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타샤 Mar 15. 2024

새옹지마 & 스토리메이킹으로 재탄생한 아름다운 과거

정신승리라고 해도 괜찮아! 내가 행복하다면

인생지사 새옹지마

‘인생의 화복, 즉 행복과 불행은 변수가 많으므로 예측하거나 단정하기가 어렵다. 즉 행복과 불행은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다’


왠지 나와는 거리가 먼, 연배가 훨씬 더 많은 어르신들할 법한 말이라 생각했다. 앞만 보고 달리던 삼십 대, 나한테 유리한 건 한없이 기쁘고, 불리한 건 서운하고 언짢기만 했다. 중년이라 하기는 멋쩍지만 어느덧 사십 대가 되었고, 덤으로 암까지 얻었다. 갑자기 강제로 멈춰진 건 싫었지만 덕분에 잠시 고개를 돌려 지난 시간을 돌아볼 수 있었다.


‘노력으로 안 되는 일은 없다’는 막무가내 정신에 엉덩이 힘 하나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근면성실함으로 참 열심히도 살았다. 열심이지 않았던 적을 떠올리기 힘들 만큼. 그렇게 자신만만하고, 승승장구(그게 무슨 의미인지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를 기대했던 삶은 아이의 출산과 함께 첫 변곡점을 맞았다. 부기도 빠지지 아 임부복을 입고 3개월 만에 복직을 했다. K워킹맘에 걸맞은 전투적인 삶이 시작되었다. 일을 통한 자아실현, 성취감 같은 이상적이고 고급진 욕망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일단 ‘그만두지 않고 버티기’로 목표가 수정되었다. 이 악물고, 때때로 울며 버틴 시간들. 이때 장착한 존버 마인드는 이후 삶에 힘든 고비가 찾아올 때마다 참고 견딜 수 있는 든든한 자산이 되었다. 보태어 목표를 달성하며, 아이들도 건강하게 잘 자랐으니(실은 친정엄마가 키웠지만) 스스로 이보다 장할 수 없다.


20대부터 품어온 해외살이와 가방끈에 대한 막연한 동경. 회사에 충성한 보답으로 기대했던 해외 파견도, 대학원 과정도 눈앞에서 기회를 놓쳤다. 아무리 봐도 납득할 수 없어 억울하고 화가 났다. 힘든 시간을 보내고서야 누군가를 탓할 일이 아니었음을, 오히려 나의 생각에 오류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몇 년 후에는  암 진단을 받았다. 만일 기회(라고 생각했던)를 잡았다면 더 늦게 발견했거나, 혹은 과로로 상태가 더 안 좋았을 수도 있다 생각하니 아찔하다. 그때는 그것만이 최선이라 믿었는데, 아닐 수도 있다는 뒤늦은 깨달음. 


이도저도 안되고, 몸도 마음도 지쳐서 깊은 고민 끝에 결정 뒤늦은 육아휴직. 아등바등 쌓아 올린 커리어에 대한 아쉬움, 열정을 알아주지 않는 조직에 대한 원망. 시작은 좀 서글펐지만, 마무리는 해피했다. 도망치듯 택한 그 시간 동안 무엇보다 소중한 것들을 얻었다. 부족했던 엄마로서의 시간을 채울 수 있었다. 특히 아이들은 필리핀에서 한 달 살기의 추억을 아직도 이야기한다. 모두 다 한창 달리는 시기에 휴직을 결심할 만큼 번아웃이 오지 않았더라면, 삶의 방향에 대해, 누구도 책임져주지 않는 노후의 중요성에 대해 깨달을 수 있었을까. 그저 매일 출근하고, 매달 월급을 받으며, 막연한 불안함과 두려움이 깔려있는 모래성 위에서 쳇바퀴를 돌며 소모적인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제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는 거야’라고 희망에 차서 뿜뿜 하던 그때, 더 강력한 것과 맞닥뜨렸다. 아직 절반도 살지 않았으니(내 나이대의 평균 기대 수명은 90세에 육박한다)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지만(더 안 생기면 좋겠다!) 최대 이벤트인 암순이. 그저 착하게 열심히 살았는데 왜 하필 나냐고, 분노, 원망, 후회, 좌절, 슬픔, 상실감, 질투, 자책, 두려움, 걱정, 자조 등 형용할 수 있는 모든 부정적인 감정이 한바탕 훑고 지나갔다. 그랬는데 그 시간들을 견디고 돌이켜보니 그로 인해 얻은 셀 수 없이 많다.


잘 자고, 잘 먹고, 잘 내보내는 일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세 가지가 다 안되는 상태를 경험하며 절실히 깨달았다. 이런저런 역할에 치인 모습이 아닌, 나를 중심에 두고 건강하고 지속가능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도. 아마 이런 계기가 아니었다면 여전히 잠을 줄여야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는 거라 착각하며 잠재 기대 수명을 깎아먹는 것조차 몰랐을 것이다. 길어지는 치료로 몸도 마음도 바닥을 치지 않았던 들, 아픈 손톱을 밴드로 감싸 살살 구슬려가며 자판을 두드릴 투지를 발휘할 수도,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소통하는 즐거움을 느낄 수도, 내 이름 석자 박힌 책을 소장하는 영광을 누릴 수도 없었을 거고. 치료 중 부동산 투자로 자산을 늘린 지인들을 보며 부러움과 질투에 빠졌지만, 불과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역전세로 힘들어하는 걸 보게 되었다. 강제 스톱 상태가 아니었다면 어쭙잖은 재테크 지식이 무시무시한 결과로 돌아와 회복 불능의 상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이제 암도 잘 견뎌낸, 앞으로 어떤 힘든 시련이 닥쳐도 슬기롭게 버틸 수 있다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었다.


어느 시점에 억울하고 화나고 서운했던 많은 일들은, 돌이켜보면 나를 성장하게 하고, 오히려 더 큰 불행을 비껴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항상 나쁘기만 한 일도, 항상 좋기만 한 일도 없다. 삶이 항상 그렇듯이, 언젠가 예상치 못한 시련이 닥치겠지만, 이제 조금은 덤덤하게 받아들이고 묵묵히 견뎌보려고 한다. 그러다 보면 또 시간은 가고, 돌이켜보면 한 뼘 더 성장하고 성숙해져 있을 테니까.


<퓨처셀프>(벤저민 하디 저, 상상스퀘어)  마음에 와닿았던 문구.

'당신에게 발생한 실제 사건보다 훨씬 더 중요한 건 그 사건에 어떤 스토리를 입히느냐다. 당신에게는 어떤 경험이든 그것을 긍정적인 스토리로 구성할 힘이 있다. 모든 경험을 개인적 성장의 계기로 전환할 때 비로소 유익이 생긴다.


과거는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각색하고 기억해서 만들어가는 것이다. 누군가 그건 정신승리 아니냐고 할지도 모른다. 정신승리면 어떤가. 나의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스스로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벅차지 않은가. 지나온 모든 일들은 좋든 싫든 그 나름의 의미가 있었고, 배움과 경험으로 쌓여 지금의 나를 있게 했고, 힘찬 미래를 만들어갈 밑거름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암경험자로서의 찐한 시간은 그 어떤 경험보다 밀도 있고 강렬했고, 나를 더욱 성장하게 했다. 조금은 아프고 힘들었겠지만, 그 속에서 얻은 것들로 멋진 스토리를 만들고, 고운 색을 입혀보는 건 어떨까. 나의 내일을, 여러분의 내일을 힘껏 응원한다.


Image by Free Fun Art from Pixabay



이전 14화 운동, 살 길은 그것 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