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입니다
내 이름은 슈캡. 하얀 플라스틱 몸을 가진 물티슈 캡이다. 따뜻한 기계 사이에서 태어났고 늘 정해진 리듬으로 돌아가는 공장에서 자랐다.
"한 줄로 서."
"불량 없이 가자."
그곳에서는 모두가 자기 자리를 알고 있었다. 나는 그게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줄로 서 있던 친구들이 갑자기 사라지고 나도 어딘가로 밀려 들어갔다. 박스 냄새, 낯선 진동, 그리고 흔들림. 눈을 떴을 때 나는 쿠팡 창고에 있었다. 높은 천장,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바퀴들, 그리고 사람들의 목소리.
"빨리 빨리!"
주변엔 나보다 훨씬 크고 묵직한 박스들이 쌓여 있었다. 나는 가만히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우린 어디로 가는 걸까.'
그때, 내 몸이 휙 들렸다.
"으악, 살살 좀 던져주세요…"
하지만 아무도 듣지 못했다. 그 위로 또 다른 박스가 떨어지며 나는 조용히 깔렸다. 박스 속 공기가 뜨거워졌다. 이게 여행의 시작이라면 조금은 불안하고, 조금은 설렌다. 누군가의 손에 닿기 전까지 나는 잠시 이렇게 눌린 채로 세상의 소리를 듣는다.
오늘은 하루 종일 흔들림뿐이다. 누군가 나를 안고 오르락내리락한다. 엘리베이터의 낮은 진동, 띵동- 하는 소리, 그리고 반복되는 멈춤과 출발. 나는 여전히 박스 속 깊은 곳에 있다.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지만 사람의 마음은 묘하게도 공기를 타고 전해진다. 갑자기 박스가 툭 하고 멈췄다.
"아니, 엘베를 이렇게 층마다 누르고 배송하면 어떡해! 어?"
낯선 분노의 진동이 전해졌다. 엘리베이터 벽이 울렸다.
"……"
아무 대답도 없다. 움찔, 박스가 아주 작게 떨린다.
"젊은 사람이 열심히 일 잘하고 있는데, 무슨 개소리를 지껄여? 당신은 이 낮에 일도 안 하고 빈둥거리면서!"
나이 지긋한 할머니의 목소리인데도 우렁찼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누군가 아주 작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 떨리는 목소리는 박스를 스쳤다. 나는 보이지 않는 세상 속에서 조용히 그 진동을 기억했다.
누군가의 집 앞에 도착했다. 문 너머에서 아이들의 고함소리가 들린다.
"내 거야!"
"야, 누나가 먼저 잡았잖아!"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 울음. 그리고 다급한 남자의 목소리.
"가만있어! 아빠가 치울게!"
그 순간 나는 빛을 봤다. 마흔 즈음 되어 보이는 남자 얼굴. 땀에 젖은 이마, 허둥지둥한 손. 그가 나를 열어 물티슈를 뽑아갔다.
"어? 이거 왜 두 장씩 나오지?"
남자는 나를 잠시 내려다봤다. 이어 비슷한 나이의 여자가 다가왔다.
"이거 늘 한 장씩 잘 나오던 건데… 왜 이러지?"
고개를 갸웃하는 그 표정이 따뜻했다. 남자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생산라인 담당자를 짤랐나보네."
장난스러운 한마디였지만 나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기억이 났다. 그날 공장의 아침. 라인장은 평소처럼 출근해 컴퓨터 앞에 앉았다. 모니터를 보던 그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이게 말이 돼?! 이럴 순 없지!"
모두가 멈췄다. 누군가는 시선을 피했고 누군가는 그저 숨을 죽였다. 라인장은 전화를 붙잡고 울부짖었다.
"사람을 이렇게 갑자기 자르면 어떡합니까… 큰 애가 이제 고등학생인데"
하지만 대답은 없었다. 그는 점심도 되기 전에 조용히 공장을 떠났다. 남은 사람들은 우왕좌왕했고 라인은 흐트러졌다. 나도 그때 함께 흔들렸던 기억이 난다.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지금 내가 두 장씩 내어준 이유도.
한바탕 시끌벅적하던 집이 조용해졌다. 형광등이 꺼지고 불빛 대신 냉장고의 작은 웅웅거림만 남았다. 모두 잠든 줄 알았다. 그런데 발소리가 났다. 엄마가 식탁 앞에 앉았다. 휴대폰을 열고 한숨을 내쉬었다.
"물티슈… 또 뭘로 바꿔야 하나…"
나는 괜히 움찔했다. 사장은 돈을 아끼려 라인장을 내보냈고, 그 결과로 나 같은 캡들이 엉망이 되었으니 매출은 곧 떨어질 것이다. 마음 한 켠이 쿡쿡 찔리듯 아팠다.
엄마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한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조용히 고개를 숙인 채 무겁게 늘어진 어깨로 앉아 있었다. 좁혀진 미간, 퀭한 눈가, 그 얼굴엔 피로가 내려앉아 있었다.
그러다 문득, 그녀의 손이 나를 향했다. 나는 조심스레 열렸다. 한 장, 그리고 또 한 장. 그녀는 눈가를 닦았다. 고요 속에 작은 흐느낌이 흩어졌다. 아무 말도 없었지만 나는 그 소리를 마음으로 들었다.
잠시 후, 그녀는 깊은 숨을 내쉬더니 식탁을 닦기 시작했다. 그리고 빨래를 갰다. 아직 해야 할 일들이 남은 하루의 끝이었다.
나는 테이블 위에서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조용히 빛을 반사했다.
다음 날 밤, 집은 다시 조용했다. 아이들이 잠든 뒤, 엄마가 아빠를 불렀다.
"우리… 잠깐 얘기할까?"
"왜 또~"
그 짧은 말끝에 오래된 피로가 묻어 있었다. 여자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우리… 대화가 너무 없으니까…"
남자는 말없이 일어섰다.
"쓰레기 버리고 올게."
문이 닫히는 소리. 그와 함께 나도 들려 나왔다. 재활용 바구니 안, 텅 빈 병들, 찌그러진 캔들, 그리고 나 슈캡. 밖의 공기는 서늘했다.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흔들렸고, 다른 재활용품들이 내 옆에서 작은 소리로 인사했다.
"오늘도 고생했네."
"다음엔 우리 새로 태어나자."
그들의 목소리는 낡았지만 다정했다. 아침이 되고 경비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박스는 테이프 떼고 펼쳐서 버리셔야 해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무언가 던져지는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슬리퍼 끄는 발소리가 멀어졌다. 그 뒤로 들린 건 경비아저씨의 길고 낮은 한숨이었다. 그리고 테이프를 뜯는 소리, 박스를 펼치는 소리. 그 단순한 반복 속에 나는 잠시 비감에 잠겼다. 누군가는 버리고 누군가는 정리하며 세상은 그렇게 조금씩 소모되어 간다.
<에필로그>
시간이 흘렀다. 분리 수거함 속에서 떠나온 뒤의 일은 나조차도 알 수 없었다. 기계 소리, 불빛, 그리고 뜨거운 열기 속에서 나는 한 번 완전히 녹아내렸다. 형태는 사라졌지만 어딘가에서 다시 모양을 얻었다. 이번엔 낮고 넓은 그릇의 한 조각으로 화분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내 안에는 흙이 담기고 작은 씨앗 하나가 심어졌다.
며칠 뒤, 아이의 손이 내 위로 물을 뿌렸다. 햇살이 내려앉고 미세한 초록이 흙을 뚫고 나왔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닦아내던 손의 온기, 울음과 웃음이 섞인 그 집의 기억, 모두가 이 작은 잎 속에 다시 살아 있음을.
나는 조용히 햇살을 품었다. 이번엔 누군가를 닦지 않아도 그저 자라나는 것을 지켜보는 일만으로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