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 갭이어 청소년의 삶
나는 스무 살이 되자마자 서울이든 어디든 대학에 들어가던 또래 친구들과 달리, 대학에 진학하지 않았다. 대학 원서조차 넣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아주 복합적이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지금 내가 대학에 갈 필요성을 못 느꼈기 때문이다. 필요성을 못 느끼는데, 그냥 남들 다 가니까 간다는 것은 나에게 그다지 설득력 있는 이유가 아니었다. 특히, ‘우선 대학 가고 생각해.’라는 책임감도 없고 깊은 생각도 없는 말을 따르고 싶지 않았다.
스무 살에 대학을 가지 않고, 모아놓은 돈으로 여행을 다니고 싶었다. 그러면서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깊게 생각하고, 또 넓은 세상을 직접 체험해 보고 싶다는 의지가 강했다. 그렇게 공항 카페에서 알바를 하기도 했다. 해외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고 싶다는 나의 꿈을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2020년 2월. 코로나 바이러스가 퍼지면서 전 세계가 멈췄다. 여행은 물론, 유학과 워킹홀리데이까지 불가능하게 되었다. 나는 엄청나게 큰 고립감과 절망감을 느껴야 했다. ‘고립감’은 코로나 이후로 많은 사람들이 느꼈겠지만, 나는 당시 소속이랄 것이 없었기 때문에 그 감정이 몇 배로 더 크게 다가왔다. 게다가, 부모님과의 의견 차이로 인해 집에 있는 것도 지옥처럼 느껴졌었다. ‘절망감’은 내가 계획했던 것을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이유로 인해 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러니까 큰 ‘상실’을 경험했을 때 겪는 감정인데, 당시 나의 상황에 딱 맞는 감정이었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자연현상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기에, 누굴 탓할 수도 없었다. 그랬기에 더 절망스러웠다.
2020년에 해외에 나가진 못했지만, 내 나름대로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서 했다. 배우고 싶었던 것들(미디 작곡, 댄스, 글, 소묘 등)을 찾아서 배우고, 영어회화도 꾸준히 연습하고, 한예종 영화과 시험도 봐보고 (준비를 못 했었는데 1차 합격했었다.), 카페 알바도 병행했다. 당시 나는 물론 감정적으로 힘들었지만, 또 힘들었던 만큼 성장했던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 더 명확해지기도 했다. 나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다. 기대와는 다른 나의 스무 살이었지만, 나름대로 의미 있는 성장통을 겪었고, 새로운 경험들을 했다.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 버뱅크라는 캘리포니아의 소도시에 다녀온 이후로 인문계 학교에 대한 큰 회의감을 느껴 자퇴를 했다. 그리고 대안학교에 다니며 다양한 친구들을 만나 다양한 경험을 했다. 아마 그것이 내가 스무 살에 대학교 원서를 넣지 않은 데에 영향이 있지 않을까 싶다. 다양한 삶들을 보면서, 꼭 사회적 알람에 맞추어 살지 않아도 괜찮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우리나라는 사회적 알람에 굉장히 민감한 나라다. 단일민족인데다, 이 좁디좁은 땅에 많은 사람들이 부딪히며 살아가니 비교와 경쟁은 숨 쉬듯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다. 학생은 학생의 본분을 다하며 ‘학교 공부’에만 매진하여 ‘입시’에 성공해야 하고, (대학에 가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중고등학교 때보다 공부를 덜 하는 사람들이 많다.) 대학에 가면 취업을 해야 한다. 취업을 하고 어느 정도 나이가 차면 결혼을 해야 하고, 결혼을 하면 애를 낳아야 한다. 그리고 그 애를 자신이 자라온 것처럼 똑같이 키워야 한다.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쉽게 허용되는 ‘정상적인 삶’이다. 우리 부모 세대만 하더라도 이 정상적인 삶에 부합하지 않으면 여기저기서 크고 작은 사회적 질타를 받곤 했다.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우리는 모두 다르게 태어났는데, 어째서 서로 같아지지 못해 안달이란 말인가? 이것은 다양성 존중이나 철학 혹은 인문학, 심리학 등의 교육의 부재일 것이며, ‘먹고사는’것이 중요했던 세대의 비극일 것이다. 그 비극을 자녀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물려받는다. 그것에 저항하면 수많은 억압과 비난들을 감내해야만 한다. 그렇게 상처받은 마음은, 슬프게도 스스로 치유해야 한다.
어쨌든, 학교만 잘 가면 순탄대로가 보장됐던 삶은 이제 끝났다.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없어진지는 오래며, 좋은 대학에 간다고 하더라도 취업이 보장되지도 않는다. 현재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알고 행동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고, 그 분야에 노력을 해온 사람들이 결국 빛을 보는 시대지 않나. 물론, 융합의 시대기 때문에 자기 것에만 너무 집중하거나 함몰이 되면 안 되겠지만, 어쨌든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과 앎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진 시대인 것은 확실하다. 사람들도 이제 그런 자기만의 개성을 원하고 있다.
창의력과 비판능력을 키우는 것에 반하는 한국 교육 시스템에 대한 문제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느끼고, 또 알고 있다. 나는 그들이 알고 있다고 하면서 무력하게 그냥 그것을 순응하는 모습이 싫었다. 그 시스템이 틀렸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증명하거나, 많은 사람들이 그 시스템대로 살지 않는다면, 결국 그것도 무너질 거라 생각했다. 또, 창의력과 비판능력, 문제해결능력과 협업능력이 중요해지는 사회라면 지금의 입시 시스템은 굉장히 비효율적이다. 나는 그 시스템에서 벗어나기를 선택했다. 당시 그 선택을 동의했던 어른들은 단 한 명도 없었지만, 나는 그 선택을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꾸역꾸역 고등학교를 졸업했다면 더 큰 후회가 남았을 것이다.
어렸을 때는, 부모님이나 선생님들의 말이 전부처럼 느껴진다. 그들 말이 절대적으로 맞는다고 느껴지곤 한다. 그러나 아니다. 그들 또한 사람이며, 틀릴 때가 있다. 내 경험으론 그들은 오답률이 꽤나 높았다. 내 생각대로, 내 직감대로 내린 결정이 오히려 좋은 결과를 초래할 때가 많았으며, 좋지 않더라도 내가 한 결정이기에 큰 후회가 남지 않았다. 부모님의 말을 잘 듣는 아이가 썩 좋은 건 아니다. 자기 자신만의 생각이 있다면, 자신과 적어도 20-30년 차이가 나는 부모의 말에 절대 모두 동의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앞으로도, 사회나 부모님의 말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하기 보다는, 한 번 더 생각해보고, 나의 의견에 대해서 물어본 후에 결정을 내릴 것이다. 그것이 내가 살고자 하는 방식이다.
대학은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이 들 때, 가고 싶은 곳으로 가는 게 맞는다고 생각한다. 그냥 떠밀리듯 가면, 떠밀리듯 살게 되는 거다. 그렇게 자신의 마음속에 어떤 욕망이 있었는지 까맣게 잊은 채로 말이다. 그런 어른으로 살고 싶지는 않다. 사회적 알람이나 부모님의 생각, 말보다 나의 생각과 나의 말, 나의 직감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나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앞으로도, 나만의 속도와 방향대로 살아갈 것이다. 그 속도와 방향 속에서 학교가 필요하다면 갈 것이고, 아니라면 가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 대학은 그런 곳이다.