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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각을 꿈꾸며

기억을 요리하는 랩소디

"이봐. 좀 깨우지 그랬어?"

"뭐?"

"언제 깨웠다고 그래."

"알았어."

나는 오늘도 또 지각입니다.

번도 빠지지 않고 개근상을 받았던 내게 지각은 달콤한 마약이었죠.

벌점으로 메겨지는 지각 세 번은 결석이라는 페널티를 교묘하게 피해 갔습니다.

"뭐?"

"희한하지?"

"그래. 학교 다닐 때는 말이야."

"응? 얼른 가라고?"

"괜찮아. 과장님을 매수해 놨거든."

나는 오늘 과장님과 아주 근사한 싸롱에서 술을 하기로 했거든요.

늘 지각을 하지만, 어지간히 결근하지 않는 내 모습에 과장님도 감복한 모양입니다.

공부해야 돼?(그림 윤기경 )

"응?"

"술 사주니까 그런 거라고?"

"무슨 우리 남자 세계를 모독하는 거야?"

"뭐 그만하고 출근하라고?"

"안돼."

"지각하려면 아직 충분한 시간이 남았거든."

"지각은 오전 10시든 오후 5시든 마찬가지야."

나는 말입니다.

지각보다 더 나쁜 건 공부도 하지 않고, 일도 하지 않는 거라고 보거든요.

물론, 이 자리에서 몰래 말하는 거지만, 저는 58명 중에 57등을 한 적도 있다 이겁니다.

이런 꼴찌의 다이내믹도 느꼈습니다.

"응 엄마, 그래도 꼴찌는 아니잖아요."

하지만 제 뒤에 있던 꼴찌는 학교에 한 번도 나와본 적 없는 아이스하키 선수였어요.

오늘도 술 마실 거예요. 내일 지각하는 건 술 때문이 아닙니다.

지각을 지키기 위해서예요.

솔직히 열심히 출근하지만, 저쪽 여의도에 있는 국회의사당은 개점휴업이잖습니까. 그에 비하면 전 훌륭한 사람입니다.

"뭐? 알았어."

"출근할게. 아니 지각할게."

또 지각이래(그림 윤기경)

"응?"

"선생님이 전화하셨다고?"

"에이 무슨 소리야? 그분 돌아가신 지가 언젠데."

"정말? 정말?"

와이프 꿈속에 돌아가신 국민학교 선생님께서 출현하셨나 봅니다.

선생님은 학교 다닐 때도 그러더니, 직장에서 지각이냐며, 와이프에게 "빨리 출근시켜요."라고 호통을 치셨답니다.

{하늘을 보고) 네네 다녀오겠습니다.

근데 웬만하면 제 꿈에도 들어오셔서 한 잔 하시죠.

지각보다 더 무서운 건 일을 하지 않는 거 아닙니까? 그 식충들에 대해 고견의 말씀을 드려 볼게요. 아무튼 건강하시고 다녀와서 뵙겠습니다.

"다녀오겠습니다."

(하늘을 향해 손을 흔들며 객석으로 뛰어간다)


- 2 -


2023.12.16(토) 무대에 올랐습니다.

모노극 '마이 스토리'입니다.

저의 챕터 제목은 역시 '지각'입니다.


지각을 꿈꾸며 / 윤기경

"앗!""또 지각이군요."

망설임(사진 윤기경)

저는 참 술을 좋아합니다.

지난밤에도 술을 많이 마셨나 봐요.

세상이 둥글둥글 날 중심으로 돌고 있더라고요.

아무튼 저는 어떻게 들어왔는지 기억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꼬불쳐 논 돈이 하나도 없습니다.

와이프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당신 왜 나한테 오만 원짜리 수십 장 준거야?" 그러더군요.

저는 정말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건 분명히 팁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와이프에겐 늘 당신이 고마워서 못 사 입으라며 준 거라고 했죠.

난 술을 마시기만 하면, 아무에게나 돈을 주는 좋은 습관이 있습니다.

어릴 때 술 취하신 아버지 옆에서 큰 용돈을 받을 수 있었던 걸 보면 집안 내력인가 봅니다.

그래서 가끔 술에 취해 빈털터리가 돼서 동대문에서 이곳까지 걸어오기도 합니다.

그런 날은 아마 어떤 길거리 걸인의 동전그릇에 수북한 지폐를 건넸을 겁니다.

결심했어(사진 윤기경)

"아무튼 저는 한 푼의 돈도 없이 지각을 하게 된 거 아니겠어요?"

와이프는 게을러서 번번이 저를 깨우지 않아요.

그러니까 제가 지각을 하게 되는 것도 분명 와이프 탓인 겁니다.

하지만, 그게 타의든 자의든 지각이란 거 하기 시작하면 중독이더라고요. 나쁜 것은 맞는 거 같은데 말입니다.

그래도 30년을 한 번도 결근하지 않은 걸 보면 저는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긴 합니다.

"응 알았어. 일어날 거야."

와이프는 깨우지도 않아 놓고 얼른 출근하라고 합니다.

어차피 10분 늦으나 100분 늦으나 같은 건데 말입니다.

사실 멀쩡하게 출근해 놓고 빈둥빈둥 일 않고 노는 사람도 많거든요.

그에 비하면 저는 출근은 늦어도 일은 열심히 하는 훌륭한 지각생입니다.

정지된 시간(그림 윤기경)

"알았어 알았어."

또 와이프가 채근합니다.


"어 그래. 박주임 어디야

아 나 지금 차 시동이 안 걸려서 말이야.

뭐라고?

오늘 일요일이라고?

응? 아냐 그냥 전화해 봤어.

오늘은 와이프한테 제대로 골탕을 먹은 것 같습니다.

"여보! 사랑해'

저는 오늘 지각을 안 해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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