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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샤 Dec 25. 2023

연차가 '0'개라고? What?

진정한 무적의 출근부대가 되기!

병휴직에서 복직한 지 이제 만 1년. 그 사이 일어난 무수히 많은 이벤트 중 가장 압도적인 건 뭐니 뭐니 해도 '연차'였다. 재발에 대한 두려움이나 커리어 관리의 어려움 같은 고상한 키워드가 아니고 갑자기 웬 연차냐고? 평범한 직장인으로서 삶의 질에 대한 타격과 동시에 심리적 부담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복직을 하든 말든 상관없이 약 5년으로 예정된 후속 치료. 유방암 표준 치료는 마쳤지만 여전히 항호르몬 치료를 위해 정기적으로 병원에 가야 한다. 최소 4주에 한 번, 많은 경우 한 달에 세 번. 검사, 진료, 주사 트리플 세트. 그런데 복직 당일에서야 알아버렸다. 나의 연차는 '0'이라는 걸. 어쩌면 이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복직에 대한 두려움이 훨씬 커졌을 거고, 더 쉴까 심각하게 고민했을지도 모른다. 모르는 게 약이라더니 딱 그 짝이다. 연차가 없다는 건 남의 일이면 그저 안타깝고 그만 일 텐데, 내 일이 되니 슬프기 그지없었다.


본능적으로 눈 뜨면 출근하고, 에너지가 바닥날 때쯤 퇴근하는 출근봇이었던 터라, 따박따박 주어지는 연차는 당연한 줄 알았다. 매년 기본 15개에 근무 기간 2년마다 추가로 1개. 이미 고인 물 수준의 연차라, 조만간 최대치인 25개를 찍을 예정이었다. 비록 재테크는 몰라도, 적어도 연차는 1등이라고 자부했는데..


연차는 공짜로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니라, 전년도에 근무한 대가라고 한다. 우리나라 대형 병원 의료체계의 허와 실, 각종 사회복지제도, 보험 약관, 책 쓰기 및 출간에 대한 지식에 이어 근로기준법까지! 평생 살면서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다채로운 것들을 요 몇 년 새 경험하고 있다. 암, 너란 녀석 정말 대단하구나. 마치 불가능은 없다며, 내 능력의 한계를 야금야금 넓혀주는 것 같아!


구체적으로는 1년 기준 80퍼센트 이상을 근무해야 15개 연차가 주어진단다. 따라서 전년도에 병휴직으로 근무하지 않은 나에게 주어질 연차는 없었다. 그리하여 연차 빵개. 빵도 아니고 개도 아니고 빵개. 이렇게라도 웃어야 하는데, 복직만도 충분히 버거운데 어퍼컷을 후려 맞은 느낌이다. 치료랑 진료는 어쩌지? 당혹감, 무력감, 서운한, 분노, 무기력함 등. 지금은 무뎌졌지만 충격적인 진실을 안 그 순간에는 머릿속이 뒤죽박죽.  


11월에 복직을 했으니 누군가는 "그러면 두 달만 기다리면 휴가가 생기겠네?"라고 해맑게 묻기도 했다.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놀라운 건 휴직의 여파는 그 해뿐 아니라, 다음 해까지 이어졌다. 10월까지는 근무를 안 한 거니까. 결국 복직 다음 해에는 4개월을 근무한 대가로 무려 6개의 연차를 하사 받았다! 정확한 산출 방식은 이해할 수 없지만 좌우지간 생겼다는 게 중요하다.


첫 4개월, 진짜 연차 빵인 기간은 '아파도 아플 수 없다'는 비장한 마음으로 버텼다. 병원으로 빠진 시간은 야근이나 새벽 출근으로 메꿨다. 겨울방학이라 놀고 싶어 하는 아이와도 긴 여행은 불가능했다. 인고의 세월 끝에 춘삼월이 되어 연차가 생겼다. 다만 여전히 배수의 진을 치는 마음으로 1년 더 마음을 다잡았다. 도원결의에 버금가는 출근결의랄까. 혹시나 교통사고가 날 수도 있고, 가족이 아플 수도 있고, 아이 학교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여유 없는 연차에 대한 부담으로 코로나가 걸려도, 몸살감기가 심해도, 일단은 육신을 회사에 옮겨놓아야 했다. 비록 영혼은 가출하여 나는 누구, 여긴 어디의 좀비 같은 상태여도 일단 몸은 자리에 있어야 했다. 설사 아직 아픈 건 아니어도, 아파도 쉴 수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서럽고 슬펐다. 아플 수도 없는 암경험자라니 아이러니하다. 건강과 컨디션 관리가 누구보다도 중요한데.


정작 당사자인 나보다도 동료들이 더 당황했다. 상식적으로 병가 뒤 복직이면 병원에 갈 일이 많지 않냐고. 연차가 더 필요하지 않냐고. 혹시나 본인들이 아플 때도 같은 상황이 되는 게 아니냐며 대신해서 분노를 표출하기도 했다. 그러게 말이에요! 다 맞는 말이에요! 그런데 어쩌죠. 제도가 그렇다네요. 휴...


얼마 전까지 육아휴직도 같은 상황이었다. 아이가 어리니 병원에 가거나 부모의 손길이 필요한 때가 많은데, 육아휴직에서 복직을 하면 동일한 논리로 전년에 근무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연차가 발생하지 않았다. 누가 봐도 불합리한 상황이어서인지, 아니면 저출산 문제 극복을 위해서인지 몇 년 전부터 기본 연차(15개)를 지급하는 걸로 제도가 개선되었다. 아이를 출산하고 비슷한 어려움을 겪었어서인지, 최근에 후배들이 복직 후에 연차를 잘 활용하는 모습을 보면 참 다행이다 싶다.


암경험자 200만 시대, 더군다나 30~40대 젊은 암환자가 늘어나고 있는 만큼 개선이 필요하지 않을까? 앞으로 인구 감소에 대비한 가용 노동력 확보 같은 거창한 대의명분이 아니더라도,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니까. 한창 경제활동을 해야 하는 혹은 하고 싶은 나이니까. 그렇게 함께하는 사회가 되기 위해 살짝만 제도를 역지사지해서 개선하면 어떨까. 작은 변화로도 많은 암경험자들이 사회로 돌아와서 각자의 역할과 자리를 찾아가는데 큰 도움이 될 거니까.    


초중고 12년 개근에 빛나는 성실함과 묵직한 엉덩이의 힘으로 지난 1년을 잘 버텼다. 무적의 출근부대 마인드로! 이제 2개월만 더 견디면 다시 연차부자로 거듭나게 된다. 다만 개인의 노오력이나, 불굴의 의지가 아니라, 누구라도 누릴 수 있는, 자연스러운 제도화가 되면 어떨까. 나의 강인한 정신력에 대해 자뻑 기질 충만해서 자랑할 수 없어도 괜찮으니까. 혹시나 몇 년 후에는 일반 연차 외에도 암경험자를 위한 특별 연차가 자연스레 주어질 날을 꿈꾸어 본다. 일단은 내일도 한파를 뚫고 꿋꿋이 출근을 하기로.


사진 출처 : Pixabay, Dimitris Vetsikas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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