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치와 배려가 없는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 가끔 주변 지인들을 통해 듣는 나의 평판은 나쁘진 않은 편이지만, 과연 내가 좋은 사람일까. 나는 항상 주변 사람들을 속이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곤 한다. 그들이 생각하는 것에 비해 나는 참 보잘것없는 사람인데. 그저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허풍을 치는 것뿐이다. 좋은 사람인 척. 그렇게 되고 싶다는 바람으로 나는 사람들을 상대한다. 아직 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생각이 깊다, 배려 깊다, 어른스럽다. 등 고맙게도 다양한 표현으로 나를 칭찬해주지만, 모두 내가 그냥 되고 싶은 모습의 나열이자 단어들이자 바람이다. 나는 그냥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 좋은 사람은 아니다.
좋은 사람에 대해, 좋은 어른에 대해 한때는 거창하게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다름을 인정하는 사람. 그리고 약자의 편에 설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물론 지금도 변함은 없다. 하지만 이뤄야 할 것과 이뤄낸 것은 다르다. 이것들은 내가 평생에 걸쳐 이뤄야 할 것이다. 아마 완벽히 이뤄내진 못할 것이다. 다만 백 퍼센트 그렇게 되기 위하여 노력해서 99% 정도라도 가까워지면 행복할 것이다. 온전하게 좋은 사람이라는 게 과연 존재할까?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우리가 좋은 사람이라고 인정할만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미담이 넘치는 연예인, 배울 점이 많은 사수, 정 많은 친구. 그들도 나처럼 앞과 뒤가 다른지까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평판을 얻는 것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눈치와 배려. 눈치는 남의 마음을 그때그때 상황으로 미루어 알아내는 것이며 배려는 도와주거나 보살펴 주려고 마음을 씀이라는 뜻이다. 서로 상호 보완하는 격이다. 눈치가 있어야 배려도 가능하며 배려도 눈치껏 써야 한다. 나는 최소한 눈치와 배려가 있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고 정하였다. 물론 이렇게 생각하게 된 계기가 있다.
나는 친척들과 친하지 않다. 외가든 친가든 나에겐 둘 다 그냥 지나가는 동네 아저씨, 아줌마만도 못하다. 아무리 그래도 피가 섞인 친척들이 도움을 준다는 말이 어릴 때부터 가장 이해 가지 않았다. 당장에 서울 명동 한복판에서 나를 세워 두고 내가 그들 곁을 지나가도 나에게 알은체하지 못할 것이다. 그 정도로 나에겐 멀디먼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공통점은 눈치와 배려가 없다는 점이다.
단순하게 성적은 좋으니? 결혼은 언제 할 거니? 와 같은 기본으로 출력되는 눈치 없는 질문들을 뛰어넘어서 그냥 눈치와 배려가 결여된 사람. 이란 표현도 쓰기 싫다. 인간들이다. 인류가 진화한 이래 우리는 '사회화'라는 과정을 배우지 않는가? 그러나 나는 그들을 보며 때때로 사회화가 진행되지 않은 건 아닌가. 하고 의구심을 갖는다. 그리고 제발 그들의 DNA가 남아 있지 않기를 빈다. 방탄소년단이 말한 우리 만남은 수학의 공식과 종교의 율법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가족으로 의도치 않게 묶여있어서 그렇지 사회에서 만났으면 나는 필연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이 만남을 악연으로 생각하고 넘겨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신은 때때로 모자란 건지 끊어내고 싶은 인연들을 마음대로 가족의 구성원으로 묶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설이니 추석이니 명절 때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마음껏 내 영역을 침범해 버리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더더욱 신을 믿지 않게 되는 것이다. 신이 있다면 이런 무식한 사람들을 내 가족으로 묶지 않았을 텐데. 도저히 엮이기도 싫은 사람과 피로 엮여 때에 따라 한 번씩 봐야 하는 고역을 신은 과연 알까. 혼자 느끼기 싫은 고통인가.
어릴 때부터 천식을 알았던 나는 호흡기 신세까지 질 정도로 그 증세가 심각하다고 앞서 말한 적 있다. 그러니 얼마나 빼빼 말랐겠는가. 나는 또래의 아이들보다 한참은 말랐었다. 그게 그렇게도 불만이었는지 친가에만 가면 작은엄마는 뱁새눈을 뜨고는 옆에서 계속 저렇게 깨작깨작 먹으니까 밥맛 떨어진다. 왜 이렇게 볼품없이 말랐냐며 타박하곤 했다. 엄마가 애가 아파서 잘 못 먹어요. 많이 먹고 있는 거예요 해도 그녀의 타박은 멈추지 않았다. 눈칫밥을 먹던 나는 체하기 일쑤였다. 나는 그래서 친가 쪽에 가는 걸 어릴 때부터 꺼렸다. 그리고 고모는 또 어떠했는가. 엄마의 장례식장에 와서 울고 있는 나에게 아주 끔찍한 명대사를 날리신 분이다. '얘 너무 울 지마, 너네보다 아빠가 더 불쌍하지 솔직히. 이제 아빠 나이 한창인데 부인이 없어졌는데 얼마나 외롭겠니? 너네야 홀랑 시집가버리면 그만이잖아?'
설사 그렇더라도 사람이 참 눈치가 없다. 고모는 정말 알 수가 없는 사람이다. 그녀 역시 어릴 때부터 눈치 없는 발언을 해서 놀랍지도 않았다. 고모는 아름다움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문제는 본인이나 신경 쓸 것이지 항상 타인에게 외모 지적을 한다는 것이다. 아마 내면의 아름다움은 하나도 가꾸지 않는 사람이 틀림없다. 어쩌다 명절에 만나면 살이 쪘느니 마느니 너무 관리를 안 하는 거 아니냐는 둥 성형수술을 할 생각 없냐는 둥. 하지만 그녀는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원래 때린 사람은 기억 못 하는 법이니까. 이렇게 생각 없이 말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존재하는지 그저 의문일 뿐이다. 그러면서 신을 믿는 고모가 과연 축복을 받으며 살아갈 수 있을까? 의문형이다 그저. 나는 고모의 안녕을 빈다.
외가는 또 어떠한가? 엄마의 가족이 보통 친하다고 말을 하지 않나? 그렇지만 예외는 항상 있는 법이다. 특히 작은 외숙모는 내 기준 눈치 없음 랭킹 1위를 차지하고 있다. 물론 그녀에게 말하진 않았지만. 그녀는 항상 말주변이 없다. 말주변이 없으면 말을 안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왜 그런 말이 있지 않나. 우리가 말을 할 때는 침묵보다 나은 것이어야 한다. 작은 외숙모의 말은 항상 침묵보다 구리다. 구리다는 표현을 쓰는 게 싫지만 구리다는 표현만큼 찰떡인 게 없어서 사용하니 양해를 부탁한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 이모의 딸이 결혼했었는데, 결혼식이 끝나고 나서 기차역까지 외숙모의 차를 얻어 타고 돌아갔었다. 그때 대뜸 엄마가 몇 살 때 돌아가셨지? 물어서 몇 살이라고 말씀드렸더니, 내가 그때 너희 엄마 나이랑 똑같다 벌써. 진짜 건강관리를 잘해야 해 너무 일찍 돌아가셨어. 하기에 어쩐지 울적해졌다. 그러나 외숙모는 여기서 멈출 사람이 아니다. 역시 명대사를 날렸다. 너희 엄마도 그니까 너무 안일했던 거지. 너무 밖으로 돌아다니는 남자를 만나면 안 돼. 그러면 바람을 피워 너희 아빠처럼. 너도 나중에 남자 생기면 조심해야 해. 외삼촌한테 검사 맡던가.
외삼촌한테 검사 맡을 바에 차라리 죽을 란다.라고 생각했다.
역까지 가는 길이 고역이었다.
사람들은 때때로 너무 무례하다. 그게 그 사람의 무지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면 너무 무서워지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알고 그러진 않을 것이다. 정말 악의 없는 말들이 상대에게 비수가 되어 꽂힌다는 걸 그들은 모를 것이다. 마치 어린아이와 같은 천진한 악의. 나는 그것을 항상 경계한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 곁에서 한 발짝 떨어져서 항상 체크하곤 한다. 내가 과연 천진한 악의를 가진 적이 없었나. 좀 더 병적으로, 강박적으로 챙기는 것이다. 눈치와 배려를. 내가 할 수 있는 좋은 사람의 가장 기본을 갖고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