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unce의 계절이라.
봄기운이 무르익을 때로 익은 날이었다. 나는 아마 과제 때문에 도서관 공용 컴퓨터 자리에서 타이핑하고 있었다. 그때 무심결에 광고 배너를 보게 된다. 조용필이 돌아왔다 Bounce. 과제를 하려면 또 배경음악은 필수가 아니겠는가 하며 음원사이트에서 노래를 한번 들어봤다. <bounce>라는 노래를 듣기 전까지 조용필은 ‘킬리만자로의 표범’의 이미지로 남아있었다.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헤매는...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 순 없잖아..’ 고지식하긴 한데 내 세대가 아니니 당연히 나에게는 옛날 옛날에 누가 살았었대..로 시작하는 이야기 속 인물 같은 존재? 한 마디로 동시대 사람이 아닌 느낌이었다.
그러나 bounce는 달랐다. 전주를 듣자마자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에 오 이거 좋은데? 하다가 첫 소절 ‘그대가 돌아서면 두 눈이 마주칠까. 심장이 bounce bounce 두근대 들릴까 봐 겁나.’ 바로 여기에 나는 마음을 빼앗겨 버린 것이다. 이렇게나 세련된 비트에 조용필의 목소리를 얹어도 어울리는구나! 그리고 여실히 느낀 것이다. 크나큰 도전을 한 것이구나. 자리에 그저 머무르면서 자신만의 스타일로 노래를 하는 게 아니라 파도와도 같은 시대의 흐름에 몸을 던져 헤엄을 치고 있구나. 아니나 다를까 2013년 그해는 조용필 열풍이 되었다.
강의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광화문 교보 문고에 들러 씨디를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이건 소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렇게 판단했다. 교보 문고에 들어가니 이미 한쪽 벽면이 모두 조용필 판넬로 꾸며져 있었고 매대 정 가운데에 씨디를 탑처럼 쌓아두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특히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중년층 여성분들이 줄을 서서 씨디를 사려고 기다리던 모습이다. 아이돌 덕후로서 앨범이 발매되면 줄을 서서 앨범을 구매하고 서로 기뻐하고 그런 젊은 사람들의 모습을 자주 보곤 했었는데, 엄마뻘 분들이 앨범을 사려고 줄을 서고 설레 하는 모습이라니 신선한 모습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조용필은 ‘오빠 부대’의 원조 격인 사람이었다.
한번 덕후는 영원한 덕후인 것이다. 그분들에게 여전히 조용필은 트램펄린 같은 존재겠지? 노래에서 가장 좋아하는 가사이다. 베이비 유얼 마이 트램펄린- 나는 노래를 듣다 보면 주로 가사에 집중하게 되는 편이다. 어떻게 이런 가사를 썼지? 하는 가사들이 몇 개가 있다. 예를 들자면, 아름다운 가사로 뽑히기도 했던 김윤아의 <봄날은 간다> 중 ‘봄날은 가네 무심히도, 꽃잎은 지네 바람에. 머물 수 없던 아름다운 사람들’ 단 한 줄만으로도 심금을 울려버리는 것이다. 또한 아마도 꽃이 비처럼 내리는 지금 같은 계절에 이런 가사를 쓰지 않았을까? 상상하게 만든다. 그리고 내가 진짜 사랑하는 이소라의 모든 가사. 특히 <시시콜콜한 이야기>에서 ‘잠깐 일어나 봐 깨워서 미안해. 난 모르겠어, 윤오의 진짜 마음을. 같이 걸을 때도 한 걸음 먼저 가. 친구들 앞에서 무관심할 때도 괴로워’ 가사를 들으면 내가 마치 화자가 된 것처럼 몰입하도록 만들어주는 가사들이 나는 참 좋다.
네가 나의 트램펄린. 아주 간단하지만, 굉장히 낭만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트램펄린 위에서 쿵쿵 뛰듯 네가 내 마음속에서 쿵쿵 뛰어. 나는 이런 간단하지만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을 표현을 만날 때 가슴이 쿵쿵 뛴다. 짜릿하다. 어쩜 이런 비유를 했지? 아니 이렇게 묘사를 했단 말이야?
하지만 하루에 하나씩 나를 팡팡 뛰게 해주는 트램펄린 같은 일이 생기면 참 좋겠지만, 어른이 될수록 인생은 보잘것없는 것들로 차 있고 하루하루가 싱그럽지만은 않다. 힘차게 활짝 피었던 봄의 계절을 지나 꽃잎이 바람에 흩날리고 비 맞고 먼지가 내리면 우리는 비로소 차분히 받아들인다. 그냥 소소하게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내가 해야 하는 일을 묵묵하게 해내는 것이 인생이구나. 점점 화려했던 색감은 어느새 잃어버리고 익숙한 풍경만이 반복되는 계절 속으로 접어드는 걸 실감한다.
아마 나의 계절은 지금 가을쯤 와있는 것 같다. 힘차게 피었던 잎사귀들이 낙엽이 되어 떨어지는 모습이랄까? 가열 차게 인간관계에 열을 올리고 애정을 갈구하던 적도 있었지만, 이제 만남보다 이별이 더 익숙하고, 사람도 만나는 사람이 더 편한 그런 단계. 어쩐지 작별의 순간 같아 살짝 슬퍼질 수도 있지만, 동시에 붉고도 노랗게 물을 들이기 위하여 얼마나 노력하고 있을까 생각해보면 떨어지는 낙엽들이 마냥 이별을 뜻하진 않는다.
제 한 몸 힘을 주어 떨어지는 잎사귀에도 배울 것이 있다. 거기서 나는 어떤 희망을 본다. 단순히 실패나 종결로 인하여 끝맺는 것이 아닌 다음을 위하여 필요 없는 잎사귀들을 떨어트리는 과감함. 탈각이나 탈피. 내가 속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묵묵히 넘어가는 과정은 참으로 경이롭다. 소란스럽지 않고 자연스럽게. 항상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이게 나의 트램펄린의 순간일 것이다. 묵묵하게 나만의 리듬으로 내가 원하는 세계로 도달하는 것. 가면서 무게가 나가는 것들은 하나씩 버려 나가는 것. 내가 필요 없는 것과 필요한 것을 명확하게 구분할 줄 아는 것. 그리고 짜릿한 트램펄린 위에 올라탔을 때 누구보다 더 높게 뛰어오르기 위해서는 최대한 낮은 곳에서부터 몸을 웅크렸다가 펼쳐야 한다.
그래서 지금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조금씩 잎사귀를 떨어트리고 있다. 일상 속에서든 문장 속에서든. 필요 없는 수식어를 경계하고, 낯부끄러운 변명을 지양한다. 그리고 골몰한다. 어떻게 하면 내 안의 트램펄린을 만날 수 있지? 내가 가지고 있는 쓸데없는 자격지심, 자기 비하, 자존심. 그 모든 잎사귀를 다 떨어트리고 나면 아마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때가 온다면 아무리 추운 바람이 불더라도 맨몸으로 트램펄린 위에 오르고 싶다. 누군가 아주 정신이 나간 모양이야. 라며 손가락질하더라도 그 손가락질을 받으며 아이처럼 방방 뛰고 싶다. 그날이 오면 두개골이 깨져서 산산조각이 나도 오히려 무슨 한이 남겠냐는 시처럼. 그날이 온다면야 아주 멀리 더 높이 계속해서 지치지 않고 뛰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