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엄마와, 동생의 비극의 시작. 가족의 재난은 아빠로부터 온다.
알아
오지 않는 연락이
밤을 지새우는 그녀의 울음
그 사이를 가르며 자꾸만 아래로 내려간다
무거워진다
떨어진다
필요할 때 없었어
대게는 부재중
어느 봄날
색종이를 꺼내와 '점선을 따라 반으로 접으세요'
접었어
'그다음 접은 선을 따라 자르세요'
가위를 들었지만 이내 내려놨어
아빠를 마구 자르고 싶어 질 테니까
대신 다시 한번 종이를 접었어
손톱자국을 따라 가지런한 직선이 그려지는 걸
보면서 쾌감을 느꼈어
끝에서부터 손가락에 힘을 줘 종이를 찢어볼까
찢긴 종이는 이미 하나가 아니야
다시 붙여도 하나가 아니야
영원히 하나는 될 수 없어
그런데 몰랐어
그때는 정말 몰랐어
아빠를 밧줄로 꽁꽁 묶고 싶다고
라디오에 나오는 노래를 들으며 우는 너를 볼 때
이제야 내가 너무 몰랐던걸 알았던 거야
지금 보다 더 어릴 때
몰랐던걸 알게 되면 칭찬받았지만
지금 여기 이 세계에서는
가슴 아픈 진실만 있을 뿐이야
끝없이 원망했는데
술 냄새를 풍기는 입, 풀린 눈, 욕설을
나에게 주어진 이유 없는 재난이라 생각했는데
너의 세계가 붕괴되었구나
경보도 울리지 않고
예고도 없이
약속을 어기는 사람과
평생을 그 사람이 다시 약속을 어길까
의심하는 사람이 있다면 누가 잘못일까
가끔 너무 늦은 사과는 의미가 없어져
용서도 마찬가지야
너무 늦어버리면 영원히 용서하지 못해
용서는 멀리서 보기에나 관용적인
옆에 서서 바라볼 때나 가능해 보이는
사실 용서라는 건 말이야
용서라고 말할 때, 읽고, 쓸 때
그럴 때만 존재해
어떤 용서는 바라지도 말아야 할 용서가 있는 거야
'아비라는 사람이 지 부인이 아픈데도
뒤에서 바람을 폈대.
그리고 죽자마자 재산을 다 털어서 새 여자랑 살림을 차렸대. 쟤네 엄마가 참 불쌍해. 그래도 딸들은 잘 키워놓고 가서 다행이야'
잘 키워놓고 가서 다행이야.
를 제외한 다른 문장이 사실이어서
용서가 안되는 걸까
영원히 하나가 될 수 없어
이미 찢어진 종이는 하나인 척하는 것 뿐이야
서걱서걱
가위 날의 서늘한 촉감을 느끼면서
아빠를 자르자
예고 없는 재난처럼
세상 제일가는 비극처럼
아빠를 죽여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