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을 보내며

by 김인영

헌책을 보내며


장마 비가 아쉬움을 남기며 떠나는 하늘을 바라보는 것은 즐겁다. 그렇게 잔뜩 어두운 아침을 살금살금 고양이처럼 나가서 좌우를 살피고 산책을 하는 날은 주위가 더욱 조용하여 나만의 오롯한 하루를 탐험으로 시작하는 것 같아 때로 신선함을 느끼기도 한다. 낯선 곳에 둥지를 틀고 산지 20년을 넘어가니 어느새 지하철에서 자리 양보하는 마음 고운 청년을 만나는 초로의 나이가 되었다.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치 않고 즐기는 것은 아침산책이다. 지금은 공항으로 가는 길이 난 곳에 유독 강하게 불던 바람을 참 좋아했다. 아 그곳에서 뜨거운 태양과 바람 속에서 익어가던 곡식은 다 어디로 갔을까? 한때 논이고 밭이었던 곳이 지금은 정부 청사와 높은 수많은 아파트 다양한 오락시설 심지어 도심 속 공원도 있다. 왜 우린 그때 손바닥만큼의 땅도 마련을 못했을까? 살면서 미처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 중 하나다. 지금 아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하는 미련을 갖기도 한다. 비록 그 땅 위에 한 평의 건물조차 올리지 못했어도 사라진 들판의 막힘없는 바람의 흐름을 그리워하기 해도 난 여전히 같은 곳에서 새로운 곳을 찾아 나서고 그곳에 기대어 내 삶의 휴식과 여유를 찾는다.

어느 날 인터넷 파도를 타다가 집 근처에 브런치로 식사할 곳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다음 날 곧 내릴 것 같은 비를 예감하며 아침 산책을 끝내고 전 날에 마음먹은 대로 남편에게 브런치를 제안했다. 운동복 차림을 조금 망설이던 그이였지만 우린 만보를 채운다는 심정으로 그곳을 찾았다. 호텔에 투숙하는 분들의 편의를 위한 아침 겸 점심이었지만 일반인에게도 제공되는 주인장의 호의가 고마웠다. 아직 내리지 않은 커피를 기다리며 작지만 아늑한 실내를 돌아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었다. 머리에 터번을 두른 풍채 좋은 흑인 여인은 자기들이 자긍심을 갖고 키워낸 아프리카 커피 자루를 만족한 듯 바라보며 사진 속에서 웃고 있었다. 이곳저곳에 걸려있는 타국의 흔적을 보는 동안 눈을 쫓아 마음의 여행을 하는 것도 즐거움이었다. 내가 그랬듯이 타지에서의 고단하고 달콤한 잠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 내려오기 전 우린 달고 만족한 아침을 끝낼 수 있었다. 우리가 첫 손님인 듯 거스름돈을 미처 준비하지 못했다며 디스카운트를 해주는 직원의 배려에 나중에 다시 들러 챙겨주겠다고 하니 손사래를 치며 웃는다. 돌아오는 길에 계산대 위에 헌책을 구입한다고 써있던 것을 보고 다음에 집에 있는 책을 몇 권 가져다주어야겠다고 남편에게 말하며 동의를 얻었다.

그날은 화요일이었다. 매주 화요일은 글방에서 참 좋은 분들과 나눔을 갖는 기다려지는 날이다. 한 회원이 자신의 모습처럼 고운 글을 들고 왔다. 평소 갖고 싶었던 시집을 인터넷 헌책방에서 구입을 하였는데 노랗게 바랜 책에서 거의 30년 전에 책을 소유했던 이가 친구에게 우정 어린 글을 써놓은 것을 보고 아름다운 여운을 남기는 글을 써왔다. 난 작은 우연에도 감동을 잘하는 편이고 의미를 부여하는 지라 이날 오전에 일어난 헌 책 사건은 내게 꼭 가까운 시일에 책을 들고 다시 아침을 먹으러 그곳에 가서 책을 전해야 될 것만 같았다. 도서관에서 돌아와 책을 살펴보았다. 5권을 내려놓고 보니 고전과 한때 베스트셀러였고 남도의 여행을 안내하는 것이었으며 한국 역사의 아픔을 소설로 다룬 책이었다. 나머지 한 권은 건축의 아름다움을 다룬 디자인에 관한 것이었다. 내가 구입한 것도 있고 타인에게 선물 받은 것들도 있다. 한때는 귀하게 생각하고 고르고 사는 설렘과 받는 기쁨도 있었는데 언젠가부터 책장에서 움직일 줄 모르고 꽂혀 있던 책들이다. 어디 이 다섯 권의 책뿐이겠는가 내게 와 잠시 머물다 외면된 얼마나 많은 것들이 있는가 반성이 되었다. 한동안 외면하던 것을 막상 떠나보내려니 아쉬움과 미련이 남는 것은 또 무슨 조화인가?

시간이 흘렀다. 난 아직 그곳을 찾지 못했다. 그날 아침 커피 농도와 향이 우리에게 딱 맞춤이었다고 늘 말을 하면서도 골라 놓은 5권의 책을 들고 가면 환한 웃음으로 나를 맞을 여인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있다. 내가 그들을 떠나보내기 힘들어서가 아니다. 내가 읽으며 줄 쳐 놓았던 비밀을 들키기 싫어서가 아니다. 나도 30년 전 그녀들이 우정을 나누며 삶의 힘을 실어 주었던 따뜻한 한 마디를 책의 앞장에 멋지게 써놓고 여행을 보내고 싶은데 그 첫 구절을 아직 잡지 못해서 이다. 오늘도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다. 한 방울 한 방울씩 가을을 초청하고 있다. 아마도 오늘 오후쯤 내게 불현듯 새 한 마리 날아와 첫사랑을 기억하게 해 주려는가. 한 소절. 삶의 열정과 인내와 아름다운 삶의 비밀을 열 수 있는 그 귀한 한 뿌리를 남겨 주겠는가? 이젠 보낼 준비가 된 책이 다른 이에게 행복을 주게 될 그 시간이다. 나는 이제 떠나 보낼 준비가 된 책의 앞장에 이렇게 써볼까? 하루 열 사람을 만나고 100자를 쓰고 1000 자를 읽으며 하루 10,000보를 걸으면 이보다 더 현명한 노년은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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