라도 취향이 달라도 그러 나를 외치고 길을 걸었다. 40년 살다 보니 이젠 그이는 내게 그리고 가 되었다. 그이가 시장할 테니 피곤할 테니 책을 읽을 시간이 필요할 테니. 받자 대신 주자가 많아진 것이다. 억지로 수용하기보다는 이해하게 되고 같은 방향으로 바라보게 된 나를 발견한다.
오늘도 제철 지난 옷가지를 정리하며 재채기를 하는 나를 대신하여 어느새 뒤편으로 밀려난 선풍기를 닦으며 놓을 곳을 묻는 주름진 이마 속에 미소 짓는 남편을 나는 신뢰한다. 그리고 사랑한다. 힘든 인생길 여기저기 눈 돌리지 않고 함께 인내하며 살아온 것이 대견스럽게 생각되는 오늘. 낙엽이 쌓인 오후의 호젓한 길을 함께 걷고 싶다. 마음의 길을 함께 하니 어느 곳 인들 함께 못 가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