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움의 강도 또한 사랑만큼 지독한.
"미움도 사랑도 갖지 마라, 사랑하면 보고파 괴롭고 미워하면 마주칠까 괴로우니"라고 고타마 싯다르타가 가르치셨지요. 하지만 우린 마음이 뽀재지고 파손되는 걸 알면서도 누군가를 애정하고, 또 분노를 참지 못해 누군가를 저주키도 합니다. 통증을 자처하는 것이죠. 그 고뇌가 꼭 끼니처럼 고봉으로 가득 삼시 세끼를 채웁니다. 배가 고픈 줄도 모르겠다니까요.
Signal( Ni Volas Interparoli )↗↘
아마도 우린 "이것이 죽음이구나..."느껴지는 그 순간까지 자신이 밉고 안쓰럽고 답답하고 대책 없어 속이 터질 것 같습니다. 죽을 때까지 자신에 대한 믿음을 못 갖는다는 것이죠. (물론 아닌 사람도 많지만)
어린 날엔 사랑이 너무 많아 마음을 헤프게 썼는데, 이젠 미움이 커져 마음을 탕진합니다. 왜 이렇게 싫은 게 많을까, 마주치기 싫은 것들 뿐일까.
그를 의아해하다 "저주받은 삶인가?"로 자문자답. 결론을 내리고 나면 또 우연 슬퍼지고 말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방랑자 마르셀 프루스트가 스물한 살 때 '내 성격을 보여주는 주요 특징'이란 질문에 답한 문장이 있습니다.
<사랑받고 싶은 욕구, 좀 더 정확하게, 나를 존경해 주기보다 쓰다듬어주거나 차라리 망가뜨려달라는 욕구>라고.
사람은 누구나 타인으로부터 타인으로서 파괴당하고 그 불모지에서 건축물처럼 재건되며 남은 생을 살아간다고 말해주는 것 맞지요.
그가 방황의 끝에서 다시 방황을 시작하며 쓴 작품을 읽고 <버지니아 울프>는 작가 되기를 포기했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소설을 통해 버지니아 울프를 만나게 된 건 그녀 역시 마음을 방탕하고 육신 앓기를 반복해 냈기 때문이겠죠. 그 덕분이겠죠.
그럼 나도 오늘의 이 염병 같은 아픔과 도돌이표 연속인 방랑을 받아들여야 할까요. 싯다르타 같은 성자가 못되니 미움을 털어내지 못함에 반성하지 않아도 될까요.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매일같이 산을 넘는 기분입니다. 고지가 코앞인데도 그냥 드러누워 토끼 잠을 자버리죠. (굳이 정상에 오르고 싶지 않거든요)
그래서 거북이 같은 친구가 필요한지도 모르겠고요.
사실 산은 혼자 넘는 게 아니라 했습니다. 언제 산짐승과 도적떼를 만날지 모르니 벗들을 모으라고 (조상들이) 그랬어요.
팔조령, 육십령, 천명이 고개, 만인재, 백곡 고개 같은 이름은 그렇게 오르내린 사람들 덕에 지어진 이름이죠. 수백수천은 아니어도 산마루 하나 끝까지 같이 넘어갈 친구 만들었으면 인생 성공. 미움도 사랑도 아닌 그저 묵묵한 마음으로만 수십 년을 같이 걸어온 친구만 있으면 봄보다 찬란한 일. Bom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