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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연솔 Apr 27. 2021

이상한 나라의 뿔

아직 자유롭고 싶은 청춘들이 많기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토끼를 만나 토끼굴을 타고 굴러 떨어져 모험을 하고 싶은 충동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어쩐지 짜릿짜릿 한 나만의 비밀 세계를 갖고 싶은 욕망은? 현실세계를 벗어나 자유를 갈망하고자 하는 몸짓을 우리는 ‘청춘’이라고 부른다. 젊은 청춘들을 데리고 일상 속에서 예고 없이 여행을 떠나게 하는 프로그램 ‘꽃보다 청춘’. 최근 꽃보다 청춘의 아이돌 그룹 ‘위너’ 편을 보았다. 여행의 마지막 위너의 한 멤버에게 피디는 ‘청춘은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을 던졌고, 멤버는 ‘행복과 자유’라고 답했다. 이번 여행은 정말 행복했고 그로 인해 자유를 느꼈다고. 그 질문을 답하며 멤버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어쩐지 진부할 수 있는 그의 대답이 마음에 다가온 것은 그가 진정으로 그것을 갈망했고, 갈망했던 것을 마침내 이뤄낸 자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행복하고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행복에서 떠나야만 하고 자유에게서 떠나야만 한다.

어려운 이야기이지만 삶은 역설이다. 행복해지겠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 자유롭겠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행복할 수 없다. 자유를 자유롭게 놓아주고, 행복을 행복하게 체감할 때 청춘의 열병을 무사히 건널 수 있다. 의미가 거창해질수록 삶의 밀도는 높아지지만 한편으론 너무 단단해져 어떤 틈도 허용하지 않아 고립될 가능성이 커진다.

  한편 패닉의 ‘뿔’이라는 노래에는 이런 가사가 나온다. ‘아침에 일어나 머리가 간지러워서 뒤통수 근처를 만져보니 뿔이 하나 돋아났네...(중략) 이쯤은 뭐 어때 모자를 쓰면 되지 뭐 직장의 동료들 한 마디씩 “거 모자 한번 어울리네”. 어쩐지 요즘엔 사는 게 짜릿짜릿 해. 나만이 간직한 비밀이란 이렇게나 즐거워. 나의 예쁜 뿔’

  앨리스가 토끼를 망설임 없이 따라나섰던 이유는 어쩌면 비밀이 주는 힘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자신의 자유의지로 모든 것을 마음껏 행할 수 있는 비밀의 세계. 그곳으로 언제라도 도망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너무나도 크다. 여행지에서 마주친 기름에 흠뻑 젖은 야시장의 열기, 끊임없이 펼쳐진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는 바람, 소박하지만 정갈하게 스스로를 위해 차린 따뜻한 밥상. 누가 뭐라 해도 지켜나가는 자신만의 신념과 철학이 있어야만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다. 뒤통수에 뿔이 달려도 그 위에 모자를 얹고 비밀이 생겼다며 설렘을 느끼는 것. 그런 뿔을 마음껏 자라게 할 세계가 있는가.

  자유를 자유롭게 놓아주자고 말했으나, 삶은 역설이라 하였으니 나의 말에 스스로 반박하며 자유에 대하여 고찰해 본다. 진정한 자유는 무엇이며 왜 자유로울 때 행복감을 느끼는지에 대하여. 자유의 대전제는 ‘선택의 자율성’이라고 생각한다. 앨리스가 토끼굴로 들어가게 된 이유는 얼핏 보면 토끼의 꼬드김에 넘어간 것 같아 보이나 사실은 앨리스가 자율적으로 선택한 결과이다. 자발적으로 어떠한 것을 선택하고, 선택한 것을 즐기거나 폐기하거나 하는 결과 역시 본인이 매듭짓는다. 반대로 선택을 강요받거나 선택할 선택지가 없을 때 우리는 정체되어있다고 여긴다.

  얼핏 생각하기에 같은 말로 들릴지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차이가 있다. 선택을 강요받는 것은 여러 선택지 중에 고르고 싶은 무언가가 있으나 다른 것을 골라야만 하는 경우를 말하고, 선택지가 없는 것은 마땅히 고르고 싶은 것 자체가 없는 경우를 말한다. 지금 이 시점의 사회는 후자의 경우로 인하여 전자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많은 것 같다. 역사 이래 가장 좋은 스펙들을 지닌 청년들이 지천에 널려있는 상황이지만 계약직으로 인한 고용 불안정과 낮은 임금상승률을 벗어나지 못하여 어쩔 수 없이 질이 낮은 일자리를 선택하는 상황. 그로 인하여 제2의 직업, 제3의 직업을 갖는 N 잡러 라는 선택을 통해 질보다 양을 선택하는 청춘들. 사회가 양산해 내는 문제들을 고치지 않은 채로 계속해서 같은 선택지를 제공한다면 벼랑 끝에 몰린 청춘들은 마지못해 선택을 강요당한다. 미래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강요받는 정체된 사회. 이미 예정된 결말을 알고 나서 보는 드라마는 얼마나 지루한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어쩐지 짜릿짜릿한 반전은 고사하고 정해진 결말이라도 살짝 비틀어주는 혜안이 필요한 때이다.

  자유로운 선택을 억제하고 모험을 두려워하는 청춘을 청춘이라고 부를  있을까. 그러나  누구도 아무 안전장치도 없는 채로 아찔한 롤러코스터를 타지는 않는다.   마련이라는 모험은  그대로 동화  토끼에 불과하고, 자아를 실현하고  나은 세상을 꿈꾸는 패기를 갖는 것은 거추장스럽게 달린 뒤통수의 뿔과 같다. 모든  허황되고 과장되어 있다고 여기는  당연하다. 당장에    건사하기도 힘든 와중에 아이와 함께  미래를 약속하는 일은 단순히 토끼굴로 몸을 던지는  아니라 밑도 끝도 없는 추락에 가깝다. 가슴에 열정이 없어서 몸을 사리는 것이 아니다.  나아가 패배주의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도 아니다. 그저 다른 선택을 강요받았기 때문이다. 사회가   많은 선택지를 다시 청춘들에게 제공할  그들은 언제라도 기꺼이 동화를 현실로 데려와 토끼굴로 뛰어들 준비가 되어있다. 더 이상 숨기지 않고 각자 저마다 빛나는 뿔을 뒤통수에 뽐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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