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7화)

by pyj

설희는 퇴사 후 자주 늦잠을 잤다. 모든것이 무거운 아침에 매일 똑같이 부스스한 얼굴로 이불을 돌돌 말아가며 일어났다. 시간은 참으로 오랫동안 공을 들여 그녀를 무기력하게 만들고 늘 혼자이고 쓸쓸하게 했다. 아무런 자비를 베풀지 않았고 그저 그대로 머물게만 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녀도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어 본 적이 없었다. 스스로에게 다정하지도 살갑지도 않았다.

그녀의 집은 메케한 냄새와 어우러져 지저분한 곰팡이 자국들이 가득하다. 하지만 신경 쓰지 않는다. 이들도 그녀와 함께 길들어진 친구들이고 소소한 흔적들이었다.

그녀는 창문 너머로 조금은 지저분한 노년의 여자와 아무렇게나 웃어대는 중년의 남자들이 삼삼오오 낄낄대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는‘나는 저들보다는 좀 나은가?’ 혼자 중얼거리다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설희가 퇴사하던 날, 탕비실 한 귀퉁이에서 오른손에 조용히 자를 대고 커터칼로 10센티 남짓 상처. 그날, 왼손의 흉터처럼 반듯하고 단정한 상처 위로 붉은 피가 차오르고 있었다. 그때도 그녀는 중얼거렸다.

‘나는 저들보다는 좀 나은가?’




윤하는 달콤한 향수를 자주 사용한다.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달콤함은 호감과 다정함으로 뒤섞여 그녀다움을 만들었다. 옷은 여성스러운 원피스를 즐겨 입었고 사람들의 시선도 즐길줄 알았다. 윤하의 노력만큼 사람들도 그녀에게 다정했고 친절했다. 업무의 부족함을 웃음으로 얼버무려도 그 부족함이 오히려 모두에게 친밀하게 느껴졌다. 그런 그녀에게 설희는 조금 다른 존재였다. 사람들의 시선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옷차림과 구역질 나는 이상한 차에 집착하는 정신병자 같기도 하지만 언제나 바지런한 그녀가 쿨하게도 보였다.

설희가 사라진 후, 윤하는 심술궂은 허전함을 느꼈다. 설희보다 여성스럽고, 설희보다 예쁘고. 설희보다 다정한 윤하를 빛내줄 누군가를 잃은 듯한 허전함과 심심함. 그건 드러내지 못하는 작은 만족감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이 다는 아니었다. 그녀는 참을 수 없이 그녀가 궁금했다. 왜 그렇게 모든것이 다른 걸까?





“부장님.” 윤하는 부장을 찾았다.

“왜?”

“김주임님이요.”

“김설희?”

“네. 혹시 손에 흉터 보셨어요?”

“김주임 손에 흉터가 있었어? 나는 모르겠는데.”

부장은 5년을 함께한 직원의 손에 있는 큰 흉터를 모른다. 그러고는 별문제 아니라는 듯 다시 자기 일에 집중한다. 윤하는 그런 부장의 모습이 현실감이 없이 보였다.

“부장님. 혹시 김주임님 주소 알 수 있을까요? 제가 텀블러를 만져서 일이 이렇게 된 것 같아 너무 죄송해서 한번 찾아뵙고 싶은데 집을 몰라서요.” 그녀의 물음에 부장은 인사팀에 문의하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여전히 표정과 말투에서는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설희의 집은 회사와 멀지 않은 작은 빌라촌에 있었다. 빌라 단지 곳곳에 종량제 봉투가 여기저기 널려있었고, 누가 마신 건지 알 수 없는 쓰레기들이 그 위에 덧대어져 지저분하기 그지없었다. 길바닥에도 누군가 뱉은 침과 담배꽁초가 여기저기 지저분하게 흩어져 있었다. 그런 빌라촌 가장 안쪽이 설희의 집이었다. 동네도 그녀의 차처럼 지저분하고 매캐한 냄새가 났다. 모든것이 설희처럼 쓸쓸하고 지저분하게 닮아 있었다. 서울의 마천루 아래 이렇게 초라한 동네가 꼭꼭 숨겨져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설희의 집은 지하였다. 좁은 방범창 사이로 지하의 자욱한 그늘이 새어 나오는 곳이었다. 그녀는 조금 망설이다 초인종을 눌렀다.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녀는 조금 시간차를 두고 다시 초인종을 눌렀다. 여전히 아무런 대답이 없었지만, 그녀 집의 좁은 문틈 사이로 역겹게 호기심을 끌던 익숙한 차 냄새가 풍겨오는 것을 느꼈다. 윤하는 잠시 미간을 찌푸렸지만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왠지 그녀의 상처처럼 선명하게 그녀를 만나야만 했다.

세 번째 초인종을 누르자 그제야 안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대답했다.

“누구세요?”

“주임님. 저 윤하예요.” 이윽고 현관문이 조금 열리더니 설희의 얼굴과 더욱 진해진 차 냄새가 풍겨왔다.

“여기는 웬일이에요?” 설희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일전에 텀블러 사건으로 미안해서요. 저 때문에 회사도 그만두게 되었는데 제대로 사과를 못 한 것 같아서요.” 설희는 잠시 망설이다 현관을 완전히 열었다.

“들어와요.” 설희는 처음 보는 환한 얼굴로 윤하의 팔을 잡아 집안으로 끌어당겼다.

“김주임님. 잘 지내셨어요?” 윤하는 어색했지만, 설희는 왠지 들뜬 모습이었다.

“마침 차를 새로 샀어요. 이건 냄새가 참 좋아요.” 설희는 분주하게 차를 담아 내어왔다. 비릿하던 차와 달리 담백한 차향이 났다.

“감사합니다.” 윤하는 혀끝에는 흔한 차 맛이 났다.

“이건 무슨 차에요?”

“그냥 중국차에요. 시장에서 팔길래 사서 달여봤어요. 맛이 어때요?”

“맛있어요.” 윤하의 대답에 설희는 싱긋 웃었다. 설희가 이런 평범한 차를 마신다는 것이 이상하리만치 어울리지 않았다.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윤하는 차를 조금 더 마셨다.

“단조롭게 살고 있어요. 마약을 하거나 하지는 않아요.” 설희는 자신의 농담이 마음에 드는지 또 한 번 웃었다. 윤하는 그녀의 웃음이 낯설다고 느끼며 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그러고는 이내 무언가에 질식된 듯 의식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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