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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인영 Nov 09. 2023

슬리퍼가 있길래


도대체 왜 그것을 못 보았을까?

자책과 불만과 분통이 터진다.

어제 오후 산책 겸 집을 나와 걷던 중

푸른 하늘에 홀리고 곱기도 한 은행 잎에 넋 놓고 있다가 바로 앞의 구덩이를 못 보고 미끄러져 그만 넘어진 것이다.

아이코, 어머나 ~

오른쪽 무릎에서 피가 보이고  왼쪽 복숭아 뼈가 부어있다. 

다행히 주변엔 보는 이가 없다는 것으로

구겨질 뻔한 체면을 거두어들이고 다시 걸음을  옮긴다.

'나이 들면 낙상을 조심하라.'라고 했는데  생각하며 최근에 신발에 깔아 놓은 아직 적응이 안 된 깔창 때문이라고 나의 주의력 결핍을 반성하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나 하여 평소 다니는 약사의 소견을 듣고자 했다.

지금 괜찮으심 찬물 찜질 후 파스를 붙이라고 권한다.

난 근처의 한의원을 가보면 어떻겠느냐고 슬쩍 물었으나 자신은 권하고 싶지 않다고 한다

시간도 늦어지고 약사님도 괜찮다고 하니 집으로 돌아와  파스도 붙이고 냉찜질도 한 후 저녁식사를 준비했다.

두어 시간이 지난 후 일어서려니 왼쪽 발바닥이  너무 아파 바닥을 디딜 수가 없을 정도로 힘들었다.

돌아와 딱해하며 병원을 찾지 않은  어리석음을 나무라는 남편의 말에도 나는 침묵했다.

고통은 모든 것을 거두어 가는가.

통증 완화 연고를 바른 후  발 전체를 파스로 도배를 하고 치워 두었던 원적외선 치료기를 찾아 빛을 쏘였다.

억지로 남편이 건네주는 근육 이완제도 먹은 후

최상의 치료법은 깊은 잠이라 생각하고 누우며 어서 밤이 지나고 해가 뜨면 정형외과를 찾으리라 결심한다.

간 밤엔 깊은 잠은커녕 화장실 볼일도 더욱  잦고 물도 마시러 일어나며 뒤척이는 잠자리는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드디어 새 날이 밝아 예정되어 있는 일정을 취소하고 병원으로 향한다.


아무리 보아도 맞는 신발이 없다.

눈에 들어오는 베이지 색의 슬리퍼를 어쩌면 버려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던 큼직하여  안성맞춤인 것을 한 겨울에 신고 차에 오른다.

오랜만에 오셨다며 반색하는 접수창구의  여인에게 눈인사를 하며  살펴보니 어느새 십여 명의 대기자가 있다.

30분 전에 만난 의사로부터 엑스레이를 찍으라는 말씀을 듣고 발등과 발목의 8장의 사진을  찍고  부어서 안타깝고 아파서 더욱 슬픈 시간을 보내며

오늘 나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했고 사랑스러운 슬리퍼를 바라본다.

내가 널 버렸더라면 어쩔 뻔했니?

말 못 하는 그분은 구멍  숭숭 난  바닥 사이로 여전히 나의 온 체중을 싣고도 침묵이다.


          말이 없다고 느낌이 없겠는가

          말이 없다고 버려짐을 반기겠는가.

          말없이 고이는 눈물을 삼키는 그분은 위대하다.

         말없이 모든 것을 포용하는 너그러움에 가슴이 뭉클한 나의 슬리퍼.

           고맙구나. 



^^나와는  상의 없이 멋대로 늘어난 인대로 앞으로 3주 동안 발목 보호대를 하고  걷는 것을 자제하여야 한단다.^^어서 이 고통이 바람처럼 날아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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