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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샤 Feb 01. 2024

암경험자의 사회복귀, 찐한 현타의 순간들

암경험자지만 괜찮아!

복직 후 눈 뜨면 출근하고, 일을 하고, 가끔 동료들과 티타임도 하는 평범한 직장인으로 돌아왔다. 초반에는 몸도 마음도 어색했는데, 늘 그렇듯 시간이 약이었다. 일상에 스며들어 이전의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이따금 암경험자임을 자각하는 순간을 맞닥뜨린다. 익숙하려야 익숙해지지 않는 상황들. 암경험자 240만 명 시대이지만, 암은 아직은 여전히 낯설고, 심각하니까. 그래서인지 잊히지 않는 몇 가지 에피소드.




Episode #1. 자른 게 아니라 자란 건데요?

부족한 공감 능력의 곱절만큼 파이팅이 넘치는 나의 상사. 아, 신입 때부터 오래 알고 지낸 터라 허물없이 대하고, 장점이 많은 훌륭한 분이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니 일단 이렇게 포장을). 복직을 하며 가장 신경이 쓰인 건 바로 머리. 강력한 항암 약빨 덕에  가느다랗고 힘없던 직모에서 난생처음 개성 발랄 곱슬머리가 되었다. 나름 예쁘게 다듬었지만 왠지 어색하다. 긴장과 주늑든 마음은 이상한 상상의 나래를 폈다. 긴 웨이브 머리였는데, 왠지 사람들이 탈모였던 걸 눈치채지는 않을까. 날 보고 상상하지는 않을까. 혹시나 어색하거나 불쌍해 보이지는 않을까.


겉으로는 태연하지만, 마음은 온 우주를 헤매던 나에게 밝은 인사를 건네는 그분!

"오~ 전에는 머리가 길었는데, 아주 짧게 멋있게 잘랐네"


흠칫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적당히 어색한 웃음으로 감사를 표했다. 한 번은 그렇게 넘어갔다. 얼마 뒤 이제 긴장도 좀 풀리고, 세상 무서울 것 없는(?) 씩씩한 암경험자 모드로 변신 중인 나. 우연히 마주친 복도에서 토씨하나 틀리지 않은 칭찬(?) 멘트가 날아왔다. 이제 당황하지 않으리라. 씩 웃으며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자른 게 아니라, 다시 자란 건데요!" 순간 움찔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러나 역시나 온갖 우여곡절을 딛고 그 자리에 오른 지라 내공이 상당하다. 놀란 표정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여유있고 인자하게 허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라진다. 앗싸, 왠지 이긴 기분!


상사의 활약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나름 배려가 가득 담긴 면담. 성치 않은 몸으로 혹여나 스트레스를 받을까 걱정해 주니 고맙다. 이런저런 이야기 뒤에 이어진 주제는 건강. 나이가 드니 몸이 예전 같지 않으시단다. 여기서 멈추었으면 좋은데, 얼마 전 고지혈증 진단으로 엄청 놀랐다며 심적 타격이 그득한 진지한 눈빛.

네? 마흔에 암 걸린 저에게 한참 선배께서 고지혈을 희귀병처럼 말씀하시면 대관절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는지. 정만 보면 마치 나랑 동급 느낌이라. 남의 손가락 부러진 거보다, 내 손가락에 찧은 게 중하다더니. 그러나 당황하지 않고, 숙련된 직장인 모드로 공감을 가득 담아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끄덕.  위로와 걱정이라는 걸 알면서도 왠지 마음이 편치 않다. 그때만 해도 젊은 나이에 중증에 걸렸다는 서러움과 자격지심이 마음 한 구석에 똬리를 틀고 있었으니까.

이제는 나의 마음이 쭉 펴지기도 했고, 그분의 마음이 진심이었던 걸 아니까 괜찮다. 같이 나이 드는 처지에 앞으로 함께 쭉 건강하시죠!


Episode #2. 직화지만 괜찮아

암경험자에게 또 하나의 난관 회식. 우리나라 회식 문화상 술과 (직화) 삼겹살/돼지갈비는 단골 메뉴다. 술이야 기호에 따라 안 먹는다 쳐도,  메인 음식을 안 먹을 수야 없지 않나. 유난스럽게 프라이팬을 갖고 가서 구워달라 할 수도 없고, 냉면이나 된장찌개만 먹을 수도 없다. 이제는 좀 느슨해져서 먹는 것에 관대(?)하지만, 초반에는 유독 직화 음식에 예민했다. 별다른 식이 관리 없이 아무거나 잘 먹지만, 시뻘건 숯불에 지글지글 익어가는 고기를 상상하면 왠지 모를 죄책감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선배님, 회식 메뉴 때문에 혹시 가리는 거 있으세요?" 이렇게 친절한 배려라니 감동이다. 수줍게 대답했다. "다 괜찮은데, 직화는 조금 그래요. 호홋" 그랬는데 아뿔싸. 첫 회식메뉴 '숯불갈비' 아하하하. 도대체 묻긴 왜 물은 건지. 물론 안다. 후배가 무슨 잘못인가. 회식은 업무의 일부이고, 메뉴 선택의 권한은 그에게 있지 않는 것을.


식당 간판에 선명하게 새겨진 '숯불갈비 전문점'. 내심 '괜찮아, 매일 먹는 것도 아니잖아!'라고 합리화 마인드 장착! 시뻘건 숯불 위 얇은 석쇠에서 지글지글 익는 한우 등심을 마다할 지조 따위는 애초에 없었다. 오우, 내 돈 내산이 안 되는 이런 귀한 음식은 맛있게 먹어야 한다! 마늘처럼 쌈에 싸서 먹는다는 계획은 온 데 간 데 없다. 적당히 노릇하게 구워진 고기에 살짝 소금을 찍어서 쉴 새 없이 입에 넣었다. 고기는 직화에 구워야 제 맛이지!


Episode #3. 너, 비행기 탈 수 있니?

회사를 다니며 가끔 해외 출장을 갔었다. 워킹맘으로서 합법적(?)으로 죄책감 없이 'Me Time'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기회. 해외 관련 업무를 담당할 때는 꽤나 자주 돌아다녔던 흐뭇한 기억. 하지만 갑작스러운 암 진단과 그즈음 급격히 퍼진 코로나. 치료도 그렇고, 전염병도 무섭고, 이러나저러나 몇 년간 비행기를 탈 일이 없었다.

복직 업무는 출장 갈 일이 없기도 하고, 아이들이 크니 예전만큼 Me Time이 간절하지도 않다. 딱히 아쉬울 것도, 원한 것도 아닌데 어디선가 훅 날아든 질문.

"그런데 비행기는 타도 되니?"

네? 뭐라고요?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써든 어택처럼 날아든 질문. 당황스러웠지만, 묻는 이의 표정은 진심이었다. 말투도 눈빛도. 이내 아직 컨디션이 회복되지 않았을까 걱정한 거라는 걸 알았지만 순간 머리가 꼬여버림. 당시에는 어물쩍 웃어넘겼는데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네~ 저 비행기 탈 수 있어요. 탈 수 있는 것뿐만 아니라 좋아도 해요! 비행기만 타나요. 집라인도, 번지점프도 할 수 있고요. 우주선도 태워만 주면 탈 수 있답니다!




복직 2년 차, 이제는 먼저 말하지 않으면 내가 암경험자라는 걸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히려 알고 나서는 깜짝 놀라기도 한다. '이렇게 건강해 보이는데~' 라며. 나 역시도 이제 체력은 조금 저질인 보통 사람으로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그러다 가끔 '아 그래, 나 암경험자였지'라고 깨닫기도 한다. 예전에는 그럴 때면 '왜 하필 나라서' 내지는 왠지 모를 소외감에 혼자 동굴로 들어갔었지만, 이제는 괜찮다. 암경험자인 게 뭐 어때서. 감기 걸렸던 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누군가는 다른 병으로 아팠을 수도 있는 것처럼, 암도 그런 거니까. 정작 당사자는 괜찮은데, 오히려 주변에서 난감해할 때가 있긴 하지만. 이것도 시간이 해결해주지 않을까. 이제 동료들이 나에게 저런 요상한 질문들을 하지 않고, 혹은 하더라도 웃으며 넘길 수 있으니까. 암경험자지만 괜찮아!


Image by CryptoSkylark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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