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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인영 Nov 28. 2023

마이 레디 (My lady)


 겨울 나그네와 헨델의 오라토리오가 흐르는 아침 햇살이 깊이 들어오는 아직은 오전을 가리키는 벽시계도 오늘은 조금 급해 보인다. 아니 아쉬워 보인다.

라디오에선 당신이 선물로 받은 하루를 감사함과 뜨거움으로 시작하라고 한다. 그리고 이흥렬의 섬집아기가 흐른다. 용재 오닐의 선율이다. 그이는 어떻게 아기의 기다림과 아이를 놓고 굴 따러간 어머니의 마음을 저렇게 애잔하게 연주할 수 있을까?


 어머니가 보고 싶다. 바닷가에서 함께 굴을 구워 먹기도 하고 먼 나라에서 딸기며 사과도 함께 따시던 어머니와의 추억이 있다. 나지막이 부르는 자장가처럼 그냥 편안한 나라로 나를 인도해 주시는 그 어머니가 몹시도 그립다.


겨울이다. 이만큼 세상을 살아왔으니 남은 앞날도 대충 짐작도 된다고 하면 교만인가? 만성적인 질병인 교만을 탈피하고자 아마도 나는 걸어온 길을 추억하는 습관이 최근에 생긴 것 같다.

 김기림 시인처럼 파란 하늘빛에 젖어 걸어갔다가도 노을에 함북 젖어 돌아오는 나의 길. 그곳엔 늘 그리운 사람들이 함께 온다.


주말에 겨우 끝낸 소품을 들고 갤러리에 전해 주고 돌아왔다.

퇴임 후 남편이  북한산이 바라다 보이는 곳에서 하루를 시작하고 마감하며 지낸 지 어느덧 1년이 가까워 온다,

건강을 위해. 앉아있는 시간을 줄이고 서서 작업을 한다고 하는 쓸쓸한 말을 들으면서도 난 짠한 마음을 내색하지 않았다.


 지난가을 

친구가 갤러리를 오픈하고 남편에게 전공자가 아닌 분들의 그림도 모아 전시회를 하고 연말에 불우 이웃을 돕는다며 작품을 내보라고 제의를 해왔다.

안 그래도 하루 종일 의자를 지키는 그이가 안쓰러워 시간을 나누어 무엇인가를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차인지라 고마운 마음으로 남편에게 적극적으로 권했다.

겨울이 왔다.

약속한 3편의 작품을 시작도 안 한 그이와는 달리 난 마음이 조급해졌다.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될까 보아 달리는 전철에서도 생각나고 산을 오르다가도 불안했다.

 드디어

어느 주말 그인 물감과 붓을 샀다. 그 후 몇 번 더 부족한  색을 맞추느라 발걸음을 하기도 하고 캔버스도 날랐다.

마침 조간신문에 우리가 사는 곳이 가을 단풍과 함께 큼직하게 소개된 것을 잘라 그이의 눈에 띄도록 의도적으로 놓아두었다.

긴 기다림 끝에 드디어 방문을 닫고 들어가 몇 시간이고 나오지 않을 땐 기대와 호기심으로 들뜨기도 했다.


그이는 나의 초상화를 그리고 싶다고 했다.

사진 속에 웃고 있는  30대인 나의 모습을 그리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생각하는 이미지와 작품이 연결이 안 된다고 고충을 이야기했다.


고치고 지우고 하기를 여러 번하는 사이 마감 날짜를 보내온 친구의 문자를 확인하던 날 난 그이에게 정말 정말 어서 끝내야 한다고 말했다.

전공자도 아니요 그림 그리는 것이 취미는커녕 단 한 자루의 붓만 갖고 있던 사람이니 누구나 이해할 것이고 남편의 그림은 결국 내가 사야 하니  약속 날짜를 지켜서 폐를 끼치지 말자고 수차례 강요 섞인 설득을 하기도 했다.


더 이상 사진 속의 미소를 짓지 못하는 현실의 내가 안타깝기만 한 어느 날. 기대로 들어간 방에서 난 실망만 배가되어 물감 냄새로 어지러운 방안의 문을 활짝 열어 놓고 나왔다. 눈과 코도 입도 없는 그림이 덩그러니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이는 도저히 눈을 살릴 수는 없으니 그냥 얼굴이 없는 채로 작품을 내겠다고 말한다. 후회와 실망의 쓰나미가 몰려와 답답한 채로 며칠을 보냈다.


고민 끝에 동생의 도움으로 전문가의 도움을 받고자 사진과 함께 그림은 화실로 실려 갔고 몇 시간 후에 다시 만난 그림은 더 큰 실망만 주었다. 

화폭엔 곱고 예쁜  동화 속의  여인이 들어앉아 있었다. 아니다. 아니다.


 어렵사이 남편은 드디어 눈과 입에 미소가 어린 작품을 끝냈다. 긴 가을을 지나 겨울에 만난 작품의 제목은 '마이 레디'였다. 그이의 여인이 되는 것은 정말 쉽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귀한 것일까.

그리고 끝이 났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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