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타샤 Feb 24. 2024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 그건 바로...

종이컵 포비아 극복기

우연히 BTS정국의 미국 토크쇼(NBC 더투나잇) 출연 영상을 보았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게 뭐냐는 질문. 한참 고민하며 왠지 주저하는 표정으로 망설이던 그의 대답은 바로 ‘전자레인지’. 멋쩍은 지 그도 웃고, 객석에서는 폭소가 터졌다. 나름 그만의 이유가 있었다. 소리를 내며 뱅글뱅글 돌다가 갑자기 펑하고 터져버릴 것만 같아서. 어릴 때도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가장 무섭단다.


같이 깔깔거리며 웃다 보니 느낌이 싸하다. 마치 '네가 웃을 수 있니?'라는 듯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출현했다. 영상이 끝날 무렵 머릿속에 떠오른 그것. 보는 동안 서서히 차오르는 긴장감. 동시에 걱정과 불안, 불길한 시나리오가 펼쳐지게 했던 주인공은 바로 종이컵. 뜬금없음의 레벨은 전자레인지와 막상막하일 듯. 그러나 나도 나만의 이유가 있다! 다시 생각하니 어이없지만, 당시에는 지극히 옳았던 나의 종이컵 포비아의 사연은 이렇다.


암환자가 되고 ‘발암 물질’이란 단어에 예민해졌다. (물질 자체가 아니라 단어라고 표현한 건, 그냥 마음만 그랬고 실질적인 변화나 노력은 그에 상응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평범한 일상에 그것들이 그렇게나 많은 줄 몰랐다. 이전까지 무심히 지나치던 것들이 눈에 보이고 인식하게 되었다. 담배, 술이야 그렇다 치고 가공육, 미세먼지, 세제, 방향제, 살충제, 각종 식품 첨가물, 화장품까지. 이 정도면 발암 물질 Free 생활은 불가능하지 싶다. 혼자서는 어떻게 잘 피해본다고 쳐도, 집안에서만 살 수는 없고, 모든 걸 자급자족할 수는 없으니까.


모르는 게 약인지, 무지할 땐 괜찮더니 알고 나니 겁이 났다. 다행히도 평범한 보통사람1 이라서, 시간이 갈수록 무뎌졌다. 굳이 따지면 비암경험자의 평균보다 살짝 민감한 수준이랄까.(평균이라 표현한 건 암을 경험하지 않아도 놀라울 정도로 건강한 라이프를 추구하시는 분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랬는데 암경험자로서 터닝포인트인 복직으로 다시 두려움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많고 많은 안 좋은 음식 중에 직화, 이런저런 좋지 않은 생활 습관 중 종이컵이 당첨되었다. 이전까지는 선택적으로 조절할 수 있었지만(메뉴 선택과 대체품), 그게 어려웠어서일까. 복직 후 달라진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긴장과 걱정이 엉뚱하게 종이컵이라는 사물에 응축하여 표출된 걸까. 이도저도 아니면 저거 두 개만 잘 지키면 나름 신경 쓰며 잘 케어하고 있다는 위안을 빙자한 자기 만족감을 얻고 싶어서일까.


실은 종이컵이 왜 그렇게 안 좋은지 객관적이거나 정확한 이유는 잘 몰랐다. 그냥 상식적으로 스테인리스나 유리보다는 좋지 않을 것 같았다. 주변 암경험자들도 종이컵을 사용하지 않기도 하고. 진단 뒤로 되도록 텀블러나 컵을 이용하고 있다. 복직 후에도 사무실 책상에는 나와 꽤 오랜 기간을 함께 한, 약간 올드하면서 단단한 느낌의 유리컵이 있다. (쓰다 보니 컵도 주인 캐릭터를 닮는 건가. 투박한 투명 뚝배기 느낌) 다만 문제는 거래처와의 외부 미팅.


회식은 그리 자주 하는 편이 아니라서 직화는 적당히 패스해 버렸지만(맛있게 먹었다는 뜻), 종이컵은 달랐다. 도심의 직장인이라면 건물 내에서 미팅을 하니, 개념 있는 차도녀인 양 에지 있게 텀블러를 시도해 볼 텐데. 사무실 건물에서 나와 꽤 걸어서 안검색대까지 통과해야 한다.  텀블러를 들고 그 여정을 가는 상상만으로도 노노~ 그건 마치 직화구이 회식에 프라이팬을 들고 가는 듯한 느낌.


맨날 마시는 것도 아니고, 어쩌다 한 번이니 선택적으로 쿨하게 받아들여도 좋으련만, 그때의 나는 그게 뭐라고 그렇게나 어려웠다. 가뜩이나 긴장된 첫 미팅의 기억이 아직도 선하다. 음료를 주문하는데 찬 거 vs 따뜻한 거. 이제 4년 차가 지나니 찬 물도 벌컥벌컥 잘도 마시면서 또 이런 때에만 안테나를 바짝 세운다. 진중한 내적 고민의 시간. 찬 거는 차서 안 좋고, 종이컵은 그냥 안 좋고, 진퇴양난. 손도 시리고 일단 따뜻한 걸 골랐다.


나름 신중한 결정에 뿌듯해했다. 종이컵에 담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를 보기 전까지는. 마치 영화에서 비밀의 문을 열면 또 다른 차원의 세계가 나타나는 것처럼, 갑자기 머릿속에 펼쳐진 한 편의 파노라마. 미리 생각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상상력이 좋았다니! 순간 종이컵 안의 커피 속이 수천 배로 확대된다. 뜨거운 커피가 컵 안쪽 면의 코팅제를 서서히 녹인다. 종이가 연결된 이음매 사이로도 스며든다. 코팅제에 들어있던 이름을 알 수 없는 각종 유해한 것들과 접착제에 사용된 또 다른 유해한 것들이 소록소록 떨어져 나온다.


떠다니는 작은 알갱이 하나, 둘, 셋.... 어느새 보이지 않고 커피 속으로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간다. 천천히 향을 음미한 입술을 대고 홀짝이는 순간 와르르 입속으로 딸려오는 그것들. 몸속에 차곡차곡 쌓여간다. 커피가 아니라 일을 하러 온 건데, 집중할 수가  없다. 눈앞에 놓인 무서운 종이컵.


그렇게 무서웠으면 그냥 안 마시면 될걸. 그런데 그 순간 주위 사람들은 맛있게 음료를 즐기는 게 보인다. 종이컵의 망령에 사로잡힌 나만 빼고. 아 놔... 하긴 대체로 그렇다. 별 것도 아닌 상황에서 느껴지는 암경험자의 상실감, 소외감. 진정한 갑툭튀. 종이컵을 노려보며 날을 세우다가, 또 한 모금만 마실까 고민하다가, 다른 사람들을 보며 자괴감에 빠지다가, 그렇게 한 시간이 흘렀다. 한 시간의 미팅. 아직 업무가 익숙지 않아 초집중을 해도 모자랄 판에 도대체 뭐 한 거니.


다시 떠올려도 어이없고, 웃프고, 너무나도 생생했던 그날의 기억. 지금도 종이컵을 보면 가끔 무의식적으로 공포의 파노라마가 펼쳐질 조짐을 보이지만, 이제는 '응 , 아니야'라고 토닥이며 누를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카페에서는 병에 든 음료도 판매하고 있었다. 너무 긴장해서였는지 보이지 않았을 뿐. 한편으로 요즘에는 미세플라스틱이 화두라 찬 음료를 담은 플라스틱 컵도 뭐... 이런 이유로 현대 사회에서 건강하게 살기란 쉽지 않나 보다. 그래도 일단 텀블러와 유리컵 사용하기. 몸도 생각하고 환경에도 좋고. 단, 친환경 표방하면서 시즌마다 신상 텀블러 구매하시면 안돼요! 


보통 다른 주제(영양제, 운동 등) 괜히 암경험자 셀프리마인드가 될까 굳이 나서지 않는데, 일회용 컵을 하루종일 텀블러처럼 쓰는 동료를 보면 오지랖을 펼치고는 한다. 둥둥 녹아 나온 그것들은 내가 먹어도, 누가 먹어도 안 좋으니까. 우리 같이 건강합시다!


Image by Marta Simon from Pixabay


이전 11화 적응 타임 끝. 이제 현실로 레드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