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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연솔 Jun 02. 2021

불안과 안위 사이사이를 헤치며 나아가고 있어

상처 받아도 다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생

다채로운 꿈을 꾸고 싶은 바람이 언젠가의 나에게도 있었다. 살랑 이는 봄바람만 큼이나 가볍고도 한여름 일렁이는 아지랑이만큼 강렬한 꿈.

어떤 날은 문학 선생님이 되고 싶었고, 어떤 날은 작가가 되고 싶었고, 어떤 날은 책방 주인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어떤 날에 특기할 만한 것 없는 회사원이 되었다.

요새는 사라졌겠지만, 오래전에는 학교에 입학하고 나면 의례적으로 작성하던 종이가 있었다. 거기에는 부모님의 직업뿐 아니라 학력 사항까지 작성해야만 하였고. 학생의 성격, 특기, 취미, 싫어하는 것, 장래 희망 그리고 오래전 기억으론 고쳤으면 좋겠는 습관까지 작성해야만 했다.

성격은 내성적이며 조용했고, 특기는 없음이라고 기입했을 것이다. 취미는 독서였고 싫어하는 것은 비위가 약해 비린내가 나는 모든 음식 예를 들어 우유나 생선 류. 부모가 생각하는 아이의 고쳤으면 좋겠는 습관은 입술을 자주 물어뜯는 것. 긴장을 하면 말소리가 적어지는 것.

얼마나 달라졌을까.

특기는 아직도 특정할 만한 게 없는 사람이고. 취미는 여전히 독서이다.

우유와 생선은 이제는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생선조림은 비린내 때문에 싫어한다.

입술은 전에 비해 덜 하지만 가끔 물어뜯는다.

긴장을 하면 말소리가 적어지는 것 역시 여전하다.

예나 지금이나 장래희망은 작가.

오래된 꿈을 활주로를 달리는 것만큼 명확하게, 쾌속선을 타는 것처럼 멈추지 않고 쭉 달려 도달하는 사람이 있을까.

최근 유튜브를 순회하다 어떤 연예인이 기회는 파도처럼 다가오는 것 같다고 말한 것을 보았다. 다만, 그 파도 위에 즐길 준비가 제대로 되어있는가, 그리고 올라탄 보트가 얼마나 파도를 탈 만큼 쓸 만한 보트였는지 그것에 대한 운. 그 모든 것이 합쳐져 성공의 여부가 결정되는 것 같다고. 아무것도 모른 채 파도를 올라타면 올라탄들 한 번의 성공일 뿐이라고. 즉, 언제나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고.

공황장애를 겪으면서 제일 많이 한 생각은 불안은 과연 어디서 기인한 것 일까?

내가 가진 불안이 어디서 오는 걸까. 보통 두 가지의 경우가 아닐까 싶다. 첫 번째, 알 수 없는 일에 대한 불안감. 우리는 내일을 모르기에 희망찰 수 있지만, 동시에 내일을 모르기에 고통스럽다. 그렇기에 우리는 매일 불안정한 일상을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간다. 집에 거주한다는 것은 우리의 귀소본능을 여실히 보여주는 부분이라고 생각하는데, 돌아간다는 것은 안정을 추구한다는 뜻이다. 안정을 느끼는 것은 주로 내가 잘 아는 것, 모든 걸 통제할 수 있는 상황에서 느낄 수 있다. 그 모든 것이 집에 있기에 우리는 매일 같이 집으로 귀가한다.

그리하여 잘 알지 못하거나 모든 걸 통제할 수 없는 상황. 즉, 낯선 상황에서 더 쉽게 불안을 느낀다. 공황장애는 이런 경우가 집에서도 계속되어 일상으로 지속된다는 것이 문제이지만. 보통의 케이스에서는 비일상적인 특별한 상황에서만 이러한 불안을 느낄 것이다. 중요한 면접을 앞두거나, 회사의 미팅을 앞두거나.

두 번째, 첫 번째에 대한 상상이다. 앞서 말한 모든 것과 관련된 ‘상상’이 불안을 만든다. 면접을 앞둔 상황에서 이번 면접은 망칠 거야. 왜냐면 너무나도 경쟁률이 세니까 당연히 떨어지겠지. 이렇게 결과를 미리 상상하는 경우 불안감은 증폭될 것이다. 미팅에서 거래처를 어떻게 설득시키지 말주변이 없는데. 상상은 처음엔 탱탱 볼처럼 지반을 통통 튀기며 다가온다. 발랄한 듯 그렇게 다가오겠지만 집어삼키는 것은 한순간이다. 정신을 놓으면 상상에 지배당하고 실제와 혼동하기 십상이다. 너무 많은 곁을 내주면 뭐든 위험한 법이다.

그러나 이렇게도 불안한 마음이 드는 상상을 순식간에 안위로 만드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바로 준비이다. 파도에 제대로 올라탈 준비를 한 사람은 충분히 즐기며 탈 수 있다고 말한 것처럼. 불안으로 미칠 것 같아서 더 이상 탱탱 볼이 커질 만큼 커져 빵- 하고 터져버릴 것만 같을 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어기제는 죽어라 연습하는 것뿐이다.

내가 지금껏 불안에 떨면서도 언젠가 안위를 되찾을 거라 이유 없는 자신감을 갖는 이유는 여기에서 나온다. 소심하고 내성적이고 긴장하면 말도 작아지는 나는 정말 피나게 노력하면 남들 앞에서도 유창하게 말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어떤 계기로 발표를 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는데, 아마 고등학교 때 그냥 PPT에 능하다는 이유로 학부모 참관수업이던가 발표를 했던 적이 있었다. 차라리 발표자료를 만드는 것에는 밤을 새울 수 있지만, 도저히 발표는 도맡아 하기 싫었으나 시키면 또 잘 해내고 말겠다는 망할 놈의 책임감이 문제였다. 일주일 내내 발표 대본을 달달 외웠다. 외우고 또 외워서 숨 쉬는 구간까지 외우고 슬라이드를 넘기는 타이밍까지 외웠다. 그래도 칠판 앞에 서니 손이 달달 떨려서 아 역시 상상처럼 망했구나. 큰일이다. 에이 몰라 그래도 하면서 첫마디를 내뱉는 순간 외운 대로 말이 술술 나왔다. 그것은 마치 마법과도 같았다. 흔히들 말하는 의식의 흐름처럼 막 내뱉고 있었으나 사실은 부단한 노력이 가져다준 훈련이었을 것이다.

아휴, 드디어 해치워버렸네. 실수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라고 넘겼던  기억이 누군가에게  기억으로 남아있으리라고 그때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되는 고등학교 동창 중에서 지금까지도  깊은 이야기를 하며 나와 아주 친한 친구   명인 J 있다. 그녀와는 사실 고등학교 때는 친하진 않았다. 2학년  같은 반이었으나 같은 분단에 앞뒤 자리로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어   전부이다. 그러나 사람일은  모른다고, 훗날 고등학교를 졸업  대학생이 되어 뜻밖의 연락을 받게 된다. '혜진아, 예전에 발표할  보니까 네가 PPT  만드는  같은데   도와주면  될까? 과제를 하는 중인데 도무지 어려워서' 그녀는 지금도 종종 그때의 이야기를 꺼내며 눈빛을 반짝이곤 한다. 그때 네가 나오지 않았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연락할 일은 없었을 거야. 네가 나와 줘서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그때 친하지도 않았는데  나와서 굳이 도와 준거야?

몰라. 기억이 안 나네 아마 그냥 내가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이었으니까. 단순하게 돕고 싶어서 나간 거라 생각이 드는데.

실제로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내가 같은 반이긴 했지만 친하지 않은 사이에 굳이 그녀를 도와주러 나간 이유가. 어려움을 겪는 친구는 꼭 내가 도와줘야만 해! 같은 천사표 캐릭터도 아닌데 말이다. 아마 그냥 그러고 싶지 않았을까. 무엇보다 그녀는 왜 친하지 않은 나에게 도움을 요청한 걸까?

너야 말로 근데 왜 나에게 도움을 요청한 거야?

너는 모르겠지만 고등학생 때 내가 얼마나 친해지고 싶었는데. 왜 그날 있잖아 네가 발표하던 날. 직접 자료도 만들고 해서. 그때 너무 똑 부러지게 말을 하는 거야. 딱 봐도 쟤는 진짜 똑똑하겠구나. 저런 아이랑 친해지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들었지. 그래서 옆에 짝꿍에게도 말했어. 너무 발표를 잘하지 않니? 쟤는 누구랑 친한 애야?

그 전까지만 해도 나도 관심이 없었는데 그 발표를 기점으로 딱 관심이 생긴 거지. 그런데 도무지 접점이 없어서 친해지지 못하다가. 같은 분단이 되어서 앞뒤로 앉았는데 네가 짝꿍이랑 많이 친해서 이야기할 기회가 좀처럼 없더라. 그래서 포기하고 졸업했는데 우연히 페이스북을 보게 되어서 혹시나 하고 연락을 하게 된 거지. 발표를 잘하던 네 모습이 떠올라서.

불안을 힘겹게 누르고 다시 튀어 오를까 초조해하며 엉금엉금 안위로 기어가는 모습을 누군가는 똑똑하다고 해주었으며, 당당해 보인다고 해주었다. 그것은 그토록 바라던 모습 아니던가.

허둥지둥 허겁지겁 눈치 보면서 늘 할 말을 못 하는 모습이 아니라 그토록 멋진 모습으로 바라봐 주는 누군가가 있었다는 사실에 어쩐지 눈시울이 붉어졌다.

언젠가 그런 생각을 한 적 있다.

어떤 한 사람이 이 땅에 태어나 왔다 갔는데 그것을 아는 사람은 오로지 나와 그 사람뿐이다.

각자의 이야기는 가까이서 보면 한 점에 불과하지만 멀리서 보면 밤하늘을 밝혀주는 별자리처럼 이어져있다는데. 이제는 더 이상 이을 수 없는 점이 되어 버렸다. 문장에 마침표를 찍는 일과 사람이 왔다가는 일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렇게 고뇌하고 집중하고 아등바등하고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고통을 겪고도 점 하나면 끝이 난다. 그것은 그렇게 후련하지도 홀가분하지도 않다. 가끔 미련처럼 남아있는 티끌 같아서 항상 손에 지니고 다닐 뿐이다. 지우개로 지워내도 그 자국이 남아있는 것처럼. 사람이 왔다간 자리에는 항상 자국이 남는다.

차라리 만나지 않는다면, 하지 않는다면 아프지도 않고 불안하지도 않을 텐데.

왜 누군가를 만나서 또다시 아파야 하고.

왜 맞지도 않는 일들을 해서 또다시 불안해야 할까.

그럴 때 친구가 해준 말을 응원삼아 홀로 되뇐다. 불안해 보이는 몸짓도 연결하면 하늘을 수놓는 별자리가 되리라. 또한 하늘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별자리는 자신의 몸짓에 남기는 흉터 이리라. 불안과 안위는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어있다. 그러니 상처를 걱정하지 말고 좀 더 큰 몸짓으로 모든 도전을 받아들여라.

엄마의 죽음 이후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던 시간 속에서 그래도 애써 의미를 찾는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삶은 언제나 쉽게 불안을 허락하지도 안위를 허락하지도 않는다. 그러니 어떤 상황이 되더라도 겁먹지 말 아라 그것들은 번갈아가면서 찾아올 테니까.

원래 슬픈 영화를 보아도 울지 않는 성정인데 49제가 지나던 날 미용실에서 머리를 잘라내고 '안녕, 헤이즐' 이란 영화를 보았다. 그냥 네이버에 슬픈 영화를 검색했고 가장 최신작으로 추천을 하길래 눌러서 보았다. 마냥 울고 싶었다. 눈물이 더 이상 말라서 안 나올 때까지 내보내고 싶은데, 어쩐지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이대로 영영 울지 못하는 병에 걸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맘은 슬픈데 울음이 안 나와서 고른 영화였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을 보고 펑펑 울어버렸다. 오늘 글의 주제와 일맥상통하여 그 대사를 써보며 글을 마치려고 한다.

'우리가 상처를 받을지 안 받을지는 고를 수는 없지만, 누구로부터 상처를 받을지는 고를 수 있어. 난 너로부터 상처를 받아서 행복했어. 어때, 너도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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