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연솔 May 23. 2021

그녀(  ) 구원자A

2. A를 만나다.

  며칠 사이 계속해서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고 하늘이 온통 진회색 빛으로 뒤덮인 날들이었다. 주변의 여고생들이 요즘 날씨가 왜 이러냐며 투덜거리는 통화를 하며 지나가고 있었다. 그녀 역시 발 부근에 찰방찰방 물이 튀었지만 상관없어 보였다. 그녀는 오히려 날이 궂은날이 마음에 들었다. 웃을 날이 사라진 요즘 생기 없어 보이는 그녀의 기운을 날씨 탓으로 숨긴 뒤에 가만히 모른 채 하고 싶었다.

  오랜만에 타는 지하철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자리가 나도 앉을 생각 없이 문간에 서서 창밖으로 풍경들을 바라보았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거무죽죽한 회색빛의 나열. 그러나 그녀는 질리지도 않는지 시종일관 눈도 깜빡이지 않고 바라보았다. 결혼 전에는 매일 보았을 풍경이었다. 4호선에 올라타 2호선으로 환승하기 위해 사당에서 내려 줄을 섰다. 바글바글 한 사람들을 바라볼 때면 어쩐지 비현실적이기도 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싣고 내리는 게 가능할까. 그런 생각이 무색할 만큼 한순간에 구겨지는 스펀지처럼 사람들의 힘에 밀려 끝으로 무자비하게 구겨졌다. 점점 호흡이 딸릴 때쯤 다시 꾸깃꾸깃한 몸을 이끌고 3호선으로 갈아타기 위해 달렸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주 오래전 일처럼, 아니 없던 일처럼 까마득하다.

태어날 때부터 집에서 찌개를 끓이고 더덕무침을 무치며 남편을 기다리는 임무만을 맡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녀에겐 오늘이 오랜만에 행하는 작은 모험이나 다름없었다. 다만 학생들이나 하는 일인 줄 알았던 일을 지금에서야 감행하는 것이 어쩐지 부끄러웠지만. 긴장한 탓인지 졸린 눈을 비비며 그녀가 환승역을 놓치지 않기 위해 다시 주위를 살핀다.

  방송국 앞은 인산인해였다.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 자신보다 한참은 어려 보이는 사람들뿐이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말을 하는 사람들도 종종 보였다. 영어권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인기가 많다는 것을 실제로 체감하니 어쩐지 신기해졌다. 어찌해야 할지를 몰라 그저 멍하게 주변을 둘러보는 중에 누군가 그녀의 등을 두드렸다.

 “저는 120번인데 몇 번이세요?”

깡마른 체형에 까무잡잡한 피부, 가녀린 손, 작은 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강단 있어 보이는 말투. A였다. 이것은 A와 그녀의 첫 만남이다.

순간 무슨 말인지 바로 알아채지 못해 허둥대자 약간은 귀찮은 듯이 A가 말했다.

 “대기 번호 말이에요. 몇 번으로 받으셨냐고요”

 “아아. 저 121번이요”

 “오. 바로 찾았네. 순서대로 줄 서면 되는 거거든요. 제 뒤에 서시면 돼요”

공개 방송을 보러 오겠다고 신청했을 때 번호를 하나 알려줬었는데 알고 보니 녹화 장에 들어가는 순번이었다.

A의 손짓에 따라 가만히 뒤로 가서 줄을 섰다.

뒤에서 바라보니 A는 그녀와 눈높이가 딱 맞을 것 같았다. 체형은 그녀도 저 나이 때라면 저쯤은 말랐으리라. 문득 오늘 아침에 옷을 골라 입고 나올 때 늘어져있던 뱃살을 생각하며 어쩐지 지금 여기에 줄을 서서 아이돌을 보겠다고 서있는 것에 대해 이질감을 느꼈다.

역시 괜한 짓이 아닐까. 지금이라도 집에 가서 얼른 저녁을 먹고 쉬면 어떨까. 하는 순간

  “혹시 누굴 제일 좋아해요?”

짙은 쌍꺼풀에 큰 눈망울이 가득 들어찼다. 정말 까맣고 초롱초롱한 눈망울이었다.

혼탁한 세상에 아직 때 묻지 않은 투명한 구슬과 같은 눈빛을 오랜만에 바라본다는 생각을 했다.

  "저는 다 좋아해요. 그냥 다"

어쩐지 얼빠진 목소리로 대답하는 그녀와 달리 공간을 경쾌하게 종횡무진하는 A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그렇죠? 저도 다 좋아해요. 어떻게 꼽겠어요. 너무 멋진걸요 모두"

퍼석한 소리를 내며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 같은 그녀의 옆에서 A의 싱그러움은 더 도드라졌다. 대화 역시 매끄럽게 주도해 나가는 에너지가 부러웠다. 알지도 못하는 타인과 대화를 이어가게 될 줄이야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다.

  그녀는 매사에 방어적이었다. 자신의 영역에 사람을 들이는 일은 언제나 쉽게 허용하지 않았고 도전보다는 안정을 모험보다는 유지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결혼 역시 안정과 유지를 위해서였다. 회사에서 만난 남편과는 적당히 연애를 하다가 적당한 시기에 결혼했다. 결혼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주위에서 결혼을 하면 안정적이라고 하기에 택했을 뿐이다. 그리고 가정에 힘을 쏟아달라는 남편의 말에 가정의 유지를 위하여 직장을 그만뒀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녀의 삶은 참으로 단조로웠다. 그리고 정확하게 바스러져가고 있었다. 그런 균열을 눈치 채지 못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녀 안에서 타협을 했을지도 모른다. 이건 정체가 아니라 평화라고.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바꿀 것이 없다면 관련 없는 이야기겠으나,

그녀는 지금 바로잡고 싶은 것들이 생겨버렸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풀어가야 할지 몰라 이렇게 또 도망쳐 버렸다.

A와 이야기를 나누며 처음으로 그들의 무대를 관람했다. 영상으로만 보던 에너지가 실제로 보게 돼도 느껴질지에 대한 궁금증을 충분히 해소시켜준 무대였다. 한 번의 무대를 위해 몇 번의 촬영이 이뤄지는지 눈앞에서 바라보니 어쩐지 뭉클해지기도 했다. 무엇보다 무대 위의 그들을 바라보는 순간에는 남편도 자신도 없었다. 그 순간 자체를 즐길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A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발랄한 목소리는 어디 가고 황홀하다는 듯이 정말 너무 좋았다고 말하는 걸 보며 이래서 누군가의 팬이 되는 건가 싶었다.

후회했으나 작은 모험을 하길 잘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A에게도 정말 즐거웠다는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데 뜻밖의 말이 들려왔다.

  "혹시 모르니까. 이거 받으세요"

하얗고 네모반듯한 종이에 <구원 심부름센터>라고 적혀있었다.

  "심부름센터? 이게 뭐예요? 심부름센터에서 일해요?"

  "제가 하는 심부름센터예요. 어려운 곤경에 빠진 모든 이들의 일들을 도와주는 구원자 역할을 하는 거죠. 나름 사장이에요"

  "어머. 아직 학생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이를 어리게 봤나 봐요 내가"

  "학생도 맞아요. 근데 지금은 그냥 휴학하고 하고 싶은 걸해보고 있어요. 아무튼 설명하자면 긴데, 혹시 필요하면 연락 달라고요. 같은 팬의 입장에서 제가 돈은 안 받을 게요. 오늘 같이 너무 즐거워서 드리는 거예요"

  "내가 이게 쓸 일이 있을까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고마워요. 이렇게 헤어지려니까 아쉽 네요 그나저나"

  "사람일 모른다잖아요. 너무 아쉬워하지 마세요. 언젠가 보게 될 테니까요"

손을 흔들며 저 멀리 사라지는 A를 바라보며 어쩐지 의미심장한 말을 들은 것 같아 곱씹어 보았다. 그러나 이내 과연 언젠가 만날 일이 있을까? 한 번의 모험이면 족하지 뭐. 하면서 저녁거리를 사들고 집으로 귀가했다.

그리고 한 달 뒤 그 명함을 찾게 된 것이다.

명함 귀퉁이에 새겨진 구원자 A 그리고 번호.

연락을 할까 말까 너무나도 많은 밤을 망설여서 이미 번호는 달달 외울 지경이었다.

그녀가 아무리 사람 좋아 보이는 해맑은 눈을 가졌다고 해도 얼마나 아는 사람이라고 이런 속 사정을 이야기하려 하는 거야.

스스로를 꾸짖는 질타.

가슴속에서 뜨거운 불꽃이 타올라 온통 마음을 태우고 또 태워 뿌연 연기 속에 잿가루만 날아다니는 하루하루. 이렇게 살면 뭐해. 거울을 바라보면 지금껏 왜 살았는지 의미를 모르겠는 날들.

스스로를 가엾게 여기는 마음.

두 가지를 저울에 올리고 또 올리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그녀는 살림을 잘했다.

고기는 한 근에 얼마가 저렴한지 동네 마트 가격은 꿰고 있었으며, 만들기 어렵다는 게장도 집에서 뚝딱 만들어냈다. 계절마다 제철음식으로 반찬을 바꾸기도 했으며, 김치는 종류별로 담가놓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자신의 마음 앞에서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못했다.

셈에 강한 그녀도 어느 쪽이 더 중한지 알 수가 없었다.

할 줄 아는 게 많아도 자기 자신 하나를 알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서서히 그러나 멈추지는 않은 채 차곡차곡 무너져 오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더 많이 무너져 내리기 전에 막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보내게 된 것이다. 술기운에 무작정. 도와달라는 문자를.

그러자 낮 12시에 전화를 요청하는 답장이 왔다.

이제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래도 마음과 실행은 별개인 건지 10분째 집 앞 공중전화 앞에서 그녀는 망설이고 있었다.

공중전화를 굳이 찾은 이유는 혹여나 맘이 바뀔 것을 대비하여 개인전화번호는 안 남기겠다는 의지였다.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하나 둘 흘낏거리기 시작할 때, 남들 눈에는 보이스피싱이나 사기를 당하는 사람처럼 보이려나?라는 말도 안 되는 우려를 하며 결국 그녀가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어제 문자를 보낸, 그 공개방송에서 만난 사람인데요"

한 음절 한 음절 힘겹게 다시 말을 배우기 시작한 아이처럼 떠듬거리며 입 밖으로 말을 꺼냈다.

  "네 전화 주셨네요. 혹시 지금 메모가 가능하세요?"

  "네? 아 네네. 잠깐만요"

다급하게 수화기를 턱과 어깨 사이에 끼워 넣고 휴대폰 메모장을 켜자 주소를 하나 불러주었다. 그리곤 여기로 방문해줄 것을 말하곤 전화는 끊겼다.

이럴 거면 전화는 왜 하라고 한 거야?

애초에 문자로 안내해주지.

어쩐지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흘러내린 땀을 닦고 나니 이번엔 웃음이 나왔다.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가만히 앉아서 마주한 아파트를 바라보았다.

힘들게 마련한 우리의 보금자리. 그곳으로 오늘도 남편은 다른 여자의 채취를 묻힌 채 돌아올 것이다. 이런 게 결혼의 결말이라면. 이런 게 사랑의 결말이라면.

차라리 아이들의 장난이 더 성의 있을 것 같았다.

숨바꼭질을 하는 아이들을 바라보면 얼마나 성심성의껏 숨고 찾는지 모른다.

남편은 장난을 칠 거라면 더 철저하게 숨겼어야 한다.

그래 상대를 잘못 만난 걸 보여주자.

끝까지 찾아내야겠다.

뭘 찾아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다시 찾아올 것이다.

그에게 빼앗긴 모든 것들을.

그런 생각을 하며 그녀가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 구질구질한 희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