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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샤 Feb 27. 2024

이것은 건망증인가, 케모브레인인가.

중요한 건 바로 지금 이 순간!

케모브레인, 항암 치료 후 흔히 나타나는 인지적 기능의 저하 증상. 결정을 담당하는 뇌의 특정 부위에 에너지 사용이 현저하게 줄어들어 뇌기능의 변화를 가져옴으로써 정신이 멍해지고 생활기능이 저하되는 증상.(네이버 지식백과)


한 마디로 자주 깜빡거리거나, 기억력이 떨어진다는 뜻이다. 암순이와 굿바이 하기 위한 혹은 다시 만나지 않기 위한 값비싼 대가인 셈이다. 치료를 마친 뒤 ‘이제는 암환자인 것도 모자라서 머리까지 나빠진 건가’ 자괴감이 들기도 했지만, 조금씩 나아지겠지 셀프로 토닥토닥.


차츰 적응이 되니 건망증인지, 케모브레인인지 도무지 분간할 수가 없다. 그 와중에 경계 선상에서 유리한 쪽을 취사 선택하는 처세술까지 익혔다. 가령 남편이 기억을 못 한다고 핀잔하면 “치료 후유증으로 힘든 아내를 구박하네. 아이고 동네 사람들~”이라고 외쳤다. 오버액션 토끼처럼 오두방정을 떨면서 서러운 감정 표출하기. 졸지에 나쁜 남편을 만들어서 미래의 공격까지 원천방어하기. 하지만 친구나 지인들과 약속을 잊어버리거나, 실수를 하면 새침하게 “어머, 요새 내가 왜 이러지~ 한 번씩 깜빡하네”라며, 우아하게 건망증으로 탈바꿈한다.


몸소 배운 삶의 지혜 덕분에 그럭저럭 적응하면서 큰 불편함 없이 지냈다. 그랬는데 역시나 암경험자로서의 일상에 찾아온 변곡점 복직. 그것이 문제로구나. 다시 일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생활의 반경도, 인간 관계도 넓지 않았다. 일을 다시 시작한다고 깜빡거리던 뇌가 갑자기 멀쩡한 상태로 돌아올 리 없다. '여긴 회사잖아! 정신 차리고 일해야지'라고 아무리 다그치고, 세뇌를 해본 마음뿐. 노오력만으로 안 되는 있는 것처럼, 마인드 컨트롤만으로 되지 않는 것도 있다. 


그래도 혼자 하는 일은 까맣게 잊어버리거나, 혹은 ‘내가 도대체 왜 이랬지’ 싶을 만큼 실수를 하더라도, 크게 민폐를 끼치지는 않았다. 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니고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지 라는 유연함을 가장한 뻔뻔함으로 언제 그랬냐는 듯 슬쩍 수습하고는 했다. 문제는 누군가와 함께 하는 일.


“어머? 제가요? 제가 그런 말을 했다고요?”

아, 애써 다독여서 꽁꽁 숨겨놓았던 자괴감이 다시 등장했다. 당황스럽다. 며칠 전에 미팅을 했다. 미주알고주알 한참 얘기한 상황은 분명히 기억나는데, 디테일이 사라졌다. 내가 무슨 말을 했었지? 나만큼이나 당황한 상대방의 기색이 느껴진다. ‘아니 이 여자가 왜 이러지? 설마 장난하나?’ 내지 '해준다더니 이제 와서 말을 바꾸는 건가?’ 사이 어딘가에서 열심히 탐색을 하는 느낌. 얼굴을 맞댄 상황이 아닌 게 감사할 따름이다.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말 바꾸는 거 극혐 해요. 전 초지일관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진짜 기억이 안 나요’라고 허공에 외쳐본다. 영화 <내 머릿속의 지우개>도 아니고 이럴 수가... 급히 수첩을 펼치고, 그날의 기록을 찾는다. 내가 써놓고도 알아보기 힘든 (혹자는 모스 부호라고 할 수도 있는) 글자들을 째려본다. 아~ 생각났다! 힌트가 주어지거나 곰곰이 생각했을 때 떠오르면 건망증, 전혀 기억이 안 나면 치매라더니. 순간 놀라고 당황한 마음이 감사함으로 충만해진다. 잊어버리는 건 괜찮다. 언제고 다시 기억만 나면 된다. 건망증이라서 고맙다. 


복직 후 몇 번의 당황스러운 상황을 겪은 뒤로는 열심히 적는다. 기억을 끄집어내기 위한 단서를 남겨 놓기 위해, 모른 척 말을 바꾸는 신뢰 없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다행히 당황해서 동공 지진 상태로 멈추어 있던 초보에서 이제 당당하게 대답하는 여유도 생겼다.


“나중에 제가 딴 소리 안 하게, 꼭 메모하세요. 특히 저한테 불리한 건 꼭 적으시고, 메일로 보내주시면 더 좋아요” 혹은 “아 그랬었군요! 그때 또 어떤 얘기를 했었죠?"라며 자연스러운 떠넘기기 전략을 구사하기도 한다.


며칠 전 저녁, 양치를 했나 안 했나 갸웃갸웃. 했어도 한 번 더 하면 좋지 뭐. 양치를 하고 나니 이제는 샤워를 했나 안 했나. 몸에 물을 적시면서도 갸웃갸웃. '따뜻한 물 너무 좋아~'를 외치며 비누칠을 하는 순간 싸한 느낌. 불과 2시간 전에 똑같은 순서로 따뜻한 물에 몸을 적시며 행복했던 느낌이 데자뷔처럼 떠올랐다. 샤워 후에 정성스럽게 로션을 바르고, 잠옷을 입고, 수건과 속옷을 빨래통에 넣었던 모습까지 파노라마처럼. 


난 씻고 또 씻는 깨끗한 여자라고 정신 승리를 시도했지만, 이래서야 이  험한 세상 어찌 사나 급 한탄 모드로 직진. 자리를 내어주지 않으려고 눌러두었던 자괴감이 어디선가 불쑥 튀어나오려는 순간, 이건 아니야 스톱! '이번에도 결국 생각이 났잖아! 씻은 걸 잊을 만큼 글쓰기에 몰입했던 거니까 완전 멋있어!'라고 급 방어막을 펼쳤다. 


예전만큼 잘 기억하지 못하는 지금의 상태가 단순히 건망증인지, 아니면 치료 후유증인 케모브레인인지 확인할 방법은 없다. '너만큼 나도 깜빡깜빡하거든~'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주위에 꽤 많은 걸 보면, 노화의 자연스러운 현상인지도 모르겠다. 20~30대 청년기의 정점을 찍고 조금씩 기억력이 쇠퇴하는, 다른 말로 풍부한 경험과 연륜으로 승부하는 40대가 되었으니까.

 

부끄럽지만 한 때 냉소적으로 케모브레인을 탓한 적도 있다. 내가 한 일을 스스로 기억하지 못하는 답답하고 당황스러운 마음에. 머리카락도 모자라, 총기(적어도 스스로는 있었다고 믿고 싶다)까지 빼앗아 간 거냐고. 실은 암과 상관없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문제인데, 괜히 탓할 대상을 찾고 그 뒤로 숨은 건 아니었는지. 설사 케모브레인이라고 한들 어쩌겠는가. 과거로 돌아가서 후유증이 무섭다고 항암 치료를 선택하지 않을 것도 아니고. 그때도 나름 최선을 다 했고, 지금의 이 상황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 된다. 기억을 또렷이 하든 그렇지 않든,  여전히 소중한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있으니까.


조발성 알츠하이머로 기억을 서서히 잃어가는 모습을 담은 영화 <스틸 앨리스>. 주인공 앨리스는 자신에게 닥친 슬픈 현실을 담담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한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야 한다는 그녀의 말.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알 수 없지만, 현재는 오롯이 나의 것이다. 건망증이든, 케모브레인이든 고민은 그만하고, 지금 내 품에 주어진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려고 한다. 

* 그런데 오늘 아침에 뭐 했는지 기억 안나는 건 안 비밀~

 

So live in the moment, I tell myself. 
It's really all I can do.
지금 이 순간을 살라고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전부니까요
Image by John Hain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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