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의 침묵 해석
님의 침묵
한용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야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참어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든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야서 한숨의 미풍에 날어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러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골에 눈 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는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 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 전문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용운의 님의 침묵 역시 처참한 한국 현대시 100년의 오독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이 시의 “님”을 조국이니, 부처니, 진리니, 연인이니 하면서 100년 동안 망상을 펼쳐서 오독 해 왔다.
그러나 한용운은 시 안에서 “님”이 누구인지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이를 100년 동안 읽어내지 못한 한국 현대시 해석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님”을 조국이니, 부처니, 진리라고 하는 것은 “님”이 관념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 한용운이 표현하는 죽음은 구체적인 사람의 죽음이다. 이를 은유로도 해석할 수 없는 이유는 “새로운 슬픔”과 “새 희망”이라는 진술 때문이다.
님이 조국이거나 부처이거나 진리일 경우 논리적으로 “님”의 죽음을 새로운 슬픔이라고 말할 수 없다. “새로운 슬픔”이라는 진술은 님이 죽기 전에 이미 슬픔이 있었는데 님이 죽으면서 새로운 슬픔으로 더해졌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또한 “님”의 죽음으로 “새 희망”이라는 진술 역시 님이 죽은 이후 새 희망을 찾겠다는 것이다. 이는 조국이 죽었으니, 부처가 죽었으니, 진리가 죽었으니, 새 희망을 찾겠다는 의미이다. 논리 모순다. 더구나 이어지는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않았습니다”라고 절규하는 진술과 배치되기 때문이다. “님”을 연인으로 해석해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님”을 조국이니, 부처니, 진리니, 연인이라고 하는 것은 시인과 시를 모독하는 것이고 한용운을 정신이상자라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해석이다. 천년만년 이렇게 해석하고 있을 것인가?
한용운은 “님”이 조국도 부처도 진리도 연인도 아니라는 것을 명백하게 시의 논리구조로 알려주고 있다. “님의 침묵”의 논리구조에 맞는 “님”은 단 하나다. 한용운이 그의 죽음을 경험했던 왕이다.
“님의 침묵”의 논리구조는 김소월의 “초혼”과 너무나 비슷하다. 왜 그럴까?
한용운은 몰락한 양반 사대부 가문 출신으로 6세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고, 9세에 문리를 통달하여 신동이라 칭찬이 자자했다고 한다. 이후 서당에서 학동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따라서 한용운은 27세 불교에 귀의하기 전까지 유학자로 살았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승려 이전에 유학자였던 한용운은 충효와 불사이군의 유교적 국가관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왕이 국가이고, 왕이 주권이고, 왕이 민족을 대표한다는 김소월의 유교적 국가관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이 시에서 한용운이 말하는 “사랑”은 김소월이 초혼에서 말하는 “사랑”과 같다. 즉 왕에 대한 사랑을 의미한다. 따라서 “님의 침묵”의 “님”은 왕이고 그 왕은 1919년 1월 제국주의 일본에 독살당해 죽은 고종이다.
따라서 한용운의 “님의 침묵”과 김소월의 “초혼”은 고종의 죽음이라는 충격적이고 절망적인 사건에 대한 시대 인식이고 격렬한 몸부림의 시다. 두 시인의 세계관과 시작법의 차이가 있을 뿐, 같은 시대를 살았던 진정한 시인의 모습이기도 하다.
논리구조와 그 논리구조 위에 얹혀있는 서정의 흐름, 특징적인 언어 사용법과 단어들을 살펴보자.
1. 전체적인 논리구조는 “님”은 죽었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2. 그 위에 얹혀있는 서정의 흐름은 “님”이 죽어 새로운 슬픔이 터지지만, 그 슬픔을 오히려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이붓겠다. 즉 님의 죽음이라는 슬픔에 빠져 있지 않고, 오히려 님을 다시 만날 수 있는 새 희망을 향해 나아가겠다는 결심을 보여준다.
3. 특징적인 문장과 단어들을 살펴보면
<1> 명사 “참어”다. 원본인 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에 명확하게 “참어”라고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은 부사어인 “차마”로 공식화되어 뒤바뀌어있다. 어떤 이유로 명사 “참어”가 부사 “차마”로 바뀌었는지 참담할 뿐이다.
명사“참어”의 사전적 의미는 ‘길흉화복의 예언’이다. 앞뒤 문장의 의미와 잘 호응한다. 그러나 “차마”는 부정의 의미와 호응하는 부사이다. 앞뒤 문장과 호응조차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 이면에 어떤 의미가 있지도 않다. 이것은 사고이고 비극이다. 누가 어떤 이유로 명사 “참어”를 부사 “차마”로 바꿨는가?
<2> “옛 맹서”
<3>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
<4> “뒷걸음쳐서”
<5>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6> “새로운 슬픔”
<7> “새 희망”
<8>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이 단어들과 문장이 시의 의미를 드러내는 논리구조의 핵심 구조물이다. 이것을 기억하면서 시를 해석해야 한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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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님이 죽었다는 의미이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야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참어 떨치고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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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죽으면 상여에 싣고 무덤을 향해 가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이는 죽은 “님”이 사람이라는 설명이기도 하다. 여기서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은 김소월의 “초혼” 중에 “해는 서산마루에 걸리었다”와 같은 의미이다.
고종의 죽음으로 조선 왕조가 멸망으로 저물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또한 희망을 깨치고 절망의 죽음으로 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참어 떨치고 갔습니다”
“참어”의 사전적 의미는 ‘길흉화복의 예언’이다. 고종의 죽음은 강제한일합방 이후 고종이 지속적으로 조선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 일본에 저항했던 모든 일들 즉 ‘길흉화복의 예언’을 떨쳐버리고 가버린 허무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는 김소월 “초혼”의 “/심중에 남아있는 말 한마디는 /끝끝내 하지 못하였구나/”와 같은 의미이기도 하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든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야서 한숨의 미풍에 날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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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맹서”는 충효와 불사이군의 왕과 신하의 유교적 맹서, 왕과 백성의 맹서가 고종의 죽음으로 티끌이 되어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다는 것이다. “한숨의 미풍”이라는 진술로 고종의 죽음에 대한 허무와 탄식을 드러낸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러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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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키스를 왜 날카롭다고 추억하는가? 앞서 왕과 신하, 왕과 백성의 유교적 맹서 너머 과거에 이미 왕과 내가 하나가 되는 날카로운 사건이 있었다는 의미이다. 그 사건 때문에 “내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아졌다. 즉 왕과 신하 또는 백성인 내가 하나(첫 키스)가 되어야 하는 사건이 있었다는 것이고 이는 조선의 주권 상실이다. 조선의 주권을 회복하기 위해 왕과 신하, 백성이 하나가 되어야 했다는 의미이다. “첫”은 조선 왕조 역사에 주권 상실은 처음 생긴 사건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따라서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강제한일합방을 의미한다. 이것이 첫 번째 슬픔이다.
그런데 함께 주권 회복을 해야 할 왕이 주권 회복을 이루지 못하고 신하 또는 백성만 남겨두고 죽었다. 그래서 “뒷걸음쳐서 사러졌습니다”라고 진술한다. 허무하게 죽은 왕 고종에 대한 한탄이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골에 눈 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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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한일합방 이후 지속적으로 제국주의 일본에 저항하면서 주권 회복을 위해 애쓰던 고종에게 아름답고 순결한 충효와 불사이군의 유교적 신하와 백성으로서 사랑을 느꼈음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주권 회복의 희망을 품었었다는 고백이다. 이것이 첫 번째 희망이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는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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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라는 진술로 한용운은 고종의 죽음이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라는 진술로 고종의 죽음이 두 번째 슬픔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하고 있다. 첫 번째 강제한일합방에 이어서 제국주의 일본에 독살당해 죽은 고종의 죽음은 또 한 번의 슬픔, 즉 “새로운 슬픔”으로 더해져 가슴이 터진다고 통곡한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 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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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이 죽었다고 그 슬픔 때문에 조선의 주권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깨달음이다. 고종은 죽었지만, 조선의 주권마저 죽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왕에 대한 사랑 즉 조선의 주권에 대한 사랑을 깨치는 것이다. 오히려 고종의 죽음이라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어야 한다는 외침이다. 이것이 3.1운동이 일어난 이유 중에 하나고 조선의 독립에 대한 희망이다. 조선의 주권을 찾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두 번째 희망인, “새 희망”이다.
이 부분이 김소월과 갈라지는 지점이다. “초혼”에서 망부석이 되어 조선의 주권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제국주의 일본 식민지배 노예로 살지 않겠다고 통곡하던 김소월과 달리 한용운은 주권을 되찾는 행동으로 나아갈 것임을 소리치고 있다. 독립투사다운 결기이다.
“우리는 만날 때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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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주권을 되찾을 수 있다는 한용운의 확신을 드러내는 진술이다. 특히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라는 진술로 행동하는 독립투사의 능동적인 세계관을 보여준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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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주권을 잃은, 멈출 수 없이 원통하고 슬픈 마음을 한용운은 가슴 속으로 삼키면서 “사랑의 노래”라고 진술한다. 그가 승려임을 되새기게 하는 진술이다. 그러나 11개의 쉼표를 찍어 시가 상여 앞소리의 통곡으로 들리게 하는 장치를 만들어 놓았다. 그 슬픔의 깊이가 김소월 “초혼”의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와 다르지 않다.
고종과 조선의 주권을 향한 사랑의 노래가 죽어 침묵하는 고종과 조선의 주권을 휩싸고 돈다는 마지막 진술에서, 승려이면서 독립투사였던 시인 한용운의 마음의 통곡 소리가 10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들려온다.
한국 현대시 100년의 오독이여! “님의 침묵”을 휘감고 도는 한용운의 마음의 통곡 소리가 들리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