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선정 작품)
미안합니다, 더는 찾을 수가 없군요.
그 집에는 유령이 살고
하얗게 질린 기억만이 살아 있고
그 중에는 초록색도
초록 풀이 자라나던 얼굴도
초록 무덤으로 던져지던 반지도 없고
노란색도
노란 반지를 닮은 뱀도
뱀을 닮은 달맞이꽃도
뱀의 허물을 닮은 보름달도 없어
미안합니다,
그 중에는
이상한 것도
이상할 것도 없는 슬픔도
더 이상 슬플 것도 없는 웃음도 없어
나는 무표정인 채로 깨어나지만,
그 중에는
암막커튼 뒤에서 깨지던 거울도
깨진 거울 뒤에서 기다리던 겨울도
겨울 뒤에나 나타나던.......
미안합니다,
레이스를 단 햇살과 코바늘로 뜬 거미줄도 없어
나는 검은 색의 감정만을
학습하고,
그 중에는 붉은 색과
붉은 날씨와 어울리는 바다표범과
붉은 노을에 빠진 표범과 선원들과
선원들의 모자부터 잡아먹은 바다가 있고
바닥까지 집어삼킨 다락같은 바다가 있고
미안합니다, 더 이상은 추억할 수 없어
리셋하겠습니다
처음부터
다시 질문을 해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