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연솔 Jun 18. 2022

2. 고백


세상은 가끔 무서울 정도로 잔인하다. 아무리 세상의 끝에 서있는 것 같아도 종말이 오지 않는다. 그것은 오로지 너의 문제야 하고 비웃으며 새로운 아침은 시작된다.

마음은 심란한데 팀장은 얼마 전부터 들떠있었다.

누가 뭐래도 단체 생활에서 색채를 드러내지 않는 무채색에 가까운 그녀와 달리 팀장은 강렬한 비비드 색채 그 자체였다.

무얼 하든 의욕이 넘쳤으며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데에 거리낌이 없었다.

팀장에게는 지금 설레는 빅 이슈가 두 개나 있었다. 하나는 곧 진행될 전 직원 체육대회였고, 하나는 우리 팀이 다시 도약할 수 있는 계약 건에 대한 프로젝트를 위한 발표 준비였다.

자존심이 강한 팀장에게는 둘 중 무엇도 놓칠 수 없는 일생일대의 기회였기에 전장에 나가는 장수처럼 비장함이 감돌았다. 반대로 그 에너지를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자신의 에너지를 빼앗기는 기분이 들었다. 가뜩이나 검은색 옷을 즐겨 입는 그였기에 해리포터에 나오는 디멘터와 더 흡사해 보였다.

표면적으로 전 직원 체육대회는 각 팀별 대항전으로 높은 순위를 차지한 팀에게 포상휴가라는 보상이 주어지기에 의욕적일만했다. 그럼에도 그녀가 의욕이 없는 이유는 사실 말이 좋아 포상 휴가지 본인이 원하는 날에 사용하기도 힘들며, 업무가 너무 긴급할 경우에는 포상이라는 말이 무색하도록 고작 하루를 쉬고 다시 출근해야 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녀 말고도 많은 직원들은 가뜩이나 일이 많은 성수기에 시간을 내어 행사를 진행한다는 것에 대해 부담감이 크다는 입장이었다. 경영진들은 이래서 평생 아랫사람의 마음을 모르는 것 아니냐며, 그깟 행사 한 번에 끈끈한 단합이 될 리 없지 않느냐며 보여주기용 행사가 지긋지긋하다는 입장이 비공개 회사 커뮤니티에 종종 올라오곤 했으니까.

그러나 팀장은 가능하다면 시간을 빼서라도 체육대회를 위해 연습이라도 할 기세였다. 그 열정에 고개가 저어질 정도였다.

-

잠시 옥상에 올라가서 담배를 태우고 있는데 문이 열리며 박 주임이 들어오며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을 건넸다.

"고생 좀 하시겠는데요? 진짜 거기 팀장은 가만 보면 너무 오버가 지나쳐"

"그러게요. 제발 회사에서는 일 만하고 싶어요. 일만"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가 말을 덧붙이자 그게 바로 자신의 마음이라며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저희 팀장님은 그래도 티만 맞춰 입자고 해서 그나마 다행인 걸까요? 무슨 여기가 학교도 아니고. 모두가 원 팀으로 가는 거 너무 좋아한다는 생각 안 해요? 소속감 중요하긴 한데, 왜 그렇게 모두가 같아지는 걸 원하는 거죠? 똑같은 티 입고 같은 행사하고 그렇게 같아지는 게 중요할까요?

같아진다는 것.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뿔을 매만지며 생각했다. 이 회사에 들어올 때 면접에서 팀장은 자신만의 강점이 무엇인지 물었었다. 나만의 것을 물어보던 회사는 들어오는 순간부터 튀어나온 못 같은 행동은 꿈도 꾸지 못하게 만들었다.

몇 번의 의견을 반려당한 뒤 그녀가 깨달은 것은 단 하나였다.

난 사실 특별하지만 자아를 버리고 정체를 숨기고 살아가야 하는 임무를 받은 특수 요원인 것처럼 생각해보자고. 그렇게 생각하면 본인이 만든 기안서가 몇 초 만에 까이더라도, 몇 달을 준비한 기획안이 숨 쉴 틈 없이 무시당하더라도 조금 덜 서러워졌다.

나는 지금 임무수행 중이니까.

오히려 튀면 안 되니까 다시 시키는 대로 해보자. 그렇게 조금씩 색채를 덜어내는 연습을 해왔다.

그러니 이번에도 잘할 수 있을 것이다. 원하지 않는 우스꽝스러운 단체 팀 복을 입고 원하지 않는 어떤 운동이라도 열심히 하면서. 그저 임무 중 하나를 해치우는 것이라고 주문을 걸며 그렇게.

단체 대항전 중 놋다리밟기가 배점이 가장 크다는 소식을 알아온 팀장은 그때부터 올라가는 사람이 중요하다며 누구를 뽑을지 고심하는 눈치였다. 문제는 업무시간에도 오로지 그것을 고심하는 것이었다. 팀원들은 화장실 가는 시간도 아껴가며 일을 끝내려고 애쓸 때 '이 군 달리기 좀 잘했나?' , '윤 대리 우리 팀에서 제일 가볍지?'와 같은 질문을 던지는 꼴을 보고 있노라면 누구라도 화가 치밀어 오르곤 했지만, 그마저도 쉽게 기화되는 물처럼 증발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보기 싫은 꼴이라 할지라도 감정을 낭비할 시간이 없을 정도로 너무나도 바쁜 나날이었다.

그러던 중 일이 터지고 말았다. 간만에 야근 없이 정시퇴근이 가능하겠구나 가늠하던 날.

팀장은 기어코 모두 모여서 체육대회에 대해 한 번 논의해보자는 이야기를 꺼냈다.

모든 이야기는 타이밍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타이밍을 잘 못 잡아도 한참 잡은 날이 바로 그날이었다. 마침 바쁜 프로젝트를 끝낸 금요일 저녁이었다. 누군가는 일에 치여 만나지 못한 지인을, 누군가는 혼자만의 달콤한 휴식을 꿈꾸고 있는 그런 저녁이었음을 팀장은 미처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다.

모두가 눈치를 보며 어떻게 거절 의사를 비춰야 할지 고민을 하던 그 순간 어디선가 날이 선 듯 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윤 대리였다.

"굳이 지금 상의까지 해서 정해야 할 것이 남아 있을까요? 팀 복은 이미 주문을 마쳤고, 제가 제일 가벼 우니까 누가 나갈지 문제라면 제가 올라갈게요"

그녀는 한쪽 어깨에 이미 가방을 들쳐 매고 여차하면 나갈 듯이 빠르고 날 세게 말을 끝마쳤다.

그런 태도에 팀장은 살짝 당황한 것 같았다.

"윤 대리. 오랜만에 열리는 단체 행사에 다 같이 좀 의욕을 보이자는 건데, 그 말투는 마치 불만이 많은 걸로 들리는데?"

말을 끝마치며 팀장은 한쪽 눈썹만 삐죽 올렸다. 눈썹을 올리는 버릇은 그가 지금 화를 눌러 참고 있다는 것을 뜻했다.

"팀장님은 저희가 야근에 시달릴 때 비교적 여유가 있으셔서 모르시겠지만, 이제 겨우 프로젝트를 끝내고 한 숨 돌릴 수 있게 되었어요. 오늘은 이쯤 하시죠"

너무나도 틀린 말이 없어서 토시 하나 빠짐없이 팀장의 양심에 꽂혔을 것이다.

순간 저 멀리서 박 주임이 고개를 번쩍 들고 파티션 너머로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아마 박 주임뿐 아니라 다른 팀 모두가 지금 이 순간 여기를 주시하고 있으리라. 그녀는 어쩐지 본인이 어쩔 줄 모르는 기분이 되어 초조해졌다.

팀장은 감정을 숨길 줄 모르는 사람이었기에 얼굴은 삽시간에 당황과 분노로 물들었다.

"윤 대리. 단체 생활이 그렇게 아니꼬운 사람이었나? 아니면 내가 상사로 보이지도 않게 만만한 건가?

손끝이 점점 차가워져가고 있었다. 그녀는 이야기를 꺼낸 주체가 마치 본인이라도 되는 냥 숨을 죽이고 다음 상황을 기다렸다. 그런 그녀와 다르게 윤 대리는 아주 쉽게 대답을 이어갔다.

"아닙니다. 저는 단체 생활도 참여할 의향이 있고, 팀장님을 충분히 존중하고 이해합니다. 다만, 저희가 정말 단합으로 가는 길이 필요하다면, 그 방식에 대해서도 강압적인 방식이 아닌 모두가 원하는 방식으로 흘러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순간 공기가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사무실의 요란한 키보드 소리도 멈춰있었다. 모두가 일순간 쾌감을 느낌과 동시에 걱정으로 얼굴이 경직되어 갔다.

자존심이 강한 팀장은 본인을 모두가 주시하고 있는 상황에서 사회적 체면도 지키며 모두가 손가락질했던, 심지어 본인조차도 혐오한다고 표현했던 '꼰대 상사'가 되지 않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으리라.

"그래? 그렇다면, 투표를 해보지 뭐. 오늘 남아서 회의를 하는 것에 대해서 다음으로 미루고 싶은 사람? 내가 의견을 묻지 않았던 것이 맞긴 하니까"

어쩐지 자신감이 넘치는 듯한 말투였다.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기라도 하는 듯. 윤 대리 너의 의견이 얼마나 시건방졌는지 내가 보여줄게 하는 의도를 담은 채 고개를 치켜들고 팀원들을 훑어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순간 저 고압적인 시선을 깔아뭉개 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그녀는 높게 손을 치켜들었다.

임무수행 중이라는 생각은 이제 더 이상 못하겠다는 듯 아주 강한 힘으로 천장을 뚫을 듯이.

-

집에 돌아와 맥주 캔을 열며 아까의 일을 복기했다. 자신답지 않은 행동이었지만 어딘가 뿌듯했다. 무언가 어긋나서 갈라져 있던 한 조각을 자리에 맞게 재배치한 느낌도 들었다.

그녀가 손을 들자 팀원들 모두가 기다렸다는 듯이 따라서 손을 들었다.

한 명도 빠짐없이 전부.

윤 대리가 '이제 들어가 봐도 될까요?'라고 건네자 팀장은 마지못해 '그럼 오늘은 모두 해산하지. 프로젝트 고생했고 나중에 다시 날을 잡자고' 팀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윤 대리는 '주말 잘 보내세요' 하며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주머니에 진동이 느껴져 확인해보니 [대박!!!!!!!!!] 수도 없는 느낌표의 향연이었다. 박 주임이었다. 돌아보니 저 멀리서 엄지를 치켜들고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밤 팀장에 대한 꿈을 꾸었다. 체육대회에서 크게 부상을 당해 그 여파로 결국 프로젝트 발표도 제대로 끝마치지 못하는 그런 뒤숭숭한 꿈. 이 꿈을 팀장에게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에 휩싸였다. 누군가는 꿈으로 치부할 수 있는 것. 아무리 찝찝한 꿈을 꾸어도 꿈은 현실과 반대라고 말할 수 있는 것. 이런 것들을 그녀는 할 수 없었다. 뿔이 발현된 이후부터. 스스로 외계인임을 자각한 순간부터. 이것은 능력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는 꿈에서 미래를 볼 수 있다.

그녀의 뿌리가 불확실했기에 뿔이 발현되기 전까진 그녀는 그저 예지몽이 남들보다 맞는 비율이 높다고 생각했었다. 외계인이 아니더라도 인간들도 예지몽을 꾸거나 태몽을 꾸거나 하는 식으로 미래를 맞추는 일은 종종 있으니까. 그래서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살아왔다. 그러나 뿔이 발현되고부터는 능력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외계인 중에서도 소수만이 가지고 있는 초능력.

그 초능력을 부여받은 것이다. 미래의 일을 꿈으로 꾸는 것. 심지어 최근에는 맘만 먹으면 특정 인물에 대한 미래도 꿈으로 미리 볼 수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유 대리에 대하여 꿈을 꾸며 깨달았기 때문이다. 잠들기 전 그가 과연 잘 지내고 있을까 생각하며 잠에 들자 유 대리는 유유자적한 바닷가를 걷고 있었고, 행복해 보였다. 물론, 마지막엔 그가 산호초로 변하는 결말로 꿈에서 깨어나서 능력에 대하여 의구심을 품었다.

그러나 그가 보낸 안부 문자의 같이 보낸 사진에 해변이 찍혀있어서 확신을 했다. 확신이 들자 혹시 유 대리의 초능력은 무엇이든 변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닐까 하며 상상해보았다.

산호초로 변한 유 대리는 산호초가 되어서도 빳빳한 깃이 달린 셔츠를 입을까.

-

팀장이 선언한 다시 잡자는 그날은 빨리 돌아왔다. 그리하여 팀 복을 입고 몇 번이나 누군가는 허리를 숙이고, 누군가는 그 등을 밟으며 뛰었다. 윤 대리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애써 화를 참는 얼굴로 참여하고 있었다. 일로 사람이 미치는 게 짜증이 날까 아니면 일 같지 않은 일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는 게 짜증이 날까 셈하던 그녀의 등에 통증이 느껴졌다. 이대로 가다간 체육대회 전에 허리를 쓰지 못하게 될 수도 있었다.

"다들 왜 이렇게 느려? 젊은 사람들이 나보다 못하는 것 같네. 내가 한번 올라가서 달려볼게"

 말에 누군가 툴툴거리며 '체교과도 아니면서 도대체  저러는 거야' 작게 속삭이는 소리를 듣고 모두가 피식거리며 웃음이 터졌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팀장을 말렸다. 지금  순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본능적으로 튀어나온 반응이었다.

"팀장님! 올라가서 괜히 다치실 수도 있어요"

팀장은 자신을 걱정해주는 부하직원에게 감동을 했는지 들어본 적 없는 말투로 괜찮다며 한사코 거절을 했다.

그럴수록 그녀는 조급해졌다.

"팀장님. 지금 올라가서 다치게 되면 프로젝트 때 팀장님이 발표도 못하시게 될 수도 있어요! 안돼요"

"아니, 지금 초치는 거야? 안 다치게 한다니까 뭘 프로젝트 이야기까지 꺼내서 앞서 나가고 그래. 연습으로 그냥 올라나 가볼게"

모두가 저렇게 애절하게 말려야만 하는 일일까? 하는 의아함을 품으며 그냥 어찌 되든 이 시간을 늘어지게 만드는 이 논쟁이 짜증이 난다는 듯한 눈짓을 보냈고 그녀만이 발을 동동 굴렀다.

기어코 팀장이 올라가서 첫 번째 사람의 등을 밟는 순간 그녀는 기어코 올게 왔구나 하며 눈을 감고 등을 굽혔다. 아마 마지막 차례에 있는 본인의 등은 밟기도 전에 떨어질 것이다. 꿈에선 세 번째 구간쯤에서 그가 떨어졌으니까.

그러나 예상과 다르게 본인의 등에 묵직한 발이 닿는 것이 느껴졌고 고개를 들어보니 팀장은 어느새 완주를 마치고 뿌듯한 눈으로 본인을 응시하고 있었다.

"거봐? 걱정해주는 건 고마 운데 호들갑 떨 필요 없다니까"

그럴 리가 없었다.

단순한 꿈이 아니다. 미래를 투영한 것이다. 그러므로 절대 틀릴 일이 없었다.

그녀는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얼굴을 굳히고 회의 실 밖을 나섰다.

뒤에선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으나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

새파란 색의 티셔츠는 어디서 봐도 눈에 띄었다. 세련된 딥 블루도 아니고 그렇다고 포근한 파스텔 색도 아닌 용달차 색깔 같다고 놀리며 박 주임이 말을 건넸다. 그런 용달차 색깔 티셔츠를 맞춰 입고 시무룩하게 손 그늘이나 만들며 이 시간을 견뎌야 하는 것이 그저 지루 했다.

그날 이후 그녀는 생각한 끝에 자신의 꿈이 체육대회 당일에 벌어지는 일을 미리 본 것이라고 확신했다.

꿈에서 본 대로라면 오늘 팀장은 분명 다치게 될 것이다. 아니 오늘 팀장은 체육대회 중에 부상을 입는다. 자신이 본 미래에 대하여 확신이 있었다.

낯설지만 어느새 스스로를 완벽하게 외계인으로 인지하고 있었다.

교복을 입던 때 말고 이렇게 많은 체육활동을 한 적이 과연 언제인지. 계주, 줄다리기, 피구, 박 터트리기. 행사도 아주 가지각색이어서 정신이 살짝 혼미할 지경이었다. 강렬한 태양과 화려한 색체가 빚어내는 시너지는 강력했다. 자신을 용달차라고 놀리던 박 주임은 고추장처럼 빨간색의 티셔츠를 맞춰 입고 있었다. 다채로운 색채를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면 크레파스들이 정렬을 맞추고 가만히 누워있기만 하다가 오랜만에 운동장으로 대탈출을 한 듯이 나름 자유로워 보이기도 했다.

팀별로 같은 옷을 맞춰 입었어도 객체로 바라보면 노란색이 저 멀리 한 점, 빨간색이 한 점, 파란색이 한 점, 주황색이 한 점, 초록색, 핑크색, 검은색.. 그렇게 점점이 멀어지는 색깔들을 바라보다 아득해져 갔다. 시야가 점점 좁아지더니 검은색 점만 남았다. 자신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철봉을 잡았을 땐 이미 머리가 땅으로 하강하고 있었다.

눈을 떠보니 흰색이 가득 찼다. 색채를 다 잃어버리기라도 한 거야?

"뭐야, 정신이 좀 들어요? 진짜 깜짝 놀랐네"

익숙한 목소리에 옆을 돌아보니 박 주임의 놀란 얼굴이 눈에 가득 찼다.

아마도 의무실인 듯했다. 마지막 기억이 시야가 좁아졌던 걸 떠올리며 또 쓰러졌구나 싶었다.

더위에 약해서 날이 더운 날 야외활동을 오래 하거나 하면 쓰러지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상황을 딱히 묻기보다는 그저 열어둔 창문으로 휘날리는 커튼이나 바라보았다.

"쓰러져서 진짜 얼마나 놀랐는지. 체육대회 정말 이번에 가지가지하는 것 같아요. 이제 내년부턴 안 했으면 좋겠어요. 여기는 쓰러지지. 김 팀장님은 다리 부러져서 실려 갔지"

"누가 실려가요?"

커튼이 휘날리는 모양을 바라보며 열을 식히던 그녀가 박 주임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김 팀장님 놋다리밟기 하다가 떨어져서 크게 다친 모양이에요. 부러졌다고 하는 거 같더라고요? 구급차 타고 실려 가서 체육대회고 뭐고 중단됐어요"

마가 낀 거지. 지금 한 팀에서 두 명이나 아픈 거잖아요. 아무튼 이거 회사에서 외부 활동하다 이랬으니 산재 처리 맞죠 지금?

박 주임의 말을 들으며 소름과 안도가 동시에 찾아왔다.

진짜 맞았다는 사실이 그녀를 놀랍게 했다.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는 사실이 무서워졌다.

앞으로 어떤 미래를 보게 되더라도 과연 견딜 수 있는지 자신이 없었다.

아무튼 정신을 차려서 다행이라며 자신의 차로 오늘은 데려다주겠다는 말을 들으며 짐을 챙기는데, 갑자기 문이 거칠게 열렸다.

"너 뭐야!!"

갑작스러운 소란에 박 주임이 놀란 표정으로 문 쪽을 바라볼 때 그녀는 이미 이렇게 될 줄 예상한 사람처럼 천천히 돌아보았다. 시선을 마주한 곳에는 팀장이 눈에 띄게 씩씩 거리며 땀을 뻘뻘 흘린 채 한쪽 눈썹을 든 채로 한쪽엔 목발을 짚고 절뚝이며 다가오고 있었다.

"너 어떻게 알았어? 내가 떨어질 줄 아는 듯이 말했잖아"

예상 문제를 미리 예습한 학생처럼 그녀에겐 예상답안이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그저 걱정되어서 건넨 말일뿐 이에요. 팀장님은 큰 업무를 맡고 계신 분인데, 다칠까 봐 염려돼서요"

"반드시 안 다는 듯한 확신의 말투였어. 프로젝트도 내가 못하게 되었어. 한쪽 다리 빼고는 다 멀쩡하니까 문제없다고 했는데, 사장이 오히려 그러더군 애초에 내가 맡는 게 탐탁지 않았다고. 좋은 핑계를 제공해줘서 고맙다는 듯이. 다쳤는데 그냥 쉬지 그러냐고. 내가 준비한 걸 옆팀 팀장에게 준다더군. 어떻게 예측했어? 다치는 건 그렇다고 쳐도 프로젝트에 내가 빠지게 될 거라는 걸 어떻게 알았냐고!"

꿈속에서 생략한 부분이 있었다.

사장은 팀장을 탐탁지 않아했다. 애초에 기회를 주기 싫어했다는 것까지 팀장은 정확히 맞췄다. 그리고 하나 더 생략한 부분. 체교과가 아니냐며 비웃었던 그 직원. 사장의 낙하산으로 회사에 들어온 사장 라인이라는 걸 팀장은 알 턱이 없었다. 꿈속에서 그는 일부러 등을 흔들었다. 사장의 사주를 받고 팀장이 떨어질 빌미를 제공했다. 그래서 그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애초에 계획된 결말이었기 때문에. 그렇지만 계획했다 하더라도 숨길 수 있는 명분이야 얼마든지 만들면 그만이었다. 바로 지금처럼.

"왜 이렇게 예민하세요. 그저 누구나 예측할 수 있잖아요. 올라가서 혹시라도 다치기라도 하시면 프로젝트에 참가하기 불편하게 되니까. 거기까지 전 염두에 뒀을 뿐 이에요. 전 오히려 팀장님을 생각해서 전해드린 말씀을 팀장님은 흘려들으신 거죠"

그 순간 팀장은 갑자기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박 주임이 옆에서 말려도 역부족이었다.

팀장은 어깨를 마구 잡이로 잡고 흔들면서 일관되게 소리치고 있었다.

"말하라고! 말해!! 나도 다 짚이는 것이 있으니까 이러는 거야. 내가 누군지 정말 모르니? 그리고 네가 누군지 정말 모를 거라고 생각하니?"

"팀장님 왜 이러세요! 자꾸 이러시면 밖에 사람 부를 거예요!"

사색이 되어 박 주임이 소리를 지르며 팀장을 붙들자, 팀장은 붙잡았던 어깨를 놓더니 결심한 듯 한마디를 내뱉었다.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어. 나 파수꾼이야. 너 외계인이지?"

순간 미친 듯이 웃음이 나왔다. 아연실색한 박 주임에게 해명할 생각 따위는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렇게 화를 냈구나. 파수꾼. 지랄하네 지들이나 파수꾼이지.

우리 입장에선 말이야.

"첩자셨구나? 그래서 이렇게 난리를 피우시는 거였군요?"

첩자라는 말에 그의 눈썹이 더 하늘 높이 치솟으면서 무어라 한마디를 더 내뱉으려 하는 걸 보면서 그녀는 망설임 없이 그 용달차 색깔 티셔츠 가운데쯤을 노리며 손으로 퍽 내리쳤다.

새파란 색과 대비되는 검붉은 피 같은 색의 뿔이 모습을 드러냈다.

예상치 못한 전개라 생각했는지 팀장이 멈칫하며 뒷걸음질 치자 그녀는 더욱더 가까이 붙었다.

잘 보라는 듯 뿔을 더 들이밀며 말했다.

"그래, 나도 뿔이 있어. 이제 어떡할까"

뿔을 감추려고 그렇게 애를 썼는데 뿔 때문이 아닌 다른 것 때문에 정체를 들켜버렸다.

차라리 보여지는 건 감추기가 쉬웠는지도 모르겠다. 본질은 도저히 꾸며낼 수가 없었다.

미래를 볼 수 있다는 사실. 인간과 다른 외계인이라는 사실.

남들과 다르다는 것.

그건 노력이 가상하면 가능한 그런 일이 아니라 그저 당연한 것이라 늘 거기에 그대로 놔두면 될 문제였다. 그래서 고백하기로 했다. 알 수 없는 용기가 열어둔 창문 밖으로 쏟아지는 달빛처럼 샘솟았다.

창문을 타고 바람이 들어와 커튼은 계속해서 힘차게 휘날리고 있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