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보라 속에서 만난 한 사람

by 윤종현


요즈음 힘든 일이 있어 늦은 새벽 홀로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다가 문득 26년 전 한라산에서 조난을 당했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는 14살이었는데 다니던 중학교의 보이스카웃에서 제주도로 여행을 갔었고 일정 중에는 한라산 등반이 있었다.


그때만 해도 젊은 체육 선생님보다 산을 빠르게 잘 오르는 데다 바보 같은 승부욕도 강했던 터라 다 함께 산을 오르던 무리에서 이탈해 혼자서 제일 앞장서며 뛰어오르듯이 한라산 중턱 이상까지 올라갔었다.


철없고 바보 같은 생각에 제일 먼저 정상에 오른 후 제일 먼저 내려올 생각을 하며 잠시도 쉬지 않고 계속해서 뛰듯이 올라갔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린 나이에 한라산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를 너무나 몰랐던 것도 한몫했던 것 같다.


물론 그때만 하더라도 엄청난 체력과 지구력에 산을 오르는 것도 좋아했었고 북한산부터 설악산, 치악산 등 꽤 유명한 산들을 정상까지 뛰듯이 올라갔다 뛰어 내려온 경험들이 많았었기 때문에 등산을 아주 우습게 생각하던 시절이기도 했었다.


당시는 초겨울 즈음이었는데 옷도 엉성하게 입은 채로 한참을 그렇게 홀로 앞장서 올라갔었고 뒤에서 따라올 아이들과 선생님 무리와는 점점 격차가 벌어졌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였지만 아이들과 선생님들이 한라산의 절반쯤 올라왔을 때 날씨도 너무 안 좋아지고 있었고 다들 힘들어하기도 하여 인원 체크만 하고 다시 하산을 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자신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고 크게 걱정을 하였다고 들었었다.


당시에 홀로 산을 꽤 높은 곳까지 오르기 시작하였는데 어느 순간 갑자기 눈이 내리기 시작하였었다. 그러나 멍청했던 자신은 겁도 없이 씩씩대며 산을 계속 오르기 시작하였고, 작게 조금씩 내리던 눈은 어느덧 거센 함박눈이 되어 내리기 시작하였으며 그제야 조금씩 공포감과 무서운 기분이 들기 시작했었다.


정말 무서웠던 건 얼른 빨리 밑으로 내려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순간 어느새 순식간에 거센 눈보라 속에 온 세상이 하얗게 뒤덮이며 올라갈 길도 내려갈 길도 정말 눈 깜짝할 새에 믿기 힘들 정도로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산이 정말 무섭다는 것을 그때 처음으로 몸서리치게 느꼈던 것 같다.


죽음의 공포가 밀려왔고 순식간에 모든 길들이 사라지며 그저 온 세상이 하얗게만 보일 뿐이었으며 해가 질 시간도 많이 남지는 않은 데다 추위까지 몰려오며 온 신경이 곤두섰었다.


순간적으로 정말 여기서 죽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으며 어디가 길인지를 알 수도 없으며 한 발 잘못 디뎠다가는 등산로를 벗어나 잘못된 길로 빠져들 수도 있는 데다 눈은 점점 세차게 내리기 시작하며 앞도 잘 안 보이기 시작했었다.


그때 느꼈던 공포감은 꽤 오랜 시간 기억 속에 강렬하게 남아 있었다.


어쩔 줄을 모르고 벌벌 떨고 있던 순간에 뒤에서 자신의 오른쪽 어깨에 누군가의 손이 올려지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울컥하며 돌아보았는데 건장한 체격에 산악 영화에서 볼 법한 온갖 등산 장비와 배낭, 검은 선글라스와 마스크로 무장한 낯선 등반가가 서 있었다.


그 순간의 감격은 쉬이 잊히지가 않는다.


작은 체구에 옷도 대충 입은 어린아이가 한라산 정상 부근에서 홀로 함박눈에 사라진 길 위에서 공포에 떨고 있던 순간, 그 감정을 모를 리 없는 그 전문 산악인이 그 아이를 뒤에서 발견하고 처음 건넨 인사가 아무런 말 없이 오른쪽 어깨에 손을 올린 것이었으니.


서로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가 어깨에 손을 올려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마음이 전달되었었다.


그를 향해 돌아본 순간 “아.. 살았구나” 싶었던 기억이 난다.


그는 맨 먼저 등에 맨 커다란 배낭을 열고 여분의 등산용 잠바를 꺼내어 자신에게 입혀주었고 보온병에서 뜨거운 커피를 한 잔 따라주어 마시게 하였다.


자신은 너무나 놀란 가슴에 말이 안 나왔었지만 그 역시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는 자연스레 자신을 따라오게 하였고 함께 눈에 덮인 산을 조금씩 내려왔다. 그런데 정말 순식간에 눈에 덮인 산들은 모든 길들을 사라지게 하였었고 어디가 길인지를 도저히 분간할 수 없었는데 그는 그곳을 한두 번 오르는 게 아닌 듯해 보였다.


길이 사라져도 길을 찾아서 내려갈 수 있을 정도로 그곳에 익숙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눈에 덮인 길에서 조금만 잘못 벗어났어도 주변이 절벽과 낭떠러지 천지였으며 그때 그분을 만나지 않았다면 사라진 길 위에서 추운 날씨에 길을 찾아 헤매다 조난을 당하고 얼어 죽었지 않았을까 싶었다.


안전한 곳까지 내려온 후 “감사합니다”라고 말한 후 헤어질 때까지 선글라스와 모자, 마스크 등으로 가려진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보지는 못하고 그렇게 헤어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너무 놀란 가슴에 진심으로 너무나 감사한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던 것 같아 가끔씩 생각하면 아쉽기도 했었다.


죽음의 공포에 벌벌 떨고 있을 때 뒤에서 나타난 누군가의 첫인사가 오른쪽 어깨에 손을 올린 것이었고,


백 마디 말보다 그의 마음이 진하게 느껴졌었기에 그 기억은 강렬하게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걱정 마, 이제 괜찮아..”

라고 말하는 듯하였었다.


문득 다시 떠오른 기억이지만 힘들어하는 요즘의 자신에게도 말해주고 싶다.


“걱정 마, 이제 괜찮아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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