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직 후 암밍아웃 할까? 말까? 무한반복 고민의 결말은?
암밍아웃, 암 경험자임을 주변에 알리는 일 & 암과 커밍아웃의 합성어.
암 진단 후 대다수의 사람들이 겪는 고민 중 하나다. 환우 커뮤니티에는 지금도 '주변에 암에 걸렸다고 이야기를 해야 할까요?'라는 질문이 빠지지 않는다. 딱히 정답이 있을 수 없다. 사람마다 성격도, 처한 상황도 다르니까. 다만 그 선택은 오롯이 스스로의 판단이었으면 좋겠다. 암환자가 되었다고 괜히 위축되거나, 혹은 그로 인한 차별이 두려워서가 아닌, 순수하게 각자의 의지에 의해서이기를.
용감하면 무식하기도 하고, 성격도 예민한 편이 아니어서 암밍아웃에 대한 큰 거부감은 없었다. 무엇보다 일단 암환자가 됐다는 충격 때문에 남한테 알릴지 말지는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던 것 같다. 자연스럽게 알고 지내던 많은 이들에게 나의 소식이 전해졌다.
꽤 힘들 수 있는 암밍아웃이라는 과정을 나름 수월하게, 크게 의식하지 않고 잘 넘겼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작 치료도 마치고, 머리카락도 다시 자랄 만큼 시간이 훌쩍 지난 뒤에 더 심각한 암밍아웃의 고민에 빠지게 될 줄이야.
복직 후 새로운 업무를 담당하면서, 관련 부서나 거래처 등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일이 많아졌다. 아직 적응이 안 된 서툰 상태여서인지, 예전과 달리 새로운 만남이 어색했다. 특히나 "그전에는 무슨 업무를 하셨어요?"라는 평범한 질문에 나의 머릿속은 우왕좌왕 분주해졌다.
'아, 병가로 꽤 오래 쉬었다고 말해야 하나? 그러면 어디가 아팠다고 하지? 암이었다고 말해야 하나?' 뜬금없는 TMI 수준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사적인 친분도 아니고, 업무로 엮인, 더군다나 이제 얼굴 몇 번 봤을 뿐인데 이런 말을 한다고? 지금 생각하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지만, 그때는 그랬다. 실은 상대방은 그저 가볍게 던진 질문이고, 어쩌면 그다지 대답이 궁금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반대로 만일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어설픈 암밍아웃을 했다면, 상당히 당혹스러운 분위기가 연출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뜬금 암밍아웃이라니. 저 여자가 갑자기 왜 이러지?' 이런 느낌으로.
한편으로는 암밍아웃을 하지 않는다는 게 누군가를 속이거나, 진실하게 대하지 않는 듯했다. 상대방에게 미안하고, 스스로 불편했다. 감추거나 속이는 게 아니라, 그저 말하지 않은 것뿐인데도. 가령 예전의 연애경험이나 학창 시절, 좋아하는 노래, 즐겨 먹는 음식 같은 시시콜콜한 부분을 모두에게 다 이야기하지는 않지 않는가. 어쩌면 나는 암이라는 프레임 안에 머물렀던 것 같다. 내 머릿속에 나를 설명하는 가장 명확한 정체성이 '암경험자'인데, 그걸 오픈하지 않으니 속인다는 죄책감이 들었던 것 같다. '암경험자'는 나를 표현하는 많은 특성 중 하나일 뿐인데.
여하튼 말을 안 하자니 왠지 속이는 것 같고, 그렇다고 말을 하자니 내키지 않았다. 다음에 또 만나서 안 하자니 마음이 불편하고, 그렇다고 입은 안 떨어지는 고민되는 상황의 무한반복. 회의나 미팅에서 테이블에 마주 앉은 나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번뇌가 고민이 있었다는 걸 상대방은 꿈에도 모를 테지.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미안해요. 실은 그때 딴생각했었어요. 그때는 너무 심각한 문제였거든요'
생각지 못했던 두 번째 암밍아웃의 고뇌는 어떻게 해결됐을까?
몇 개월이 지났을 무렵, 거래처 담당자분이 우연히 나의 책(절대 홍보하의 목적은 아니지만, 구매하시거나 읽거나 추천 어느거라도 해주신다면 감사합니다!)을 발견하셨다. 그 뒤 알음알음 소식이 전해지면서 관련 부서에도, 다른 거래처에도 자연스레 암밍아웃이 되었다. 이렇게 자연스러우면서도 효과적인 방법이 있다는 걸 왜 몰랐을까! (절대 책의 홍보나 판매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절대'라는 단어가 들어가니 왠지 냄새가 난다)
업무도, 함께 일하는 분들과의 관계도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지만, 나의 또 다른 정체성을 알게 되었을 때 반응이 어떨지 긴장되고 궁금했다. 역시나 암경험자라 약해 보이거나 어색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기우였다. 오히려 암밍아웃 덕분에 칭찬도 받고, 새로운 것들을 경험하고, 상대방을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었다. 너무 건강해 보여서 생각도 못했다며, 힘든 시간을 이겨낸 의지와 긍정적인 에너지를 좋게 봐주셨다. 거래처분들 중 작가님께 책을 선물 받기도 하고, 미팅 전 작가 자격으로 책에 사인도 해드리고, 양꼬치 집에서 회식을 빙자한 미니 북토크와 책을 들고 떼샷도 찍어보고, 가족 중 암환자가 있는 분들과는 서로 공감하며 위로받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지금 구상 중인 두 번째 책(주제는 암경험자의 사회복귀)이 출간된다면, 한치의 망설임 없이 주변에 폭풍 홍보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앗싸!
* 저처럼 두 번째 암밍아웃을 고민하고 있을 암경험자분들께,
굳이 내키지 않는다면 이야기하지 않아도 돼요. 그건 우리를 설명하는 일부분일 뿐이니까요. 절대 누군가를 속이는 것도, 기만하는 것도 아니니까 불편하거나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요. 시간이 흘러 상처가 아물고, 마음이 단단해지면, 더 이상 눌러도 아프지 않으면 그때 편하게 툭 꺼내놓아요. 여러분의 마음이 따뜻하게 치유되기를 항상 응원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