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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샤 Feb 20. 2024

적응 타임 끝. 이제 현실로 레드썬~!

삶의 또 다른 화양연화를 꿈꾸며

병가 복귀자에서 직장인1로 조금씩 모드를 전환하면서 안정감을 찾았다. 매일 아침 9시, 탕비실에서 향긋한 원두향을 맡으며 커피를 내린다. 하루 한 잔이어서 더 행복한 루틴, 모닝커피. 복직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날, 커피를 들고 자리로 돌아오는 몇 십 초도 안 되는 짧은 순간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었다. 같은 공간에 있지만 나만 외계인이 된 듯한. 그 느낌이 얼마나 강렬했는지, 요즘도 데자뷔처럼 그 기억이 나곤 한다. 이제는 '아, 그땐 그랬지'라며 미소 지을 수 있는 여유를 찾았지만.


암경험자의 사회복귀의 과정에서 한바탕 깊은 감정의 파고를 겪었지만, 덕분에 그 뒤에 찾아온 편안함이 반갑고 소중했다. 다만, 일이 익숙해지기까지는 어쩔 수 없이 시간이 걸렸다. 더듬더듬 천천히. 그래도 생초보가 아닌, 짬밥의 힘인지 어슴프레 조금씩 기억이 났다. 긴 휴직으로 리셋이 된 줄 알았는데, 본투비 월급쟁이가 된 듯한 느낌이 묘하다. 시간이 갈수록 조금씩 자신감을 찾으면서, 이제 평범하고 무난한 국면에 접어든 줄 알았다. 하지만 삶은 항상 예측할 수 없는 반전이 있어서 더 매력적인 걸라나. 난 그냥 무난해도 괜찮은데...


한여름 무더위와 함께 맞이한 현실 자각 타임. 연차 없이 일과 치료를 병행하며, 달라진 환경과 몸에 적응하느라 힘들었던 시간. 긴장이 풀려서일까. 날씨 때문인지 그나마도 저질인 체력이 급소진되고 유난히 몸도 마음도 힘들었던 어느 날.  


이제 복직이라고 하기 무색한 어느덧 9개월 차 직딩의 매너리즘인지, 살짝 비겁하지만 0.5인분을 꿈꾸었던 암경험자의 기대가 어긋나서인지, 잘 나가지는 않지만 좋은 선배가 되기도 어렵다는 걸 깨달아서인지, 일과 치료, 하고 싶은 일들이 뒤죽박죽 엉켜서 다시 시간에 허덕이는 워킹맘의 삶에 던져져서인지, 이도저도 아니면 복용 중인 항호르몬제가 몰고 온 통제불가의 우울감 때문인지, 이유도 모른 채 마음이 저 밑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괜히 심란한 마음에 잠을 뒤척이고, 다음 날 피곤함에 절어있던 아침. 차라리 뭔지 모를 때는 그냥 그런가 보다 무턱대고 할 텐데, 어느새 좀 익숙해져서 '왜요?'를 외치고 있었다. 유난스레 일의 당위성을 중요시했던 나. 하지만 납득이 되지 않는 일들은 계속 생기고, 심지어 납기로 쪼이기도 했다. 이유와 목적, 방향을 잃은, 여기저기 전달되다가 정체를 잊어버린 일들. 물론 어떤 조직이든 규모가 커지면 그렇다지만, 복직 후에 느끼는 갑갑함과 관료주의는 더욱 심했다. 어쩌면 원래도 그랬는데, 오랜 기간 내부에 있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제삼자로 변신했다가 돌아오니 더 고통스러운 건지도. 여하튼 이게 바로 레알 현실, 진짜 직딩으로 돌아왔다!

 

휴가로 꽤 오래 자리를 비운 동료. 내 딴에는 쉴 때는 맘 편하게 해 주려고 연락도 하지 않고 대응을 해주었다. 내 일도 어설픈데 오죽 힘들었을까. 그랬는데 돌아와서 처리가 잘못되었단다. 직접 뭐라고 하는 건 아니지만 서운하고 당황스러웠다. 이럴라고 내 시간, 에너지 써가며 해준 건 아닌데. 물론 실수했을 수도 있지만, 이건 아닌데. 호의로 호구가 된 느낌. 설상가상 그날 따라 각종 업무 연락과 자료 요청이 쏟아졌다. 메신저, 전화, 메일 여긴 놀이터가 아니라, 전쟁터라규!


그렇게 에너지를 소진하고 정신이 너덜너덜 해질 무렵, 애매하게 꼬여있는 업무에 대한 상사의 가이드. 혹여나 자존심이 상하지 않는다면, 그냥 점잖게 조금 뒤로 빠져 있는 것도 좋은 전략이라는 꿀팁(?)을 알려준다. 굳이 나서서 일을 어렵게 만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의 다른 버전. 아, 내가 너무 나댄 건가. 설마 예전에 하던 거 십 분의 일도 안 하고 있는데...


복잡한 생각이 머리에 꽉 찬 순간, 현실자각의 정점에 도달했다. 지금의 상황과 포지션. 암경험자인 것만도 차고 넘치는데, 연차도 무겁고, 한 때 혈기왕성했던 부서원. 항호르몬 치료로 여성호르몬을 완벽 차단한 여파인지 갈수록 뻔뻔하고 괄괄해지는 아줌마. (아, 물론 치료 중이어도 여전히 조신하고 나긋나긋한 분들도 많습니다!) 게다가 고집도 꽤 세다.


상대방을 알고 나를 백전불태라더니, 요즘 말로 메타인지가 되고 보니 상황이 좀 명료해진다. 회사는 정의 구현하는 곳이 아니다. 절대적으로 옳은 것도, 또 틀린 것도 없다. 그냥 나의 생각일 뿐, 그게 아니라고 해도 대세에 지장은 없다. 이제 힘 좀 빼고 살살 부드럽게 조용히 가자 해놓고, 본능이 참 무섭다. 전생에 폭정에 항거하던 조선시대 선비도 아니고 쫌!




암 진단으로 어느 날 갑자기 휴직계를 내고 사라져도, 부서도 회사도 잘도 굴러갔다. 물론 항상 잘 되기를 바랐다. 그래야 보너스도 나오고, 연봉도 올라갈 거고, 오래오래 다닐 수 있는 곳이 될 거니까. 다만 애초에 머리로는 알고 있었는데, 막상 직접 겪으니 섬찟했다. 거대한 기계의 부속품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더 무서운 건 그걸 알면서도 또다시 누렁소처럼 돌아가려고 하는 내 모습. 그렇다고 절대 회사가 싫은 건 아니다.  아직은 이런저런 이유로 직장인이고 싶으니까. 힘들 때는 힘든 것만 보이지만, 대체로는 무난한 시간들이기도 하고.


잘할 수 있는 걸 즐겁게 하면서 돈도 받을 수 있다면 금상첨화지만, 세상에 그런 경우가 얼마나 될까. 즐거우면 돈을 받을 게 아니라 내야 맞는 거지. 책상 앞에 떡하니 붙여 놓은 문구 '언젠간 잘리고, 회사는 망하고, 누구나 죽는다'(<언젠간 잘리고, 회사는 망하고, 누구나 죽는다> 저자 이동수)


이제부터 회사를 대하는 바른 자세. 예전처럼 짝사랑으로 애면글면하지 않기, 적당한 거리와 적당한 매너로 적당한 관계를 유지하기, 실체 없는 회사에 매달리지 않고, 좋은 사람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기, 언젠가 쏘쿨하게 작별할 수 있도록 차근차근 내 것을 만들어가기. 지식이든, 기술이든, 노하우든 내 안에서 키우고 쌓아서 오롯이 내가 주인일 수 있도록. 아, 물론 1인분 몫은 기본이다


한 때 누구보다 열심히, 아낌없이 에너지와 노력을 쏟았었다. 자신감도 넘쳤고, 성과도 있었고, 무엇보다 스스로 느꼈던 성장과 성취감은 짜릿했다. 정신없이 달리는 동안 놓친 것도 있었지만, 그래도 순수한 열정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 감사한다. 덕분에 이제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직장인으로서의 시간을 이어갈 수 있을 것 같다. 반짝이는 기억으로 남아있는 과거의 '화양연화'를 회상하며, 앞으로 다가올 더 반짝일 '화양연화'를 꿈꿔본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일이 어떻네, 회사가 어떻네 주절주절하는 것조차 배부른 고민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힘겨운 치료를 받고 있고, 누군가는 다시 일터로 돌아가고 싶을 테니까. 그저 암경험자로 존버하며 직장에 이름 걸어 놓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잘하는 거라고 세뇌하며 자신감 뿜뿜. 잊지 말자 범사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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