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들이기

by 김인영

길들이기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나는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작별을 하며 여우가 가르쳐 주고 간 선물을 기억한다. 제대로 보려면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고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어린 왕자에게 선물로 주고 떠났다.

마감을 앞둔 이들은 마음이 바쁘기 마련이다. 마감 기사를 앞둔 기자들과 늘 원고 약속 날짜가 촉박해야만 시상이 떠오른다는 시인들이 아니어도 어릴 적 나를 책상 앞에 앉게 하던 것은 시험이 코앞으로 다가오던 결승선을 가까이 둔 때였다.

연말이다. 사람들의 발걸음이 바빠지고 거리를 가득 메우는 인파들은 모두 손이 무거워 보인다. 모두들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일까? 어깨가 처지도록 무엇을 가방에 담고 있는 것일까? 그들은 무엇을 기다리는가.

딸아이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다. 난 큰 가방을 갖고 싶다고 했다. 언젠가부터 큰 가방을 들어야 편안하다. 카드며 현금이 든 작은 지갑과 화장품 그리고 펜과 수첩 가끔씩 책 한 두 어 권. 고작 그것이다. 그런데 난 늘 큰 가방을 들고 다닌다. 생각해보니 난 옷도 내 치수보다 한 사이즈 큰 것을 선호한다. 아니다 그것뿐이 아니다. 신발도 직원이 권해주는 것보다 한 사이즈 큰 것을 신곤 한다. 그래야 편하기 때문이다. 식구가 단출해졌다. 하지만 난 한 겨울을 넘기고도 남을 김장을 갖고 있다. 집을 옮기며 작은 평수로 바꾸었다. 당연히 좁아진 부엌에 냉장고를 하나 더 들이기 위해서 많은 구상과 의논을 하고 결국 식탁을 치워 버렸다. 하지만 그 냉장고엔 지인이 보내준 고운 감과 과수원에서 사 온 사과가 빛깔을 잃어가고 있다. 왜 나는 크고 많은 것을 선호하는가? 큰 가방과 구두 속에 나를 넣는가? 왜 큰 옷으로 나를 감추고 숨고 싶어 하는가?

친구가 이해인 수녀님의 시를 읽으라고 보내왔다. 어느 날의 커피에서 시인은 수없이 적힌 친구들의 이름 속에서 갑자기 고독해진 마음을 나눌 친구를 찾지 못해 외로워하는 것을 표현했다. 평범하기만 한 시구가 가슴으로 다가왔다. 나도 외롭다. 이맘때가 되면 늘 외롭다. 하지만 환갑을 넘긴 내게 다가온 연말은 다른 해와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노년의 날들로 걸어간다는 것이 아직도 낯설어 외롭다. 길들어야 할 것이 또 하나 생겼다.

인터넷으로 캐럴을 들었다. 남대문으로 나가 축제의 빛으로 가득 찬 불빛을 보고 돌아왔다. 오래전 숲 속의 집들이 파랗고 붉고 또 하얀빛으로 밤하늘을 수를 놓던 그 밤을 추억했다. 경이로움으로 가슴이 뛰던 그때는 나의 20대였다.

추억만으로 살 수 있다면 나는 무엇을 간직할 것인가? 앞으로 걷는 길에서 내게 꼭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크지도 작지도 않은 내게 꼭 맞는 것. 적당한 양. 넘치는 감사와 기쁨으로 내가 길들여야 할 것은 무엇일까? 잠시 마음을 모은다. 비록 허겁지겁 살아가는 나이지만 지금 이 순간 만 60세의 얼마 남지 않은 날들을 바라본다. 오늘 날씨처럼 뿌옇고 확실한 것은 보이지 않아 모르겠으나 어린 왕자가 선물로 주고 간 마음으로 보는 눈의 시력을 길러보리라.

거리에 캐럴이 사라지고 성탄을 밝히는 불빛이 밝지 않아도 우리의 가슴엔 그래도 기다리는 마음으로 들떠 있지 아니한가?

희망이 온다. 나는 설렌다. 행복이 가까이 다가온다.내가 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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