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시작...

by pyj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윤하는 실눈을 뜨며 주변을 살펴봤다. 그녀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은 설희의 책상에서 보던 귀여운 캐릭터로 꾸며진 거실이었다. 그리고 부엌에서 무언가를 만들고 있는 설희의 뒷모습도 보였다. 윤하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김주임님.” 윤하는 설희를 불렀다.

“일어났어요?” 설희의 표정은 전에는 본 적이 없는 밝은 모습이다.

“몸이 말을 안 들어요.” 윤하는 겁이 났다.

“윤하 씨, 괜찮아요. 잠깐 그런 거니까.” 설희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이건 차 냄새예요?”

“네. 지금 윤하씨 주려고 차를 끓이고 있어요. 이거 좋아했었잖아요.”

설희의 대답에 윤하는 더욱 겁이 났다.

“저 집에 가고 싶어요.” 윤하는 겁에 질려 말했지만, 설희는 콧노래를 부르며 윤하의 말을 무시했다. 그리고 이가 나간 하얀 찻잔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차를 가지고 그녀 앞에 다가왔다.

“윤하씨. 이거 마셔요.”

“이게 뭐예요?”

“뭐긴요? 차지.” 윤하는 설희를 밀어내고 싶지만,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러지 말아요. 집에 손님이 온 것은 오랜만이라 너무 반가워서요. 같이 차나 마시며 얘기해요.”

“왜 몸이 움직이지 않는 것에요?”

“좀 전의 차에 족두리를 좀 넣었어요. 세신이라고 하죠. 혹시 아세요?”

“네?”

“좀 지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치사량은 아니니까. 그냥 오늘은 내가 원하는 만큼 좀 이야기가 하고 싶어서요.”

“무슨 얘기가 하고 싶은 거예요?” 설희는 잠시 윤하를 찬찬히 살펴보더니 이내 물었다.

“그날, 내 텀블러에 왜 손을 대었어요.?

”그냥 호기심에...” 윤하는 머뭇거렸다. 자칫 설희의 기분을 나쁘게 해서 변을 당할까 무서웠다.

“그러니까. 왜 호기심이 생겼어요?”

“그냥. 냄새가 나는 것 같아서요.” 설희는 윤하는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자기 손을 그녀의 앞으로 내밀었다. 거기에는 자로 반듯이 그어진 듯한 선명한 상처가 보였다.

“이건 퇴사하는 날 새로 만든 상처예요. 이런 게 제 몸에는 참 많아요. 그리고 나는 반듯한 생활을 좋아해요.”

설희는 다정하게 윤하의 손을 잡았다. 윤하의 달콤한 향수는 차 냄새에 섞여 아무런 향기도 풍기지 못했다. 하지만 설희의 몸에서는 차 냄새와 섞여 미세하게 달콤한 향내도 새어 나오는 것도 같았다. 그건 윤하가 자주 사용하는 목화향 향수 냄새였다.

“김주임님 몸에서 꽃냄새가 나는 것 같아요.” 윤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설희는 전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윤하의 머리를 쓰다듬고 귓불을 만지며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사람의 향기는 죽어서는 지옥의 독내로 바뀌어요. 형형색색 아름답던 빛깔도 회색으로 바뀌고. 그게 죽음이에요.” 그녀의 손은 윤하의 입술로 향했다. 그리고 몇 번 어루만지더니 찻잔을 들어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 뜨겁고 역겨운 차가 그녀의 입술을 타고 입안으로 흘러들었다. 그리고 이내 비릿하고 구역질 나는 차는 쉬지 않고 그녀의 입 안팎으로 넘쳐흘렀다. 윤하는 비명을 지르며 차를 토해내려 했지만, 도무지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숨쉬기가 어려운 고통이 밀려오고 의식이 혼미해져 갔다.

설희는 윤하의 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내 몸에는 반듯한 흉터가 참 많아요.”

윤하는 더는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온몸을 비틀었지만 원피스가 검은 차로 물들 때까지 설희는 찻잔을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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