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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안 Mar 05. 2023

나는 꿈을 품을 여유도 없었습니다.

어린 시절엔 하고픈게 있으면 커서 무엇이든 될 것만 같았죠.


힘든 상황 속에서도 나는 하고 싶은 것은 있었습니다.

중학교를 입학하고 방과 후 과목을 정할 즘.. 신청서에 내 눈에 보인 과목은 '가야금반'이었습니다.

방과 후 수강은 거의 모든 과목들을 무료로 수강이 가능했지만,

악기를 배워야 하는 예체능 과목은 악기를 사비로 구매하여 수업 전까지 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그 당시 연습용 악기를 30만 원으로 공동구매로 가능하고 부모님과 상의 후 신청서와 구매동의서, 악기값을 

수업 2주 전까지 미리 납부하여야 수업신청이 가능했었습니다.


넉넉지 않은 우리 형편에 악기구매비용 30만 원은 많은 고민을 하여야 할 금액이었지요..


일주일 정도 부모님을 설득할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 옛날 새 학교 전학을 많이 다닌 터에 적응하기 쉽지 않았던 기억이 엄마에게는 남아있었는지,

엄마는 신청하라는 말씀과 납부기간까지 돈을 마련해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학교에 재미를 붙이라는 뜻이 계셨었었죠..


그렇게 중학교 3년간 가야금병창반에 들어

대회도 나가보고 수상도 해보고.. 그러면서 차츰 나도 잘하는 것이 있구나 자신감도 찾게 되니,

예고진학을 욕심내며 나의 미래를 상상해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없는 살림에 예고는.... 정말 저의 욕심이었습니다.

그렇게 출중한 실력도 되지 않았지만 3학년 1년간 개인레슨을 받으면 충분히 진학이 가능하리라 생각이 들었습니다. 때를 봐서 부모님과 상의를 해봐야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고입준비 개인레슨비용은 만만치 않은 금액이었고. 운이 좋게 예고에 진학을 하여도 학업을 이어나가기엔 우리 형편으론 불가한 상황이었습니다. 그 무렵 4살 많은 큰언니는 대학생입니다. 

부모님과 상의하며 어느 대학교를 가야 우리 아이에게 좋은지 보다, 등록금은 얼마가 드는지를 더 걱정하시는 나날이 많으셨습니다. 매일같이 돈 걱정을 하시는 부모님께 나의 예고진학계획은 언감생심이었습니다.

말도 꺼내기 힘든 현실이었습니다.


공부에 특기가 없는 나는 결국 실업고를 진학했습니다. 혹여 내가 고등학교를 다니며 시간을 버는 동안 우리의 살림이 나아져 예대를 갈 수 있진 않을까란 헛된 꿈을 꾸긴 했지만, 그건 정말 꿈이었습니다.

우리 부모님은 그 어느 부모님들보다 정말 열심히 사셨다고 자부합니다. 이른 새벽에 나가 늦은 밤까지 가족들을 위해 헌신을 하신 것을 저는 누구보다 잘 압니다. 철이 너무도 없던 나는 그런 부모님을 보며 열심히 살아도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현실이, 이 세상에서는 열심히 살아야 될 이유를 찾지 못했습니다. 저만 그런 어이없는 핑계를 대며 학업도 게을리하고 그런 의미 없는 귀한 시간을 허비해 버렸습니다. 내 삶이 다른 삶이 될 수 있게 하는 것은 나의 노력으로 이뤄낼 수 있다는 사실을 전 망각하고 있었습니다. 나와는 다르게 우리 언니들은 공부를 곧잘 했습니다. 전교에서 등수를 매길 만큼 상위권에 있었습니다. 공부를 잘한다고 무조건 인생이 탄탄대로가 되기엔 세상은 그렇게 후하지 않습니다. 그런 재능을 키워줄 부모님의 재력도 이 세상에선 꼭 필요로 합니다. 공부를 제일 잘하는 우리 둘째 언니도 본인의 꿈과는 전혀 상관없는 대학교에 진학했습니다.

이유는 단순히 전액장학금을 받고 학교를 졸업한 뒤 취업을 하는 것에만 포커스가 맞춰졌습니다.


우리 자매들은 분명하고자 하는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현실에 타격으로 그 누구도 그 꿈을 향해 감히 나아갈 생각도 못했을 것입니다.

긴 소송에 지친 부모님께, 아침저녁 주말도 없이 일만 하시는 부모님께, 또 그렇게 열심히 번 돈은 또다시 외가댁 합의금으로 먼지처럼 사라지는 현실에.. 우리의 꿈을 말씀드린다는 것은 부모님께 근심을 더 얹는 일이라는 걸 알기에.. 그래서 그랬다고 그 누구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지만 아마 우리는 다들 같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시키지 않았지만 각자의 꿈을 포기하는 양보를 서로서로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 나의 진로를 결정할 시기가 왔습니다. 대학교 진학을 할 것인지. 취업의 길을 선택할 것인지..

하루는 큰언니와 상의를 했습니다. 나는 취업으로 길을 정한 뒤였지만, 큰언니는 내가 대학에 가길 원했었나 봅니다.


"그래도.. 전문대라도 가는 게 좋지 않겠어?"

"글쎄.. 난 하고 싶은 것도 딱히 없는데, 대학졸업장을 몇백만 원씩 주고 따는 게 필요한 일일까?

그냥 취업해서 돈 벌고 지내는 게 더 마음이 편할 것 같아~ 엄마, 아빠도 덜 힘들고.."


확고한 나의 대답에 큰언니는 더 이상의 이야기가 의미 없음을 알고는 나의 진로는 

그것으로 확정이 되었습니다.


부모님의 돈 걱정은 제일 어린 제가 가장 많이 지켜봐 왔습니다.

그래서인지 부모님께 용돈을 받기도 죄스러워. 전 고등학교 때 빵집에서 알바를 하면서 직접 용돈을 벌었습니다. 그 옛날 시급은 천 몇백 원 남짓이었고. 평일은 하교 후 저녁 6시부터 10까지, 주말은 풀근무를 하고 한 달 꼬박 일을 해서 받는 돈은 12~13만 원 정도의 돈입니다. 그 시절 학교 앞 분식집의 컵떡볶이(종이컵에 담아 파는 소량)가 500 원하던 때이니. 나에겐 큰돈이었습니다. 고깃집 알바도 해보았지만, 전 빵집에서 알바를 1년 넘게 하였습니다. 간혹 시간이 늦어 지각을 할 때도 있어 사장님께 꾸중을 듣기도 했지만 꽤 좋은 알바자리였습니다.

사장님의 자녀분은 우리 언니들과 나이가 같았는데.. 큰언니는 음악을 전공하며 예대를 다니고 있었고,

둘째 언니는 미술을 전공하며 예고를 다니고 있었습니다. 내가 꿈꾸던 삶을 그들은 누리며 살고 있었습니다.

좋은 브랜드의 옷을 입고 깔끔하고 예쁘게 하고 다니는 언니들을 보면..

같은 세상에 살고 잇지만 절대 섞이기 힘든 이질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예고나 예대는 저런 사람들이 다니는 곳이구나.. 내가 발을 들이밀 수도 없는 곳이구나를 느끼기도 했습니다. 아르바이트비 12만 원이 큰돈이다 만족하며 알바로 내용돈을 버는 나는 감히 갈 수 없는 그런 곳이구나..




시간이 훨씬 지난 지금 그때의 나를 생각해 보면.. 고단했지만 정말 착한 소녀였던 것 같습니다.

주변에도 어려운 형편에 알바로 용돈을 버는 어린 친구들을 보면 옛날의 내가 떠오릅니다.

그런 친구들이 너무 대견하고 칭찬하고 싶습니다. 그 칭찬은 옛날의 나에게도 내가 해주는 칭찬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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