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좀 다르다. 뭐 비슷하긴 하지만, 아이들에게서 가지가지를 배울 수 있는 선생님이 되고 싶은 거다.
무슨 뜻일까? 하고 묻겠지 싶다.
아이들 연극 포스터(출처 하늘초)
첫째, 선생님이 된다는 건 먼저 내가 완벽해야 될지 모른다. 정말 나는 완벽할까? 나는 정말 모든 걸 알고 있는가? 내 인성은 완벽한가? 아니 이런 뭐 수많은 자책성 질문에 시달릴 것이다.
국민학교 5학년 시절, 기진도 선생님이란 분이 계셨다. 어찌나 완벽하셨던지 지금 생각해 봐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는 국어며 산수며 그림이며 음악, 사회과목 등등 모든 거에 일등으로 보였다. 하나, 가장 뛰어나 보였던 건 선생님의 인자하고 부지런한 인성이었다. 그 아름다운 인성으로도 그는 완벽했던 거다. 과연 난 그럴 수 있을까?
두 번째 선생님의 되려면 아이들의 마음을 섭렵해야 한다. 아이들이 뭘 원하는지 아는가? 아이들이 잘못했을 때 어떤 기준으로 설득할 것인가? 아이에게 뭘 가르칠 것인가?
정작 나는 아이를 가르칠 수 있을까? 내가 아이들보다 뭘 잘한다고 생각하는가? 엄청난 질문을 내게 던져 보아야 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내가 아이들과 흥미 있게 대화를 할 수 있느냐이다. 당연히 나는 더 배워야 했다. 아마도 백 살이 다 되어서 아이들의 다정한 선생님이 될 수 있다면 다행이다.
셋째는 나는 과연 누구를 가르칠 자격이 있을까? 내 언행이 바른가? 나는 뭘 제대로 하는가? 교단 위에 서야만 선생님인가?
과연 아이들 앞에 서야 선생님인가?
아이들과 함께 놀 줄 아는 것도 가르침이다.
그들과 거침없이 대화하는 것도 가르침이다. 보안관 아저씨는 물론 청소하는 아주머니에게 깍듯하고 인사하는 것도 아이들에게 좋은 가르침이다.
쥐선생도 알아야 해먹지(그림 윤기경)
요즘 나는 어떤 플랫폼에서든 다른 사람들의 주장이나 의견에 빠짐없이 내 의견을 달기로 했다. 이런 행위는 내가 선생님이 될 수 있는 기반이 될 것이다.
더 중요한 건 플랫폼뿐만 아니라 모든 대화는 서로서로가 아름다운 선생님이 될 수 있다는 결론에 다다른 것이다.
백 살이 돼서 선생님이 된다면 아이들에게 이러이러한 이야기를 말하고 싶다. 우선 하고 싶은 말은 이렇다.
△ 먼저 너희들은 다른 아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라고.
△ 네 주장에 앞서 다른 아이의 주장을 공감하고 이해하도록 하라고.
△ 그리고 선생님은 너희들보다 더 착하게 바르게 살 테니, 보고 따라 해 줘.
△ 많이 도와줘.
오늘은 이런 약속을 한다.
"내가 선생님이 되려면 스스로의 낮은 자세를 견지하면서 남의 주장과 글에도 귀를 기울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