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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혜향 Oct 29. 2023

씨드뱅크

쇄골이 만져졌는데

목백일홍이 씨껍질을 벗고 있어요     


내 상자엔 싹트지 못한 유전자가 가득하고요

나만 열고 닫는 금고예요

각 장마다 제목이 붙어있는 나의 씨드

한 장 한 장 저축하듯 늘어나요

어머니가 남긴 목백일홍은 가장 슬픈 씨드예요     


책꽂이엔 나만 보는 책이 빼곡해서 둘 데가 없어요

이 책들도 나의 재산이니 은행이라고 부를까요

나 말곤 아무도 찾지 않으니 문은 열어둘게요     


나는 날마다 동쪽에 씨를 뿌려요

어둠에 갇혀 멈춰버린 것도 많아요

꽃이 필 때까지 얼마의 생애가 걸릴지 모르지만

춥고 어두운 방의 몸살을 견뎌야 해요     


감각을 잃어버리면 복원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려

휴면에 빠질 땐 촉을 깨워요     


잘 여문 것에도 슬픔이 들어 있어요 

꿈이 단단하다고 속까지 강하지는 않지만

꽃은 밝으니까

우울하거나 슬픈 사람들이 꽃의 페이지를 열어봤으면 해요

꽃에서 그 빛을 쬘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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